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사 다시 읽기 1강
너희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알아?!
요즘에도 이런 말을 듣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말을 잘 곱씹어 보면 의문이 남는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대체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최근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누구는 1919년을, 누구는 1948년을 꼽는다. 1919년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3.1 운동의 독립선언을 대한민국의 출발로 삼는다. 1948년을 주장하는 사람은 1948년에 이르러서야 헌법이 선포되고, 정부가 꼴을 갖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럼 조선은 언제 망했을까? 고종의 ‘대한제국’도 조선의 연장이라면 1910년을 그 끝으로 본다. 그리고 1910년에서 1945년까지를 흔히 ‘일제강점기’라 부른다. 1910년 이전부터 일본은 이미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사건은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었다. ‘합병’, 쉽게 말하면 합친다는 말이다. 물론 이때 합친다는 것은 둘을 동등한 지위에서 더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본의 식민지로 그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씀.
혹시 눈치챘는지 모르겠다. 조선의 망국 - 1910년에서 새로운 나라의 건국 - 1919년까지의 공백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 시간은 무슨 시간이었을까? 한편 1919년에서 1948년까지는 어떤 시간이었을까? 누군가에게는 이미 나라가 있고, 누군가에게는 아직 나라가 없던 시간? 따져보면 나라를 '잃었다'는 말이 맞을까? 나라를 시작하기 전(1919) 이미 일본이 합병(1910)해버렸는데? 엄밀히 말하면 빼앗겼다기보다는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는 말이 맞지 않을지. 낡은 나라를 없애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하는데 그런 과정을 겪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국가’라는 틀에서 벗어나 역사를 읽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사’, 즉 나라의 역사를 배우곤 한다. 그러나 나라가 없어도 역사는 있고 사람은 살아간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 거기에 나라가 꼭 필요한 건 아니다. 따라서 독립운동이니 하는 식으로 영화 <동주>를 이야기하지 않으련다.
영화의 두 주인공, 윤동주와 송명규는 흔히 북간도라 칭하는 만주 땅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중국 길림성 룽징(용정龍井)시이다. 개인적으로 먼 옛날 윤동주가 나왔다는 용정중학교를 찾은 적이 있었다. 용우물이라는 지역 이름처럼 근처에 우물이 있었고 기념관에는 윤동주와 문익환 등의 사진이 걸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참고로 문익환은 영화 초반부에 잠깐 등장한다. 윤동주 송명규와 함께 헛간에서 등사판을 밀면서 잡지를 만들던 그 친구이다. 턱에 잉크를 묻혔다고 놀림받던 그 친구. 훗날 문익환은 한국 현대사의 민주주의 운동에 커다란 획을 긋는 인물이다. 그의 아들이 문성근인데 흥미롭게도 영화에 출연했다. 윤동주의 우상이었던 정지용 시인으로.
영화는 내내 윤동주와 송명규 두 청년의 삶을 추적하며 진행한다. 먼 만주 땅에서 태어나 지금의 서울 연세대학교 연희전문대에 진학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옥에서 죽기까지. 둘은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죽었다. 사촌 간이었던 둘은 짧은 평생을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올라가는 그들의 생애를 보면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둘의 삶은 크게 엇갈린다. 간단히 요약하면 그 엄혹한 시대에 송명규는 독립운동 그것도 무장 투쟁에 힘을 쏟았고, 윤동주는 시인으로서 문학의 길을 걸었다. 이 둘의 삶이 교차되면서 하나의 질문이 오롯이 남는다.
과연 문학은,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을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내 글은 금방 잊힐 것’이라는 송몽규의 말처럼 세상은 윤동주의 시를 지금까지도 기리고 있다. 비록 싸구려 감성주의자라며 손가락질받았으나 윤동주의 시는 여전히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영화는 두 청년의 꿈을 보여준다. 동주의 꿈은 하늘과 바람과 별 그리고 시詩와 함께 하는 것이었으며 몽규의 꿈은 나라가 나라를 민족이 민족을 짓밟는 시대를 없애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둘의 꿈은 일본 형사에 의해 철저희 부정당한다. 둘을 심문하는 형사는 아시아의 해방을 주장한다. 서양 열강의 침입에 맞서 단결된 아시아의 해방을 맞자! 이 견고한 ‘전체’에 대항하는 둘, 동주와 몽규는 형사가 보기에 암적인 존재이다. 동주와 같은 싸구려 감성주의자는 단결된 정신을 해치며, 몽규와 같이 조선인들의 봉기를 꿈꾸는 자는 내부의 분열을 가져온다.
가장 압권인 장면은 조서에 서명을 날인하는 장면이다. 몽규는 '사실로 만들어 주겠다’며 조서에 이름을 쓴다. 그들의 말대로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한이라며. 동주는 묻는다. 당신들이 애쓰는 이 문명국으로서의 태도는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게 아니냐고. 그러면서 그는 부끄러워서, 부끄러워 서명을 거부한다.
여기서 영화가 던지는 또 다른 질문은 열등감과 부끄러움에 대한 것이다. 한쪽은 열등감을 숨기기 위해 폭력을 자행한다. 서구에 대한 열등감을 없애기 위해 저들은 또 다른 민족을 핍박한다. 동주와 몽규가 일본에 유학하던 시절 일본은 전쟁에 열을 올렸다. 그 참혹한 선택, 전쟁이야 말로 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저들이 선택한 최후의 수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주는 부끄러움을 잊지 않으며 부끄러움으로 시를 쓴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움이라는 정지용의 말을 기억하자. 어찌 보면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으로 남아 있도록 하는 게 아닐까. 그 부끄러움의 힘 때문에 영화 초 당당하던 형사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주춤거리며 물러날 뿐이다. 영화 막판 그는 결코 두려운 존재로 그려지지 않는다. 부끄러움이라는 보편적 정서, 누구나 부끄러우며 앞으로도 부끄러울 것이므로 윤동주의 시가 그토록 사랑받는 건 아닐까.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주목하고 싶은 건 다카마쓰 교수와 후카다 쿠미의 등장이다. 이 둘은 일본인이지만 동주의 시를 읽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적극적인 저항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동주나 몽규처럼 실질적인 피해를 입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는 일본인 가운데도 동주, 몽규와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영화는 처음에 윤동주의 삶을 배경으로 한 ‘창작 작품’ 임을 밝혔다. 실제로 윤동주는 일본으로 넘어가기 전 시집을 출간하려 하였으나 접어두었다. 단지 몇 권을 만들었고 그 가운데 하나를 친구 정병욱에게 남겼는데 그 시집의 이름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다. 따라서 윤동주가 카페에서 냅킨에 시집의 제목을 적어주는 장면은 창작이다. 물론 그 대상 일본인 쿠미도 창작된 인물이다. 그러나 다카마쓰는 실존 인물이다.
영화과 훌륭한 이유는 조선과 일본이라는 흔한 구도 위에서 동주와 몽규의 삶을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문학(동주)은 혁명(동규)과 갈등하면서도 친구가 되나 군사주의나 전체주의(형사)와 같은 경직된 사상과는 결코 어울릴 수 없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일제라고 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일본이 아니라 ‘제국주의’이다. 영화는 ‘일’제를 이야기하지 않고 일’제’를 이야기한다.
흥미롭게도 감독 이준익의 다른 영화가 개봉했다. 제목은 <박열>! 이 영화 역시 실존 인물을 담았다. 재일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의 삶을 담았다. 박열은 일본 천황을 암살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데 그 곁에는 그의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가 있었다. 감독 이준익은 이 작품에서 조선과 일본의 화합을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실제로 또 다른 주인공 ‘가네코 후미코’는 동주에서 ‘후카다 쿠미’ 역을 맡은 배우가 연기했다. 이 영화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천황 및 일본 군국주의와 싸운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오자. 100년 전 이 땅을 살았던 사람들은 왜 불행했을까? 그것은 나라를 잃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제국주의자들의 압제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저 일본 땅에도 불행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조선 땅에도 불행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매국노, 나라와 민족을 팔아넘긴 사람들이라 부르기보다는 제국주의자라 부르자.
오늘도 과거는 현재와 이어져 있다. 위안부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 문제를 ‘조선, 혹은 대한민국 대 일본’이라는 뻔한 도식 위에서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리어 이는 사람과 사람이 아닌 이들 간의 싸움이다. 영화 <동주>의 언어로 옮기면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의 싸움이다. 슬픔 혹은 아픔을 아는 사람과 슬픔도 아픔도 모르는 사람의 싸움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슬픔과 아픔을 느끼는 사람이 사과를 할 수 있다. 일본의 사과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잊지 말자.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슬픔과 아픔을 함께 하는 사람, 시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꿈을 노래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