매거진 사기읽기

<사기세가>읽기 #8

<외척세가> ~ <제도혜왕세가>

by 기픈옹달

<외척세가>


외척세가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나라 초기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유방의 통일 후 한나라 황제의 제위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고제 - 혜제 - 소제 - 소제 - 문제 - 경제 - 무제 - 소제. <사기>는 무제 시기까지 기록되어 있으므로 무제를 이어 황제에 오른 소제에 대한 내용은 없다. 따라서 소제에 대한 기록은 후대에 가필된 부분이다. <외척세가>에는 저소손의 기록에 덧붙여 있다.


참고로 혜제 뒤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두 소제는 모두 少帝로 당시 권력은 여태후에게 있었다. 소제라는 호칭은 미약한 권력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 둘은 혜제의 아들이라고 하나 뒷 이야기가 많다. 이름뿐인 허수아비 황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제를 이어 황제에 오른 소제는 昭帝이다.


고제 유방의 황후 여태후야말로 한나라 초기 외척 가운데 가장 커다란 세력이었다. <사기>에서는 <여태후본기>에서 따로 이 시기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세가>에서는 매우 간단히 다룰 뿐이다. 김원중은 소제목으로 ‘여태후: 악녀의 화신’이라 붙였는데 좀 과한 면이 있다.


고제의 황후이자 혜제의 어머니 여태후가 <외척세가>의 첫자리를 차지했다면 그다음은 문제의 어머니 박태후의 차례이다. 여씨 집안을 물리친 후 황실과 공신은 다음 황제를 고민하였는데 대왕代王이 적임자로 꼽힌다 박태후의 유한 성품이 큰 이유였다. 강력한 외척세력을 경험한 터라 그에 대한 경계가 컸다. <본기>에서 다음 황제를 고민하는 대목을 보자.


대신들은 은밀히 상의해 말했다.

“소재와 영왕, 회양왕, 상산왕은 모두 효혜제의 친아들이 아니오. 여후가 계략을 써서 다른 사람의 아들을 황제의 아들이라고 거짓으로 일컫고 나서 그 생모를 죽이고 후궁에서 기르며 효혜제에게 아들로 삼은 후 후계와 제후왕으로 즉위시켜서 여씨를 강화했던 것이오. 지금 여씨를 이미 모조리 멸했는데, 여씨가 세운 자들을 남겨 두면 나중에 장대해져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를 무렵에는 우리들은 씨가 남지 않을 것이오. 차라리 왕들 가운데 가장 현명한 사람을 살펴 황제로 즉위시키는 것이 낫소.”

“제 도혜왕은 고제의 맏아들이고, 지금 그 적자가 제왕에 올라 있소. 근본을 헤아려 말하자면 (제왕은) 고제의 적장손이니 황제로 세울 수 있소.”

“여씨는 외척으로서 사악해 하마터면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했고 공신들에게 난리를 피웠소. 지금 제왕의 외가는 사씨駟氏이고 사균은 나쁜 사람이오. 만일 제왕을 황제로 세운다면 다시 여씨와 같은 꼴이 될 것이오.”

이에 회남왕 유장을 황제로 세우려 했지만, 나이가 어리고 외가 또한 흉악했다.

“대왕 유항은 (살아있는) 고제의 아들로서 나이가 가장 많은 데다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관대하오. 또한 태후의 집안인 박씨薄氏는 신중하고 선량하오. 더구나 맏아들을 황제로 세워서 순리대로 했으며, 어짊과 효성으로 천하에 소문이 나 있으니 그를 세우는 것이 적절하오.”

<사기본기>, 김원중역 404~405쪽.


두태후는 문제의 부인으로 어린 시절 가슴 아픈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동생을 잃었는데 이후 황후가 된 뒤 동생을 만난다. 혹시 동생을 사칭하는 건 아닌가 했지만 이별할 때의 구체적인 상황을 이야기해주자 궁안이 눈물바다가 되었다. 훗날 역사에서는 보기 드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두태후는 황제와 노자의 학설을 좋아했다 전해진다. (好黃帝老子言) 여기서 황제와 노자의 학설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도가의 학설과는 다르다. 흔히 이를 황로학黃老學이라 하는데 일종의 통치술이라 보면 된다.


왕태후는 경제의 황후로 무제의 어머니가 되는 사람이다. 본디 경제는 율희의 아들 장남 영을 태자로 삼았다. 그러나 율희가 지나치게 권력욕을 보이는 바람에 그를 멀리하게 된다. 태자의 어머니를 황후로 삼아야 한다는 신하의 말을 듣자 크게 노하여 그를 주살한 뒤 태자를 폐위한다. 외척에 대한 경계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무제의 황후 위황후는 본디 천한 신분이었으나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다만 태자였던 아들 거據가 난을 일으킨 이후 죽임을 당해 태후가 되지는 못했다. 그의 동생 위청은 흉노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한편 그의 조카인 곽거병 역시 크게 이름을 떨친 장수였다. 이 둘의 이야기는 <위장군표기열전>에 그 내용이 실려있다.


저소손은 무제가 왕태후가 궁에 들어오기 전 낳은 딸, 그러니까 자신과 배 다른 누이를 찾아 만나는 장면을 싣고 있다. 황제의 배다른 형제를 찾는다니! 후대의 윤리적 통념에서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당대의 관념에서는 크게 문제 되는 일이 아니었다. 황제가 배다른 누이를 찾아 신분을 높여주는 이야기가 미담이 될 수 있었다.


한편 무제는 태자가 죽은 뒤 나이 일흔에 낳은 막내아들을 후사로 세운다. 소제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다만 무제는 외척의 전횡을 막기 위해였는지 소제의 어머니 구익부인을 일찌감치 유폐시켜 죽여버렸다. 저소손은 무제의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하는데 전혀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 대목이다.



<초원왕세가>, <형연세가>, <제도혜왕세가>


<초원왕세가>와 <형연세가>는 매우 간결하다. 여기서는 경제 시기에 있었던 오초칠국의 난을 이야기해야겠다. 오초칠국의 난은 오왕과 초왕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난으로 오왕 유비, 초왕 유무, 조왕 유수, 교서왕 유앙, 제남왕 유벽광, 지천왕 유현, 교동왕 유웅거가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한 초기의 여러 난 가운데 매우 커다란 사건으로 자칫하면 나라 전체가 크게 어지러워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난이 실패한다.


이 난에 참여한 이들을 살펴보면 이렇다. 우선 가장 맨 위에 이름을 올리는 오왕 유비는 유방의 형 유희의 아들로 유방의 조카뻘 되는 인물이다. 참고로 나머지 여섯 왕은 유방의 손자뻘 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오왕이 주축이 되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오왕 유비는 황제 경제보다 항렬이 높았다. 쉽게 풀이하면 황제의 오촌이었던 셈.


초왕 유무는 유방의 동생 유교의 손자이다. 본디 초왕은 한신이었는데 모반죄로 한신이 초왕의 자리를 잃자 유방은 자신의 동생을 초왕의 자리에 앉힌다. 조왕 유수는 유방의 손자로 문제의 조카뻘 되는 인물이다. 경제 시대에 조조라는 인물이 앞장서 제후들의 봉읍을 삭감하는 정책을 펼친다(삭번책削藩策). 이는 제후들의 죄를 감찰하여 죄목에 따라 봉읍을 빼앗는 것. 당시 상황을 보면 매우 치밀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조왕도 불만을 일으켜 난을 일으켰다.


나머지 제남왕, 지천왕, 교서왕, 교동왕은 모두 제왕 유비의 아들들이다. 제왕 유비는 본디 유방의 맏아들이었다. 문제는 정실부인의 아들이 아니었다는 점. 결국 유비는 황제의 자리를 넘볼 수 없었다. 그래도 유방은 그를 두터이 대해 제나라 땅을 뗴어 주었다.


<여태후본기>와 <제도혜왕세가>에 실려있는 제왕과 혜제 사이에 대한 사건은 매우 유명하다. 연회 자리에서 혜제가 그를 형으로 대우하며 높이자 여태후는 노하여 그를 죽이려 한다.


10월, 혜제가 제왕 유비와 함께 여 태후 앞에서 연회를 열어 술을 마셨다. 도중에 혜제는 제왕을 형이라 생각해 윗자리에 앉게 하고 집안사람의 예를 따라 즐겼다. 이에 여태후는 화가 나서 짐독을 탄 술 두 잔을 제왕 앞에 놓도록 명한 후 제왕에게 일어나 장수를 기원하는 인사를 하게 시켰다. 제왕이 일어나자 혜제 또한 일어서서 술잡을 잡고 둘이 함께 장수를 기원하려고 했다. 이에 여 태후는 두려워하며 직접 일어나 혜제의 술잔을 엎어 버렸다. 제왕은 이를 괴이하게 여기고는 감히 마시지 않고 거짓으로 술에 취한 척하며 자리를 떴다.
<사기본기>, 김원중 역. 388쪽.


자칫 여태후에게 목숨을 잃을 수 있었으나 재기를 이용하여 화를 면한다. 이후 여씨 집안의 세력을 꺾는데 활약한 주허후 유장, 동모후 유흥거는 모두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이다. 도혜왕의 아들 애왕은 여씨 세력이 축출당할 때 황제 자리를 노리나 앞서 언급한 대로 외척의 문제로 발목을 잡힌다. 이후 제애왕이 세상을 떠난 뒤 제문왕이 자리에 오르나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난다. 이에 문제는 제나라 땅을 제도혜왕의 아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이들이 난을 일으킨다. 결국 이들의 난은 실패하고 모두 주살된다. 또한 봉지는 모두 한나라로 귀속된다.


도혜왕의 아들로 문제에게 제왕의 자리를 받은 제효왕은 오초칠국의 난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과 뜻을 함께 하려 했다는 정황이 발각되자 결국 두려움에 스스로 독약을 먹고 자살한다. 경제는 효왕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의 아들을 다시 제왕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이후 또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진다. 효왕의 손자, 제여왕은 누이와 간통하였는데 이 일이 조정의 귀에 들어간다. 조정에서는 주보언을 제나라 재상으로 임명하여 일의 전모를 밝히도록 한다. 심문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제여왕 역시 독약으로 목숨을 끊는다.


한나라 건국 이후 가장 큰 골칫거리는 함께 전장을 누볐던 공신들이었다. 유방은 공신들의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 황제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전장을 누벼야 했다. 토사구팽이라는 한 단어가 고제 유방의 고단한 삶을 대변한다. 고제 사후 다음 골칫거리는 여태후로 대표되는 외척세력이었다. 여씨 집안 세력을 어떻게 정리하고 유씨 황실을 안정시키는가 하는 것이 그다음 문제였다. 그 이후에는 유씨 제후들의 세력을 꺾는 게 과제가 되었다. 황제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제후들의 세력을 꺾어야 했는데 오초칠국의 난은 그에 대한 유씨 제후들의 반란이었다. 그러나 난은 실패로 돌아가고 중앙의 권력은 한층 강력해진다.


<초원왕세가>, <형연세가>, <제도혜왕세가>, 그리고 여기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 함께 중요한 <오왕비열전>을 보면 유씨 제후들이 어떻게 몰락하였는지를 잘 볼 수 있다. 공통으로 보이는 것은 이들의 봉읍이 깎이는 것은 물론 결국에는 이들의 봉읍지가 모두 한나라 조정 아래로 들어가게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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