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2-2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위앙이 말했다.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며, 나라를 변혁하는 데 옛 전통을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탕왕과 무왕은 옛 전통을 따르지 않고 임금이 되었고, 하나라와 은나라는 낡은 규범을 바꾸지 않아 망하였습니다. 옛 것을 반대한다고 잘못된 것도 아니며. 낡은 규범을 따른다고 칭찬할 것도 아닙니다.”
衛鞅曰:「治世不一道,便國不法古。故湯武不循古而王,夏殷不易禮而亡。反古者不可非,而循禮者不足多。」
중국 고대 역사를 읽다 보면 모호한 구석이 있다. 주나라와 제후국의 관계가 그렇다. 주나라가 천명을 받았고, 주나라에 의해 한 지역의 군주로 승인받아 제후가 되었다. 앞서 설명했듯, 이 봉건封建이라는 제도는 넓은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었다. 대신 제후국과 종주국宗主國간의 긴밀한 유대 관계가 중요했다. 상하선후 관계가 분명해야 한다. 주나라는 천하의 종주宗主로 독특한 권위를 가졌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구정九鼎이었다. 주나라에는 아홉 개의 솥을 가지고 있었단다. 왜 아홉이었을까? 고대인들은 천하구주天下九州, 즉 천하가 아홉으로 나뉜다 생각했던 까닭이다.
정말 구정이 있었을까? 워낙 오래되어 고증할 길이 없다. 그러나 박물관에서 주나라 시대의 청동기 유물을 보면 이 솥이 꽤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솥에는 짐승의 얼굴 모양을 새겨놓았는데 지금 보아도 신비롭다. 아마 고대인들은 이를 경외심을 느꼈으리라.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주나라의 천명은 그렇게 커다란 솥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니 아홉이니 몇이니 하는 게 뭐 중요할까.
헌데, 시대가 지나면서 주나라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져 버렸다. 예를 들어 초나라 장왕이 그렇다. 그는 춘추전국시대의 패자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다. 여느 패자와 같이 그 역시 강대한 군사력으로 천하를 호령했다. 그의 군대는 낙읍洛邑, 그러니까 주나라의 수도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성 밖에서 군대를 늘여놓고 위세를 뽐냈다. 주나라 왕은 신하를 보내 초왕을 맞이했다고 한다. 초나라 왕이 구정의 크기와 모양에 대해 묻자, 신하는 이렇게 답한다. “在德不在鼎 : 덕이 중요하지 솥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나라가 받은 천명을 상징하는 구정에 대한 질문에 속내를 간파하고 있었다. 구정을 주조한다면 초나라도 천명을 받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덕德이 중요하다는 말은 설사 초나라가 구정을 주조하더라도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없으리라는 이야기였다. 초왕은 덕에 대한 일장연설을 듣고 초나라로 돌아갔단다. 장왕이 들은 연설의 마지막 대목. “周德雖衰,天命未改。鼎之輕重,未可問也。: 주나라의 덕이 비록 쇠하였지만 천명이 아직 바뀌지 않았습니다. 솥의 크기를 물을 게 아니지요.”
‘아직’이라는 말을 뒤집으면 ‘언젠가는’이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또 누가 아는가? ‘곧’이라는 말로 바뀔지. 언젠가는 그런 이야기가 모두 ‘이미’ 낡은 게 되어 버릴 텐다. 춘추전국시기는 아직과 이미 사이의 모호한 시대였다. 과연 주나라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제후국들은 어느 정도로 독립적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이제는 주나라는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주나라의 위상이 형편없었다는 것만 짚어두자. 주나라는 아무런 힘 없이 낡은 천명만을 붙잡고 있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어떻게 나누는가에 대해서는 저마다 주장이 다르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콕 집어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진晉나라의 분할을 예로 들려한다. 전국시대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는 까닭이다.
진晉나라는 무왕의 아들이자, 성왕의 동생이었던 우虞에게 봉해준 나라였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 성왕이 동생 우와 놀다가 장난으로 한 말이 발단이 되었단다. 오동나무 잎으로 규珪를 만들어 임금 놀이를 했는데, 천자는 헛되이 말하는 게 있어서는 안 된다 하여 정말로 동생을 제후로 봉하였다나. 훗날 진나라의 문공은 제환공, 초장왕을 잇는 패자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진나라의 세 가문 한씨韓氏, 조씨趙氏, 위씨魏氏가 권력을 잡고 나라는 셋으로 갈라진다.
문제는 주나라의 왕이 이 셋을 제후로 봉해주었다는 점이다. 주나라 창업 초기에 제후로 봉해지지 않았더라도 힘과 세력을 갖추면 제후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제후도 주나라 왕을 대신하여 천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이제 천하는 천자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형국이 되었다. 전국시기에는 총 일곱 나라가 천하 대권의 후보로 간추려졌다. 진나라에서 갈라져 나온 한나라, 조나라, 위나라 그리고 동쪽의 제나라, 남쪽의 초나라, 북쪽의 연나라가 있다. 마지막으로 훗날 나머지 육국을 통일하는 진秦나라가 있다. 이 일곱 나라를 전국칠웅이라 한다.
이 일곱 나라는 천하 대권을 두고 서로 치열하게 다투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꺾고 자신의 나라가 천하의 지배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게 고민이었다. 이를 위해 제후들은 천하의 인재를 불러 모았다. 수많은 인물들이 저마다 각자의 주장을 가지고 천하를 떠돌아다녔다. 그들 가운데는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이웃나라로 떠나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상앙(商鞅, BCE395?~BCE338)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법가의 초기 인물로 춘추전국시대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본디 위나라 사람이었다. 그래서 위앙魏鞅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훗날 상앙商鞅, 혹은 상군商君이라 불리는 데, 이는 그가 큰 공을 세워 ‘상商’ 지역을 봉지封地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공적 가운데는 자신이 태어난 위나라를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도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위나라의 재상 공숙좌는 일찍이 상앙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큰 병에 걸려 공숙좌가 세상을 떠나려는데, 위혜왕이 묻는다. 그대의 후임을 누구로 해야겠는가? 공숙좌는 상앙을 추천한다. 그러면서 한마디 말을 덧붙인다. 그를 등용하지 않으면 죽이라고. 위혜왕은 문병을 마치고 나와 사람들에게 껄껄 웃으며 말했단다. 공숙좌의 병이 깊어 보잘것없는 애송이에게 나라를 맡기라고 헛소리까지 한다고.
이를 모르는 공숙좌는 상앙을 불러 이야기한다. 임금에게 그대를 등용하지 않으면 죽이라 말했다고. 이때 상앙의 말이 걸작이다. 임금이 공의 말을 들어 나를 등용하지 않았는데, 어찌 공의 말을 들어 나를 죽이겠느냐고. 결국 공숙좌는 죽고, 위나라에서 기회를 얻지 못한 상앙은 이웃 진나라로 간다. 그리고 먼 훗날 공숙좌의 예언은 현실이 된다. 상앙의 공격으로 국운이 쇠하여 위혜왕은 양혜왕이라 불리고, 그가 맹자를 초빙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다루었다.
상앙은 ‘법法’을 통해 진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잡고 천하 통일의 발판을 마련한다. 일찍이 공자는 법을 매우 싫어하였는데. 징벌적 효과만 있을 뿐 개인의 내면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공자가 보기에 형벌은 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 없었다. 공자는 전통적인 문화 규범 ‘예禮’를 통해 당대의 혼란을 바로잡고자 했다. 공자가 법을 싫어한 더 근본적인 이유는 법이 예를 파괴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법은 예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했다. 법과 예를 둘러싼 논쟁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반복된다.
법이 명문화된 조목을 기준으로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예는 문화 전통의 영향을 빌어 개인의 일탈을 미리 방지한다. 더 큰 차이는 법이 개개인에게 똑같은 의무를 지우는 반면, 예는 상하 위계에 따라 차등을 둔 다는 점에 있다. 일반 백성에게 예를 묻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자무식에게 예를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거꾸로 상앙은 귀족 계층에게까지 법의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고 말한다. 권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의무를 지녔던 당시 귀족 계층이 상앙의 개혁에 크게 반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까닭에 자신을 지지하던 진효공이 세상을 떠나자 상앙은 진나라 귀족 세력에 의해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다.
비록 참혹한 최후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상앙이 불을 지핀 변화의 바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상앙은 법에 따라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우해야 한다 보았다. 공과功過에 따라 상벌賞罰을 내리는 것, 이것이 법의 핵심이었다. 전쟁에 나가 군공(功)을 세우면 누구나 신분상승(賞)을 이룰 수 있었다. 설사 귀족 출신이라 하더라도 잘못(寡)을 저지르면 형벌(罰)을 받았다. 한 번은 태자가 죄를 지은 일이 있었다. 앞으로 군주가 될 사람을 벌할 수는 없으므로, 타자를 보위하는 태사太師를 벌하였다. 처음에는 얼굴에 죄형을 새기는 경형黥刑을 그다음 또 죄를 짓자 코를 베는 의형劓刑을 내렸다. <사기>는 태사였던 공자건이 의형을 받았다는 내용에 이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居五年,秦人富彊,天子致胙於孝公,諸侯畢賀。 : 오 년이 지나자 진나라는 부유하고 강해졌다. 주나라의 천자가 진나라 효공에게 선물을 보내고 제후들이 이를 축하해 주었다.”
비록 우리는 상앙의 최후를 알지만, 적어도 상앙의 개혁은 당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상앙은 옛 것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기준에 따라 건립되어야 하는 법. ‘법法’은 새로운 시대의 기준을 찾고자 한 노력의 결과였다. ‘예禮’는 낡고 고리타분한 규범에 불과했다. 상앙의 정신 덕분에 진나라의 군대는 다른 나라의 군대를 압도했다. 진나라 백성에게 전쟁터란 새로운 가능성의 현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쟁터에서 공적을 세워 신분을 높이는 것이 진나라 병사들의 목적이었다. 이렇게 상앙은 진나라 전체를 마치 군사 국가처럼 바꾸어 놓았고, 진나라의 군대는 나머지 여섯 나라를 압도할 정도가 되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합종연횡의 계책이다. 각각 소진과 장의에 의해 제시되었다고 하는 이 계책은 진나라의 부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합종은 진나라의 공세를 막기 위해 나머지 여섯 나라가 동맹을 맺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연횡은 진나라가 다른 나라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어 여섯 나라의 동맹을 깨는 것을 가리킨다. 소진은 합종책으로 진나라의 공세를 막았고, 장의는 연횡책으로 여섯 나라의 공조를 무너뜨리고 동쪽으로 전진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이것이 <사기>의 기록이지만 오늘날 역사가들은 합종연횡의 계책이 얼마나 유효했는가 의문을 던지곤 한다. 합종연횡이 역사적 사실이건 아니건, 동쪽으로 진출하는 진나라의 군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미 천하의 향방은 크게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잠시 동쪽 끝의 제나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자. 동쪽의 전통적인 강국 제나라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제나라도 천하의 판도를 바꾸기 위해 나름의 자구책을 찾고 있었다. 제나라의 수도 임치에는 직하학궁稷下學宮이라는 일종의 학술연구소가 세워졌다. 여기에 수많은 인물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저마다 제각기 자신의 철학을 주장하는 동시에 다른 이들의 철학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렇게 여러 철학이 서로 교차하며 다양한 실험을 벌였다. 직하학궁을 거쳐간 인물 가운데 순자(荀子, BCE298?~BCE238?)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 직하학궁의 연구소장 격인 좨주를 세 차례나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