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사기읽기

<사기세가>읽기 #9

<소상국세가> ~ <유후세가>

by 기픈옹달

<소상국세가>


초한쟁패, 그 치열한 전쟁에 대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던졌던 질문은 이것이다. 대체 유방은 어떻게 항우를 이길 수 있었을까? 다양한 분석이 있다. 누구는 초나라보다 한나라에 인재가 많았다는 점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는 그 유명한 유방의 ‘삼불여三不如’에서 출발한다.


運籌策帷帳之中 決勝於千里之外 吾不如子房 鎮國家 撫百姓 給餽馕 不絕糧道 吾不如蕭何 連百萬之軍 戰必勝 攻必取 吾不如韓信 此三者 皆人傑也 吾能用之 此吾所以取天下也 項羽有一范增而不能用 此其所以為我擒也
<高祖本紀>

장량, 소하, 한신 이 셋이 있었기에 유방은 항우를 압도할 수 있었다. 항우에게도 범증이라는 인재가 있었으나 항우는 그를 내치고 만다. 유방은 이 셋을 인걸人傑이라 부른다. 여기서 건한삼걸建漢三傑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 셋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이가 바로 소하이다. 사마천이 여러 공신 가운데 소하를 맨 첫 자리에 둔 것도 이 때문일 테다.


소하는 상국相國에 올랐는데 이는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라 할만하다. 유방은 그를 매우 아껴 여러 특혜를 주었다. 帶劍履上殿 入朝不趨, 검을 차고 전에 오를 수 있었으며 입조에 종종걸음으로 나아가지 않아도 되었다. 소하가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공이 제일第一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소하는 일등공신이 될 수 있었을까? 사실 소하는 그 치열한 전장에서 늘 비켜나 있었다. <항우본기>나 <고조본기>를 보더라도 그의 이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저 위에 이름을 올린 한신이나 장량, 혹은 경포나 팽월 등과 비교하면 소하는 별 존재감이 없다. 장수를 사로잡지도 못했으며, 성을 빼앗지도 못했다. 공적이라 할 만한 게 없는 상황. 이러니 다른 신하들의 불평이 컸다. 전장에서 얼굴을 비치지도 않았던 백면서생이 어떻게 자신들보다 더 공이 높다고 할 수 있는가?


帝曰 諸君知獵乎 曰 知之 知獵狗乎 曰 知之 高帝曰 夫獵 追殺獸兔者狗也 而發蹤指示獸處者人也 今諸君徒能得走獸耳 功狗也 至如蕭何 發蹤指示 功人也 且諸君獨以身隨我 多者兩三人 今蕭何舉宗數十人皆隨我 功不可忘也 群臣皆莫敢言

유명한 사냥꾼과 사냥개의 비유. 간략하게 요약하면 싸움터에서 군공을 세웠다고 자랑하는 이들은 사냥개와 같다. 지시에 따라 충실히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그러나 소하의 공은 사냥꾼과 같다. 이가 없었다면 어찌 사냥개가 사냥감을 좇을 수 있을까. 사냥개의 고사, 토사구팽兎死狗烹을 생각하면 유방이 소하를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소하에게 많은 공이 있겠지만 초한전쟁에 국한하여 말한다면, 소하가 있었기에 유방은 끊임없이 패할 수 있었다. 소하는 유방이 전장을 누비는 동안 관중 땅을 지키고 관리하면서 꾸준히 군사와 물자를 보내주었다. 연이은 패배에도 유방이 항우를 끊임없이 상대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여러 사람의 말처럼 소하가 만약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유방은 천하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유방은 소하를 일등공신으로 삼았다.


그러나 한편 소하는 끊임없이 유방의 의심에서 벗어나야 했다. 관중을 지키고 있을 때에는 자신의 가족과 형제를 전장에 보내야 했다.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야 했다. 유방이 그를 일등공신으로 삼을 때 이 점은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소하 한 사람이 아니라 그의 집안 전체가 유방을 도왔다는 점. 유방이 보기에 소하는 그 가족들과 함께 늘 전장에 있었다. 비록 직접 전장에서 싸움을 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여기에 과거 소하가 패현의 관리였을 때 유방에게 이백 전을 더 주었다는 이유로 식읍 이천 호를 더 받는다. 일등공신의 자리에 보너스까지! 그러나 소하는 그저 두 다리를 뻗고 편안히 잘 수 없었다. 논공행상이 끝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숙청의 시기가 펼쳐진다. 자칫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소하에게 화가 미칠 수도 있는 상황. 항룡유회亢龍有悔! 끝까지 올라갔으면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이때 소하 곁에 있던 객이 제안하는 방법은 ‘스스로 더럽히기(自汙)!’ 곤두박질치기 전에 스스로 내려갈 것. 다 내려가지 못한다면 반 걸음이라도. 결국 소하는 재물과 명성을 탐한다는 죄목으로 옥에 갇힌다. 어쩌면 그는 쾌재를 불렀을지 모른다. 작란作亂, 반란을 도모하였다는 죄보다는 훨씬 가볍지 않나. 결국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옥에서 풀려난다.


대장군 한신의 경우를 생각하면 소하의 처신을 지혜롭다 평가할 수 있다. 한신은 제왕齊王이 되었고 항우의 죽음 이후에는 초왕楚王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난을 꾸몄다는 이유로 회음후淮陰侯로 강등되고, 끝내는 여후에게 목숨을 잃는다. 이때 여후를 도와 한신을 죽인 인물이 바로 소하이다. 그는 일찍이 유방에게 한신을 천거하며 대장군으로 삼을 것을 청하기도 했다. 도망간 한신을 좇아가 데리고 돌아온 이야기는 유명하다. <회음후열전>에 이 내용이 실려 있다.


한 때 자신이 천거했던 인물의 죽음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면서 소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긴 과거 인물 가운데 군주의 총애를 받다 하루아침에 몰락한 이가 어찌 한 둘인가. 만약 소하가 물러나는 법을 몰랐다면 <사기>에는 <소상국세가>라는 편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 회음후 한신마냥 <열전>에 이름을 올렸겠지.



<조상국세가>


조참은 소하에 이어 상국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나, 소하와 달리 최전선을 누빈 인물이다. 여러 무장들이 조참의 공을 높이며 일등공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로 조참의 공은 컸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전장을 누볐던 까닭에 칠십여 군데나 몸에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그 까닭에 <조상국세가>의 앞부분은 그의 공적으로 채워져 있다. 성을 정벌하고, 장수를 죽이며, 사로잡은 이야기가 연이어 이어지는 바람에 어지러울 정도이다.


그런 조참이었으나 첫 번째 자리는 소하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관내후 악군은 조참 백 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소하 한 사람에 비길 수 없다 평하기도 했다. 조참은 소하를 넘을 수 없었다. 본디 패현의 관리 출신으로 사이가 가까웠던 둘의 관계가 멀어진 데는 이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2인자 조참.


그 덕분일까? 비록 젊은 시절 생사가 오가는 전장을 누볐지만 유방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후에는 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이런 그에게 소하의 죽음은 좋은 기회였다. 그의 예상대로 소하가 세상을 떠난 뒤 상국의 자리는 조참의 차지가 된다.


그러나 정작 조참은 상국의 자리에 올라서는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지낼 뿐이었다. 오죽 어울리는 것을 즐겼는지 집 근처의 낯선 관리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술자리를 가질 정도였다. 이에 당시 황제였던 혜제는 조참을 불러 대체 왜 그리 아무 일도 하지 않는지 묻는다.


參免冠謝曰 陛下自察聖武孰與高帝 上曰 朕乃安敢望先帝乎 曰 陛下觀臣能孰與蕭何賢 上曰 君似不及也 參曰 陛下言之是也 且高帝與蕭何定天下 法令既明 今陛下垂拱 參等守職 遵而勿失 不亦可乎 惠帝曰 善 君休矣

앞서 고제 유방과 소상국 소하가 있었다면 지금은 혜제와 조상국의 시대이다. 그러나 앞과 비교하면 어떤가. 고제보다 소하보다 더 나을 수 있을까? 혜제도 고제에 미치지 못하며 조참도 소하에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전에 정해놓은 것을 그대로 지키면 되지 따로 무엇을 더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蕭何為法 顜若畫一 曹參代之 守而勿失 載其清凈 民以寧一

앞의 <소상국세가>에 이어 <조상국세가>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반복된다. 언제 화를 입는가. 거꾸로 화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고의 자리에 오른 소하에게는 스스로 물러서는 법이 필요했고, 만년 2등 조참에게는 무리하지 않는 법이 필요했다.


앞서 소하를 두고 이야기한 항룡유회亢龍有悔는 본디 <주역: 건괘>의 여섯 번째 효에 붙은 글이다. 건괘는 잠룡물용潛龍勿用에서 시작하여 용이 하늘로 오르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너무 올라가면 후회할 일만 남는다. 아직 정점을 찍지 않은 자리, 다섯 번째 효의 자리가 더 좋다. 비룡재천飛龍在天! 이미 하늘을 날고 있는데 또 무엇이 더 필요할까.


조참이 보기에 자신은 이미 충분히 높은 자리에 올랐으며, 나라의 정치 또한 그러했다. 그러니 더 나아가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머물러 있을 것.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있지만, 조참은 가만히 있었기에 별 화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굳이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것도 지혜로운 길이다.



<유후세가>


유후 장량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많이 가지고 있다.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박랑사 일화는 젊은 시절 그가 얼마나 야심찬 인물이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말년의 삶을 보면 그와는 상반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사마천의 기술에 따르면 한 노인과의 만남이 그 시작이었다.


良嘗閒從容步游下邳圯上 有一老父 衣褐 至良所 直墮其履圯下 顧謂良曰 孺子 下取履 良鄂然 欲毆之 為其老 彊忍 下取履 父曰 履我 良業為取履 因長跪履之 父以足受 笑而去 良殊大驚 隨目之 父去里所 復還 曰 孺子可教矣 後五日平明 與我會此 良因怪之 跪曰 諾 五日平明 良往 父已先在 怒曰 與老人期 後 何也 去 曰 後五日早會 五日雞鳴 良往 父又先在 復怒曰 後 何也 去 曰 後五日復早來 五日 良夜未半往 有頃 父亦來 喜曰 當如是 出一編書 曰 讀此則為王者師矣 後十年興 十三年孺子見我濟北 穀城山下黃石即我矣 遂去 無他言 不復見 旦日視其書 乃太公兵法也 良因異之 常習誦讀之

기이한 노인과의 만남, 그리고 태공병법太公兵法의 취득. 과연 그 노인은 누구였을까? 사마천은 곡성산의 누런 돌이라 말하지만 제나라의 시조 태공망 여상을 떠오르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태공이 주 무왕을 도와 새로운 나라를 세웠듯 장량 역시 유방을 만나 크게 활약할 것임을 예고하는 이야기이다.


이는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에 가까웠을 테다.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훗날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재창작된다. 이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고 싶은 건 이런 내용이었을 테다. 비밀스러운 가르침은 쉽게 배울 수 없다. 우연히, 그러나 덕을 갖춘 이 만이 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한편 이 기이한 노인은 늘 책을 전해준다. 비밀스러운 가르침, 병법이나 도술, 무술 따위는 비밀스러운 이 책을 통해 전수된다. 훗날 만들어지는 비서秘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역시 여기서 출발하는 게 아닐지.


한때 협객이었던 장량은 이후 유방을 만나 그의 패업을 돕는 인물이 된다. 장량은 직접 전쟁터에 나가 창을 휘두르는 무장은 아니었다. 대신 그는 전략을 내놓는 책사의 이미지로 흔히 그려진다. 훗날 <삼국지연의>의 제갈량의 모습 역시 장량을 참고하여 그려졌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둘은 자주 함께 언급된다.


그러나 사마천의 기록에서 모사謀士 장량의 모습을 찾는 건 쉽지 않다. 도리어 전장이 아닌 곳에서 유방이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할 때 큰 도움을 준다. 대표적인 것이 홍문연! 관중에 처음 들어온 유방은 진 황제의 궁궐을 차지하고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위세를 부리고 싶어 했다. 궁에서 그를 끌어내었던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장량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더 중요한 것은 이후 항우가 관중에 들어와 유방의 군대와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홍문연의 자리를 주선했다는 점이다.


항우의 숙부 항백은 젊은 시절 장량과 연을 맺은 게 있어 장량을 구해주고자 했다. 항우의 군대가 곧 유방의 군대를 칠 것이니 서둘러 도망가라고. 그러나 장량은 홀로 도망치지 않고 유방을 데리고 항우를 만나러 간다. 어쩌면 맹수의 입 속에 스스로 들어가는 꼴. 결과적으로 두 군대가 맞붙는 일 없이 잘 해결될 수 있었다. 이 홍문연의 이야기는 <항우 본기>에 매우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유방이 한왕이 되어 다시 동쪽으로 뜻을 펴려 했을 때 누구를 이용해야 하는 지를 알려준 것도 장량이었다. 장량은 경포, 팽월, 한신을 이용하라고 조언한다. 실제로 이 셋은 항우가 유방과 전쟁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항우를 괴롭힌 이들이었다. 다만 모두 한의 통일 이후 차례로 팽당하지만.


이처럼 장량은 <사기>에서 개별 전투보다 전체의 판도를 읽는데 능한 인물로 그려진다. 유방이 역이기의 말을 따라 육국 왕의 인장을 만들려고 했을 때 이를 막은 인물이 장량이었다. 젓가락을 들어 역이기의 말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이야기해주었는데 그 내용이 매우 자세하다. 요약하면 항우를 제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육국의 후손을 왕으로 봉해준다면 자칫 전선만 복잡해질 수 있는 상황이라는 이야기. 이 이야기를 듣고 유방은 입안의 음식을 뱉어버리며 욕지거리를 했다 전해진다.


한편 이후 한신이 제 땅을 평정하고 제나라의 왕으로 삼아주기를 청했을 때 유방은 격하게 분노했다. 그러나 열세였던 유방 입장에서 한신의 세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장량은 유방의 발을 밟기까지 하며 유방을 달랬고, 한신을 붙잡아 두라는 계책을 내놓는다. 한신이 괴통의 책략과 항우의 제안, 천하를 셋으로 나누라는 이야기를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은 결정적으로 장량의 공이었다.


여러 신하들이 공을 두고 다투며 난장판을 만들 때 이를 잠재울 방법을 내놓은 것도 장량이었다. 오랜 원한을 가지고 있던 옹치에게 먼저 상을 내릴 것. 이를 보고 여러 무장들은 자신들에게도 상이 내릴 것을 기대했다 한다. 형세를 읽고 판을 바꿀 줄 아는 장량의 재주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장량은 낙양 대신 관중을 도읍으로 삼기를 권하였고, 이 선택이 옳았음을 <사기>는 증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났을 때 수도가 낙양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서쪽에 치우친 형세였지만 어지러운 한나라 초기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기에는 적절한 선택이었다.


留侯從入關 留侯性多病 即道引不食穀 杜門不出歲餘

치열한 전쟁이 끝난 이후 그는 곡기를 끊고 도인술道引術을 익히며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려했다. 사마천은 그가 병이 많아 건강을 위해 그러했다 전한다. 가정이라지만 신묘한 꾀를 내었던 장량은 도인술을 통해 신선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세상은 장량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말년 말 그대로 두문불출하던 장량을 끌어낸 것은 태자 문제였다.


유방은 척부인을 사랑하여 그의 아들 조왕 유여의를 태자로 삼으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여후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찾던 가운데 장량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결국 장량의 계책으로 유방은 태자를 바꾸려던 생각을 고쳐먹는다.


上目送之 召戚夫人指示四人者曰 我欲易之 彼四人輔之 羽翼已成 難動矣 呂后真而主矣 戚夫人泣 上曰 為我楚舞 吾為若楚歌 歌曰 鴻鴈高飛 一舉千里 羽翮已就 橫絕四海 橫絕四海 當可奈何 雖有矰繳 尚安所施 歌數闋 戚夫人噓唏流涕 上起去 罷酒 竟不易太子者 留侯本招此四人之力也

<여태후본기>를 통해 훗날 벌어질 일을 아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 장면이 남기는 여운을 쉬이 지나칠 수 없다. 이때 유방은 이후 벌어질 참혹한 사건을 미리 예견한 것일까? 척부인의 저 눈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呂后真而主矣, 여후가 진정 너의 주인이다.’ 이 말 덕분에 여후는 복수의 칼날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권력 다툼이 끝나고 장량은 다시 신선의 꿈을 꾼다. 곡기를 끊고 새로운 신체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 손이 있었다. 여후의 손. 여후는 이 짧은 한 평생을 어찌 그리 고생스럽게 지내냐며 장량에게 억지로 음식을 먹인다. 결국 장량은 여느 평범한 사람처럼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장량은 끝내 신선이 되지 못했다.


乃學辟穀 道引輕身 會高帝崩 呂后德留侯 乃彊食之 曰 人生一世間 如白駒過隙 何至自苦如此乎 留侯不得已 彊聽而食

장량은 젊은 시절 만난 노인의 화신, 누런 돌을 만나 그 돌을 아끼며 돌에게 제사까지 지냈단다. 그가 죽었을 때 그 돌도 함께 묻혔다고 사마천은 전한다. 비록 신선이 되지는 못했으나 신선의 삶을 끌어안고 세상을 떠났다고 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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