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사기읽기

<사기세가>읽기 #10

<진승상세가> ~ <삼왕세가>

by 기픈옹달

<진승상세가>


진승상 진평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의 외모가 궁금해진다. 대체 어떻게 생겼기에 여기저기서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일까? 오죽하면 쌀겨만 먹고 산다는 가난한 삶에도 그의 빼어난 외모는 주목을 끌었단다. 그러나 잘 생기면 뭐하나, 천하의 한량이 따로 없었는데… 그는 가난한 집안 살림에도 아무 일을 하지 않았다. 생업 따위에 별 관심이 없었던 유방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던 진평이었는데 여차저차 결혼 뒤 정신을 차렸는지 좀 살림이 나아졌다. 그는 마을 제사의 제육을 나누는 일을 맡았는데 이름(平)처럼 고르게 나누어주었다.


嗟乎 使平得宰天下 亦如是肉矣

그러면서 겨우 제육이나 나눠주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나름 커다란 포부를 볼 수 있는 부분. 이 때문이었을까.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그도 반란군에 힘을 보탠다. 처음에는 위왕을 따랐다가 그다음에는 항우를 따랐다. 결국 나중에는 유방의 심복이 된다. 그런데 그전에 그를 시기하는 이들이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그가 높은 자리를 얻는 것이 불만이었다. 게다가 진평에게는 여러 추문이 뒤따랐다. 측근들의 불만에 유방은 마음이 흔들렸으나 진평의 태도를 보고 그를 높이 쓰기로 마음먹는다.


<진승상세가>는 진평의 계책을 몇 가지 소개한다. 그 가운데 많은 재물을 가지고 항우와 그의 측근 사이를 갈라놓는 일이 있었다. 아보亞父라 불리었던 범증과 항우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진평의 계책이었다. 게다가 형양에서 유방을 몰래 도망치게 만든 것도 진평의 계략이었다.


陳平曰 人之上書言信反 有知之者乎 曰 未有 曰 信知之乎 曰 不知 陳平曰 陛下精兵孰與楚 上曰 不能過 平曰 陛下將用兵有能過韓信者乎 上曰 莫及也 平曰 今兵不如楚精 而將不能及 而舉兵攻之 是趣之戰也 竊為陛下危之

훗날 한신의 세력을 견제할 방법을 내놓은 것도 진평이었다. 한신이 모반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유방은 쉽게 한신을 치지 못했다. 그의 세력이 워낙 강성했을 뿐만 아니라, 한신 개인의 능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진평은 한신과 정면승부를 피하는 대신 꾀를 내어 그를 생포할 것을 제안한다. 진평의 계책대로 한신은 유방에게 잡혔고 몸이 묶여 수레에 실려지는 치욕을 겪는다. 회음후로 강등된 이 이야기는 <회음후열전>에 잘 보인다.


이 외에도 진평이 유방을 위해 활약한 이야기가 많다고 사마천은 전한다. 훗날 유방이 흉노와의 싸움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을 때 이를 타개할 방법을 일러준 것도 진평의 계책이었다. <사기>를 읽어보면 유방도 꽤 훌륭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항우에게 연전연패하기는 했으나 경포를 비롯하여 당대의 뛰어난 장수들과 몸소 싸워 이겼다. 그런 그렸지만 흉노와의 싸움에서는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흉노의 병사들에게 포위당해 이레 동안 굶주린 상황, 이때 진평의 계책으로 겨우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사마천은 그 계책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전한다. 워낙 비밀이어서.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연지, 즉 흉노 선우 부인의 질투심을 이용했다 한다.


이후 진평은 여후의 죽음 이후 여씨 천하를 무너뜨리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이때 진평과 함께 활약했던 인물이 바로 강후 주발이다. 이후 문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주발은 우승상으로 진평은 좌승상이 되었다. 주발이 더 높은 자리에 오른 것. 하루는 황제가 나랏일에 대해 물었는데 주발은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땀만 흘렸다. “한 해 동안 천하에 송사가 몇 건인가? 한 해의 금전과 곡식 수입 지출이 어떻게 되는가?” 똑같은 질문을 진평에게 던졌을 때 진평은 간단히 답한다. “맡은 자가 있습니다(有主者)” 당연히 이어지는 황제의 질문. 일마다 맡은 자가 있다면 대체 그대는 무슨 일을 하는가?


上曰 茍各有主者 而君所主者何事也 平謝曰 主臣 陛下不知其駑下 使待罪宰相 宰相者 上佐天子理陰陽 順四時 下育萬物之宜 外鎮撫四夷諸侯 內親附百姓 使卿大夫各得任其職焉 孝文帝乃稱善 右丞相大慚 出而讓陳平曰 君獨不素教我對 陳平笑曰 君居其位 不知其任邪 且陛下即問長安中盜賊數 君欲彊對邪

진평의 대답은 참으로 그럴싸하다. 간단히 줄이면 자신과 같은 재상은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지 구체적인 실무에 얽매인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 곱씹어 보면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만드는 대목이다. 게다가 은근슬쩍 황제의 역할에 대해서 논하기도 하니 황제가 크게 기뻐할 수밖에.


<강후주발세가>


앞의 진평이 소하나 장량을 떠오르게 만든다면 주발은 조참을 떠오르게 만든다. 그는 여러 공적을 세운 인물이었다. 사마천은 그가 세운 공적을 나열한다. 여러 전장에서 앞장서 싸웠던 만큼 그의 공적을 읽다 보면 어지러울 지경이다. 전장에서 익힌 단호함 때문일까? 그는 유생이나 유세객과 잘 맞지 않았다. 그들을 만나면 늘 빨리 말하라고 재촉했다 한다. 핵심만 간단히!!


진평과 함께 여씨를 몰아내고 문제를 새웠던 주발이었으나 높은 공적은 화가 되어 이른다는 법칙에서 그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여러 전장을 누볐던 주발이었으나 옥리의 심문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결국 옥리에게서 풀려나기는 하나 옥리의 무서움을 톡톡히 맛본 이후였다.


吾嘗將百萬軍 然安知獄吏之貴乎

주발의 이야기는 아들 주아부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는 젊은 시절 기이한 이야기를 듣는다. 3년 뒤에 후侯가 될 것이며, 이어 팔 년 뒤에는 장군과 승상이 되고, 나아가 구 년 뒤 굶어 죽을 것이라는 예언. 주아부는 그 예언에 코웃음 친다. 그러나 잘 알지 않는가. 이런 글에서 예언은 빗나간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예언대로 그는 조후條侯가 되고 이어 장군의 자리에 오른다.


그가 장군이 되어 문제의 눈에 들었던 것은 원칙을 매우 중시했기 때문이다. 비록 황제의 방문이라 하더라도 군령에 따라 처리하도록 했다. 황제의 말이라도 군영에서 달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주아부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상태로 황제를 맞았다. 이것이 바로 군대의 예(軍禮)!


이 원칙주의자는 오초칠국의 난에서 크게 빛난다. 그는 오초칠국의 군대와 맞서 싸우기보다 견고히 성을 지켰으며 그들의 보급로를 교란시켰다. 이를 위해 양나라에서 구원병을 요청하는 것도 무시했다. 그의 전략적 선택은 옳았으며 결국 오초칠국의 난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에도 주아부는 원칙을 고수한다. 그 결과 황제인 경제와 사이가 멀어진다. 결국엔 자신의 묘에 묻을 갑옷과 병기를 구입했다는 이유로 옥리에게 넘겨진다. 그는 무고를 주장했으나 경제의 눈밖에 난 이상 화를 피할 길은 없었다. 모반을 기획했다는 죄목에 대해 그는 어찌 순장품으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느냐 되묻는다. 이때 옥리의 대답이 걸작이다.


君侯縱不反地上 即欲反地下耳

이 땅에 살아서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겠지만 죽어서 지하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그러지도 못했다. 결국 그는 닷새 동안 먹지 않고 버티다 피를 토하고 죽었다. 당연히 그가 받은 봉국 또한 사라졌다. 사마천의 간결한 기록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공신의 자식도 옥리의 손에 넘겨지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因不食五日 嘔血而死 國除

<양효왕세가>, <오종세가>, <삼왕세가>


<양효왕세가>는 경제의 동생 유무의 이야기를 담았다. <오종세가>는 경제의 열세 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삼왕세가>는 논란이 많은데 무제가 세 아들을 왕으로 봉하는 이야기이다. 모두 황제의 형제 혹은 자식의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금수저 가운데서도 금수저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지만 실상 내용을 보면 그리 순탄치는 않다.


양효왕은 경제의 동생으로 어머니 두태후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두태후는 둘째 아들을 크게 사랑하여 경제가 세상을 떠나면 둘째가 황위를 잇길 바랐다. 이런 두태후의 마음을 알았기에 양효왕은 황제에 맞먹는 위세를 떨쳤다. 황제와 같은 급의 수레를 탔으며 황제의 사냥터에서 황제처럼 사냥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태자를 세우고 양효왕에게 황위가 계승될 가능성을 없애버렸다. 이에 분노한 양효왕은 몰래 사람을 보내 이를 꾸민 신하들을 몰래 죽였다.


비록 자객을 붙잡지는 못했으나 일어난 사건을 보면 그 배후를 쉽게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태자를 세워 양효왕을 견제한 이들이 모두 죽게 되었으니 누가 사주한 것인지는 뻔한 일이었다. 결국 꼬리를 잡힌 양효왕은 측근 신하에게 죄를 덧씌워 화를 피하려 한다. 그럼에도 걱정이 풀리지 않아 그는 직접 두태후를 찾아가 사죄한다. 두태후가 그를 크게 아끼는 탓에 경제도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양효왕의 죽음 이후 양나라를 다섯으로 나누어 그의 다섯 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가장 흥미로운 건 양평왕 즉, 양효왕의 손자 이야기이다. 양평왕의 부인 임왕후는 요즘으로 치면 시할머니, 이태후와의 관계가 나빴다. 이태후가 병에 걸렸을 때 문병을 가지도 않았다. 그러나 훗날 이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 임왕후는 수급이 저잣거리에 내걸리는 참혹한 최후를 맞는다. 아무리 못됐다 하더라도 왕후인데 수급이 저잣거리에 내걸리다니! 관리들이 앞다투어 이를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당시 관리의 입김이 얼마나 강한지는 다른 왕들의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다양한 부정 - 살인을 저질렀다던가, 간음을 행했다던가 하는 이유로 평민으로 강등된다. 황족이 일반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이도 감지덕지할 상황이었다. 적지 않은 관리가 주살할 것을 건의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주발과 주아부를 잡았던 옥리가 얼마나 거침없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혹독한 관리(酷吏)에게는 공신도 황족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오종세가>에 나오는 여러 왕들도 비슷하다. 황제의 아들로 왕이 되었으나 간음했다는 이유로 옥리에게 넘겨진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목숨을 끊기도 하고 평민으로 강등되기도 한다. 황제조차 관리들의 주장을 묵살할 수 없었다. 주살을 요청하는 그들의 입을 막지 못하고 주살 대신 평민으로 강등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는 관리들의 힘이 그만큼 강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이들을 통해 제후 왕들의 세력을 견제하고 황제 일인의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고도 볼 수 있다. 진정 천하가 일인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는 순간이다.


高祖時諸侯皆賦 得自除內史以下 漢獨為置丞相 黃金印 諸侯自除御史 廷尉正 博士 擬於天子 自吳楚反後 五宗王世 漢為置二千石 去丞相曰相 銀印 諸侯獨得食租稅 奪之權 其後諸侯貧者或乘牛車也

<삼왕세가>는 논란이 많다. 사마천의 기록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뒤에 붙은 저소손의 글이 지나치게 길기도 하다. 내용은 간단한데, 곽거병 등의 신하가 무제에게 무제의 아들을 왕으로 봉하기를 권하는 글이다. 무제는 처음에는 이 상소를 물리친다. 몇 번 거듭되지만 무제 역시 이들의 상소를 따를 수 없다는 의견을 붙여 돌려보낼 뿐이다. 몇 차례 밀당 끝에 결국 무제는 신하들의 뜻에 따르기로 한다.


결국 무제는 세 아들을 각기 동쪽, 북쪽, 남쪽으로 보낸다. 그러면서 책문策文을 남기는 데 그 내용이 흥미롭다. 이들에게 각기 푸른색 사토, 검은색 사토, 붉은색 사토를 주며 주의해야 할 것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오행사상에 따라 방위마다 주관하는 힘이 따로 있고 그에 따르는 덕목도 서로 달랐음을 보여준다.


각기 각 방위에 걸맞은 덕을 갖추고 있었다 하나, 결국 이들은 중앙의 ‘황黃’에 견줄 존재가 되지는 못했다. 이들은 겨우 천하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중앙의 울타리가 되어 중앙을 지키는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었다.(封建使守藩國) 이제 ‘춘추전국’과 같은 역동적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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