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2-1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육가六家의 핵심을 논하였으니 다음과 같다. : <역>에 이르기를 ‘천하의 이치는 하나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저마다 다르니, 똑같은 데에 이르더라도 길이 다른 것과 같다’라 하였다. 음양가陰陽家, 유가儒家, 묵가墨家, 명가名家, 법가法家, 도덕가道德家 여섯이 있으니 이들은 각기 다스림에 힘썼다. 다만 추구한 것이 달라 관점이 같지 않았다.
"乃論六家之要指曰:易大傳:「天下一致而百慮,同歸而殊涂。」夫陰陽、儒、墨、名、法、道德,此務為治者也,直所從言之異路,有省不省耳。”
다시 철학에 대한 논의. 내가 동양철학을 전공한다고 했을 때, 철학관을 차리는 거냐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철학관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좀 이상한 것을 하는 게 아니냐는 비꼼이 그 말에 담겨있었다. 그 말을 더 풍부하게 해석하면, 네가 하는 그것도 철학이냐 하는 뜻이기도 하다.
이 말을 곱씹는 것은 내 가슴에 생채기를 내었기 때문이 아니라, 철학에 대한 특정 관점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굳이 철학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철학과 철학이 아닌 것을 곧잘 나누곤 한다. 좁은 의미의 철학이란 형이상학, 즉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세계의 사건이나 손에 잡히는 물체들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개념의 의미와 논리를 다루는 학문을 가리킨다. 만약 두루두루 철학이라는 말을 쓰게 한다면 철학관에서도 철학을 할 것이요, 저마다 이른바 인생철학이라는 것을 주창하지 않겠는가.
만약 좁은 의미의 형이상학, 순수한 개념과 사유를 다루는 학문만이 철학이라면 중국철학이란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중국 철학자들은 순수한 사변적인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던 까닭이다. 누군가는 이 글을 들어 반문할지 모르겠다. “形而上者謂之道형이상자위지도, 形而下者謂之器형이상자위지기.” 즉, 형이상을 ‘도道’라고 일컫고 형이하를 ‘기器’라 일컬으니 ‘도’에 대해 다루는 것이 모두 철학이 아니겠느냐고. 이 말은 <주역: 계사전>에 나오는 말로, 여기서 ‘형이상’이라는 말을 빌어 metaphysics의 번역어로 삼았다. 이렇게 보면 철학자, 즉 형이상학자는 ‘도’를 탐구하는 사람이라는, 다르게 말하면 ‘도’를 이야기하는 모두가 철학자라는 그럴싸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런 식의 해석은 중국 철학이 고민한 주요한 문제를 간과한다는 단점이 있다. 중국 철학자들은 대체로 현재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의 부당함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인물이었다. 공자가 “朝聞道 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했을 때, 그 ‘도’란 우주의 법칙이나 하늘의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니라 무도無道한 세상이 바로잡히기를 바라는 소망을 말한 것이었다. 현재 눈 앞에 벌어지는 혼란이 끝나기를 고대하는 마음이었다. 맹자는 인의仁義를 주창하며 보다 구체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면, 장자는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기를 주저했다. 인간 개인의 실존적 한계를 뼈저리게 고민했기 때문이다. 공자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려는 사람이었다면 장자는 안 되는 줄 알기에 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이들을 비롯하여 당대의 여러 인물을 여섯 개의 무리로 구분했다. 각각의 핵심을 담은 이 글은 이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이 글을 똑 떼어 <육가요지六家要指> 혹은 <논육가요지論六家要指>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기열전>의 마지막 <태사공자서>에서 그 전문을 읽을 수 있다. 번잡하니 원문의 세세한 내용을 다루지는 말자. 다만 여섯의 이름과 대략적인 얼개를 알아두도록 하자. 여섯의 이름은 이렇다. 음양가陰陽家, 유가儒家, 묵가墨家, 명가名家, 법가法家, 도덕가道德家.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 각 무리가 추구한 핵심 개념을 이름으로 삼거나(음양, 명, 법, 도덕) 무리 지칭하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음양가는 세계를 음과 양 둘로 나누어 설명한다. 음양을 괘라는 특정한 기호로 만든 <주역>과 같은 책을 떠올릴 수 있다. 명가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중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독특한 논리를 추구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白馬非馬: 흰 말은 말이 아니다.’ 법가는 법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세우고자 했다. 관습이나 전통이 아닌 법을 새로운 사회의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도덕가는 도道와 덕德을 추구하는 이들이었는데, 이 둘 가운데 더 중요한 것은 도였다. 따라서 더 간략하게 도가道家라 부르기도 한다. 묵가는 묵적墨跡이라는 인물을 추종하던 무리로 전쟁에 반대하고(비공非攻), 사람들을 두루 사랑하라(겸애兼愛)는 주장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유가는 공자를 숭상하는 이들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이들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니 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았다.
허나 춘추전국시대의 학문을 어찌 여섯으로만 나눌 수 있을까. 실제로 이밖에도 좀 다른 이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손자와 오기처럼 병법의 달인도 있고, 소진과 장의처럼 여러 나라를 오기며 외교에 능통한 사람도 있었다. 음양을 주창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오행을 주창하는 사람도 있었다. 묵적처럼 평화주의자도 있었는가 하면, 모두가 똑같이 땀 흘려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시끄러운 세상일에 귀 닫되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인 이도 있었고, 그냥 이도저도 아닌 사람도 있었다. 이를 각각 병법가兵法家, 종횡가縱橫家, 오행가五行家, 농가農家, 소설가小說家, 잡가雜家 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여기에 몇을 더 할 수도 있고, 또 몇을 더할 수도 있고… 이렇게 되면 몇이냐 하는 숫자는 무의미해지고 그냥 많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래서 백가百家라는 말이 나왔다. 저마다 제 주장을 하며 시끄러우니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제자백가諸子百家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여기서 제자諸子란, 각 무리를 이끈 여러(諸) 빼어난 인물(子)을 아울러 가리키는 말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널리 이름을 떨친 이를 존숭하는 의미에서 그의 성씨 뒤에 ‘자子’를 붙였다. 그래서 공구孔丘는 공자孔子가 되었고, 장주莊周는 장자莊子, 맹가孟軻는 맹자孟子가 되었다. 당연히 이들이 외에도 더 많은 ‘~子’가 있다. 이들 가운데 공자와 맹자가 독특한데 오래도록 성인으로 숭상받았던 까닭이다. 공자의 이름을 오늘날 중국어로 읽으면 콩쯔(Kǒngzǐ), 공자를 높여 공부자孔夫子, 콩푸즈(Kǒngfūzǐ)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 콩푸즈가 변하여 공자의 영어 이름은 Confucius가 되었다. 공자를 서양에 처음 전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라틴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서양인에게 친숙한 -cius라는 접미어를 선물 받은 결과이다. 맹자, 멍쯔(Mèngzǐ)가 Mencius가 된 것도 마찬가지. 같은 맥락에서 장자를 Zhuangcius라고도 하는데 흔한 표기는 아니다. 보통은 Zhuangzi.
이렇게 차이가 있는 것은 백가쟁명의 다툼 가운데 결국 유가儒家가 승자이기 때문이다. 한나라 이후 유가는 관학, 즉 국가철학이 되었다. 나아가 시대가 흐르면서 다른 철학의 특징을 수용하면서 계속 발전한다. 이 발전과 변화에 따라 공자의 위상도 함께 높아였다. 생전 공자는 한낱 몽상가에 불과했다. 유가의 스승에 불과했지만, 유가가 국가철학이 되면서 국가의 스승, 나아가 천하만민의 스승이 되었다. 이후 그는 왕으로 존숭받았고, 나아가 성인, 결국에는 신으로까지 높아진다. 이렇게 보면 제자백가라 부르는 여러 철학자들의 다양한 실험이 결국에는 유가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합류한다고 할 수도 있다.
제자백가란 결국 각기 다른 근원을 갖는 지류에 불과하다는 말인데, 이런 식의 접근이 과연 얼마나 생산적인지는 모르겠다. 예를 들어 사마담이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을 여섯 무리로 구분하고 후대에는 이를 열 개가 넘는 분류로 다시 나누었지만 과연 그 시대, 그 사람이 자신의 철학을 그렇게 구분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족보가 자신의 뿌리를 설명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허나 이는 부계의 계보만을 편향적으로 기록한 것이며 나아가 핏줄, 그것도 성씨의 계보가 한 사람의 본질을 설명한다고 생각하는 매우 편협하고 고리타분한 생각의 영향에 불과하다. 설사 족보를 모르더라고 한 사람을 설명하는데 장애가 되는 일은 없다. 성씨를 운운하고 가계의 전통을 이야기하는 것이 도리어 이해를 방해하지 않는가.
정반대로 족보는 자신의 빈약한 근거를 감추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모 영화에서 보여주듯, ‘내 누군지 아나?’ 했을 때 여기에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가계와 전통이 으레 따라붙는다. 맹자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공자를 철저히 계승한다고 여겼다. 성인, 그러니까 공자가 다시 살아나시더라도 자신의 말을 바꾸지 않을 거라며 자신의 말에 권위를 더하였다. ‘내 누구의 제자인지 아나?’ 후대 사람은 더 길고 상세한 계보를 만들었다. 완성된 유가의 철학 계보는 이렇게 시작한다. ‘요-순-우-탕-문왕-무왕-주공-공자-맹자’ 여기에 더 많은 인물의 이름을 써넣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줄이자. 유가는 이렇게 자신들이 전설적인 성인의 계보를 이은 동시에, 천명을 받은 고대왕국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이는 거꾸로 다양한 철학의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가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앞서 펑유란은 공자를 소크라테스에 견주며 최초의 중국 철학자의 자리에 놓았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 맹자의 전략은 꽤 지혜로운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주장을 든든한 뿌리에 접목시켰으니 말이다. 한편 일부 기록을 근거로 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른바 공자문례노담孔子問禮老聃, 공자가 노자에게 ‘예’에 대해 물었다는 전승이 있는 까닭이다. 공자의 스승으로 노자를 놓는 것. 공자의 제자 자공에게도 이와 비슷한 문제를 질문한 사람이 있었다. 대체 공자는 누구에게 배웠는가?
자공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고대 사회의 문물을 자신의 철학 재료로 삼았을 뿐이라고. 누구에게 따로 배우고 그런 사승師承 관계가 있는 건 아니라고. 어찌 비단 공자만 그럴까. 제자백가라 불리는 수많은 이들이 이와 비슷할 것이다. 물론 누구는 누구를 계승했네, 누구는 누구의 제자입네 하는 식의 서술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모두 춘추전국의 난세를 살면서 각기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사유를 전개했을 뿐이다. 난세를 해쳐나갈 방법은 무엇인가? 난세를 해결할 수 없다면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 누구는 정치를 골몰했고, 누구는 사회의 변화를 모색했고, 누구는 삶의 현장에 주목했다. 저마다 다르나 모두가 지혜로운 삶의 길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같다.
다만 춘추전국이라는 난세가 치열한 고민을 선물해주었고, 이를 자양분 삼아 창조적인 철학자들이 여럿 등장했다는 점이 이 시대의 특징이라는 점을 짚어두자. 어째서 난세에 철학이 꽃피는 것일까. 아니, 근본적으로 배부른 돼지는 철학자가 되지 못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