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사 다시 읽기 2강
박완서(1931~2011). 생몰연대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사회의 변화가 뚜렷한, 개별 사건이 개인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는 우리 사회는 더더욱.
얼마 전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8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2000년 대 사회를 경험한 주인공 김지영의 삶은 동시대를 산 적지 않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그래서일까? 요즘 이 소설이 크게 인기다. 마찬가지로 박완서의 소설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그가 1931년에 태어났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비록 우리와 동시대를 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는 1931년에 태어나 30년대 말 서울로 이주한다.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형식은 소설이라 하나 그 내용은 철저히 개인적 체험에 근거한다. 다만 그의 다른 소설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일부에서 소설적 변화가 가미된 부분이 있다는 점을 알아챌 수 있다. 다른 소설에서 동일한 사건을 다르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기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 소설과 짝을 이루는 소설을 이야기하자. 하나는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이 소설은 <그 많던 싱아는…>에 바로 이어지는 내용을 담았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안방에선 올케가 오빠 다리의 총구멍에 심을 갈아끼우고 있었다. 종아리는 바싹 말랐는데 총구멍은 생생하고도 깊었다. …(중략) … 밖에서 뭘 보았느냐고 오빠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무도 못 보았다고 대답했다.
“우리 식구만 남았어. 인기척이라곤 없어. 서울을 싹 비워줬는데도 인민군이 들어온 것 같지는 않아요.”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전쟁통에 피난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은 작가의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이 소설을 읽어보도록 하자. 이 소설은 1953년 4월, 그가 결혼해서 집을 떠나기까지의 내용을 담았다. 참고로 남북이 치열하게 싸운 그 전쟁은 그해,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으로 일단락되었다. <그 많던 싱아…>가 작가의 유년시절에서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 해 겨울 다시 피난을 떠나야 할 때까지를 다루었다면 <그 산이…>는 그 겨울 서울에서 1953년 봄까지를 다룬다. 둘 모두 전쟁의 경험이 없었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는 소설이다.
전쟁은 작가에게 소설을 쓰도록 했으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작가의 또 다른 소설 <엄마의 말뚝>을 읽어보면 전쟁이 작가에게 남긴 커다란 상흔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은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오빠의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한번 읽어보자.
2002년, 소설을 낸 뒤 10년 만에 다시 쓴 작가의 글, <다시 책 머리에>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을 처음 내면서 쓴 서문을 다시 읽어 보니 말미에 “나는 지금 지쳐 있고 위안이 필요하다.”고 쓰고 있다. 진이 다 빠지고 빈 꺼풀만 남은 것 처럼 허탈해지는 건 소설을 끝내고 나서 어김없이 돌아오는 대가여서 으레 그러려니 해 왔건만, 이 소설에서 그걸 특별히 강조한 건 아마 순전히 기억에 의지한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을 환기시키기란 덮어 둔 상처를 이르집는 것과 같아서 힘들고 자신이 역겹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 일에서 놓여 나면서 위안을 구했었는데, 다행히 지난 10년이란 오랜 동안 꾸준히 독자와 만나는 행운을 누렸으니 그만하면 충분히 위안을 받은 셈이다.
<다시 책머리에>, *웅진판
이 소설 <그 많던 싱아…>가 1992년 세상에 나왔으니, 작가는 60대의 나이에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며 소설을 쓴 것이다. 소설을 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야성의 시기’를 살았던 작가의 아름다운 유년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건너왔을 때의 충격이며, 이후 고단한 삶이 그를 힘겹게 만든다. 오빠가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여 살림이 펴는가 싶었는데 2차 세계대전, 일본제국주의의 패망, 좌우 이념의 대립,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간을 겪으며 적지 않은 고통을 겪는다. 이를 ‘기억’하여 소설에 담아내는 데는 적지 않은 수고가 필요했으리라.
소설의 제목에서 우리의 눈을 잡아 끄는 건 대체 ‘싱아’가 무엇일까 하는 거다. 인터넷을 찾아보았다면 이내 실망했으리라. 하얀 꽃이 피는 풀. 예쁜 이름에 비해 평범해보이는 모습이 어째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웅진판에서는 친절하게 이렇게 설명을 붙이고 있다.
싱아: 마디풀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는 1미터 정도로 줄기가 곧으며, 6~8월에 흰 꽃이 핀다.
어린시절 시골에서 자랐지만 싱아라는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한 여름 나와 동무들을 끌어당긴 것은 아카시아 꽃이었다. 꽃잎을 따 먹으면 그 속에 아주 조금 꿀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작가는 서울에서 아카시아 꽃을 처음 본다. 동무를 따라먹어보았는데 ’비릿하고 들척지근’해서 헛구역질 나는 맛이었다 한다. 그때 작가는 고향, 박적골에서 어디서나 볼 수 있던 싱아를 기억한다. ‘새콤달콤’한 ‘입안에 군침이 돌게 신맛’이 난다는 그 풀을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디서 맛본다 해도 작가가 느꼈던 그 맛을 결코 알 수 없으리라.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당최 ‘싱아’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책을 펼친 사람은 있어도 시큼한 그 맛을 떠올리며 책을 펼쳐 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제목에서 던지는 질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물음에 우리는 전혀 동참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소설이 그려내는 박적골의 풍경도 우리에게는 말 그대로 ‘소설 속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설이 보여주는 시대의 풍경은 과거를 새롭게 조명하도록 도와준다.
작가는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엄마를 따라 서울로 온다. 엄마, 오빠와 함께 세 식구가 사는 집은 현저동의 좁은 셋방이었다. 현저동에는 지금도 좁은 골목과 높은 계단이 남아 있어 옛 흔적을 보여준다. 작가는 “여기가 서울이야”라고 물었지만 엄마는 이렇게 답한다. “여기는 서울의 문밖이란다. 느이 오래비가 이담에 취직해서 돈 많이 벌면 우리도 그때 가선 버젓이 문안에서 살아 보자꾸나.” 지금이야 ‘서울’이 끝에서 끝까지 지하철로도 한 시간 넘게 가야 할 정도로 넓지만 당시 서울은 문 안, 사대문 안쪽을 가리켰다. 작가의 가족은 서대문 너머 문밖 산동네에 살았다.
그래도 학교는 문안으로 가야 한다는 어머니의 성화에 작가는 매동국민학교에 입학한다. 지금도 남아 있다. 당연히 이름은 ‘매동초등학교’로 바뀌어서. 사직공원 옆, 작가가 이야기한 그 자리에 지금도 있다. 작가가 학교에서 제일 먼저 배운 일본말은 ‘호안덴奉安殿’, 즉 일본 천황의 칙어를 넣어 두는 곳이었다. 교장은 이해하기도 힘든 일본 천황의 길고 긴 칙어를 다 읽고, 게다가 긴 일장 연설까지 늘어놓았다. 여기저기서 쓰러지는 아이가 생길 정도로.
그러니까 1940년대에 주로 학교를 다닌 작가는 우리말이 사라진, 일본말로 모든 공부를 하는 일본식 교육을 받은 셈이다. 그래서 작가의 엄마는 학교 선생과 이야기하기 위해 통역이 필요했다. 이런 시대의 모습은 곳곳에서 보이는데, 그중에는 친구 복순이와 함께 졸업 기념으로 신사참배를 간 일이 있다. 둘은 한 겨울 신궁에 올라가 둘 만의 추억을 만들었다.
조선 신궁 올라가는 그 높고 높은 계단에 사람의 그림자라곤 거의 없었다. 우리는 질척하게 쌓인 눈 속에 운동화가 푹푹 빠져 양말을 적시고 발끝이 얼어붙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그 높은 층층다리를, 누구한테 심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씩씩대며 돌파를 했다. 신궁 앞까지의 자갈이 깔린 길도 아무도 밟지 않은 눈으로 평평해보였다. 우리는 신궁 쪽은 흘끗 한 번 쳐다만 보고 경성신사 가는 쪽의 완만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계절이 좋을 때 그 길은 연인들의 산책로로 유명했다. 우리 사이에 요샛말로 무드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 거기를 생각해 낸 것도 아마 그런 까닭이었을 것이다.
둘이 올랐던 높고 높은 계단 위 조선 신궁은 대체 어디였을까? 지금이야 완벽하게 흔적이 사라졌지만 남산자락에 조선 신궁이 있었다. 둘이 올랐을 높은 계단의 사진만이 남아 있다. 그 자리는 지금 안중근 기념관 자리가 되었다. 참고로 경성신사 자리는 숭의여대가 있다. 작가가 말한 ‘연인들의 산책로’는 지금도 많은 사람이 찾는 길이다.
작가는 국민학교 1학년 총독부 뒷마당으로 ‘원족遠足’, 그러니까 소풍을 떠났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경험한 넓은 뜰이란 경복궁 뜰을 가리킨다. 조선총독부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완벽히 철거되었다.
하나 더 덧붙이면 그가 동무와 함께 미끄럼을 타고 놀았던 곳, 말에 쇠사슬을 찬 ‘전중이’를 보았던 그곳은 서대문형무소였다. 눈치챘겠지만 전중이는 이 형무소에 갇혀있는 죄수를 가리킨다. 이처럼 작가의 유년 시절 곳곳에 시대의 흔적이 담겨 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40년대에 이르러 일본은 전쟁을 위해 자국민은 물론 식민지 국민들을 쥐어짜기 시작한다. 그 때문에 작가 역시 여고 생활이 시작하자마자 군수산업에 동원된다. ‘오전 두 시간 수업을 받고 나면 교실이 곧 공장으로 변했다.’ 군복에 단추도 달고 운모도 얇게 잘라냈다. 전쟁은 이제 먼 이웃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언제 서울 하늘에 폭격기가 날아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때문에 방공연습도 자주 했다. 작가는 진짜 공습경보가 나 집까지 뛰어가는 동안 느꼈던 ‘죽을 듯한 공포감’을 기억한다. 학생들은 모두 ‘구급낭’을 가지고 학교에 가야했다.
이제 조선인도 강제 징용당한다. 다행히 오빠는 군수 공장에서 일하는 터라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았지만 징용의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해 배급 통장 없이는 밥 한 끼도 먹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박적골에 가서 쌀을 얻어 숨겨와서 자식들을 먹이는 용기를 보인다.
1944년, 전쟁 막바지의 기억은 참혹한 시대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패망 직전 식민지의 모습은 이토록 흉흉했다.
1944년 겨울 방학에 귀향했을 때는 박적골 사정도 매우 흉흉했다. 순사와 면서기가 합동을 해서 식량을 뒤지러 나오는데 그때는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우선 그들이 들고 다니는 기구가 무기보다 더 섬뜩했다. 긴 장대 끝에 창같이 생긴 날카로운 쇠붙이를 꽂고 다니면서 그걸로 천장, 아궁이, 볏짚단, 갈잎 가리 등을 마구 찔러 보았다. 우리 마을은 아니었지만 이웃 마을에서 갈잎 가리 속에 숨었던 소녀가 그 창끝에 옆구리를 찔렸다는 소문은 너무도 끔찍해 백주의 악몽이었다.
말세의 징후 끝에, 1945년 비로소 광복을 맞지만 작가는 흔한 광복의 기쁨을 서술하지 않는다. 도리어 광복은 작가에게 느닷없는 충격을 가져온다. 한 떼의 청년이 들이닥친 것이다. 친일파 집을 떼려부순다며 그들은 문패를 패대기쳤다. 악을 쓰며 대드는 작가를 오빠는 나름 다독인다. 그동안 저들이 수난과 치욕을 당할 때 나름 편안히 특혜를 누려왔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작가의 숙부는 일제치하 면사무소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다.
해방은 되었으나 곧 삼팔선이 그어졌다. 위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을 나누어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했다. 개경은 처음에는 미군이 들어왔다가 느닷없이 소련군이 주둔했다. 시대는 이렇게 혼란스러웠다. 삼팔선이 그어졌다 하지만 처음에는 남과 북의 통행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작가도 어머니와 함께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서울로 돌아왔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일본어를 가르치던 선생이 우리말 선생이 되었다. 하루아침에 말을 바꾸어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본인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들이 안 보이는 건 당연했지만, 일본어를 가르치던 국어 선생님이 그냥 우리말의 국어 선생님으로 눌러앉아 있는 건 잘 이해가 안됐다. 우리가 입학할 때 학제로는 중학교에 해당하는 기간을 고등학교라고 불렀는데 고등학교 이학년짜리가 가갸거겨부터 배우느라 법석이었다. 선생님들한테 야단을 맞아 가면서도 어려운 의사소통은 으레 일본말이 튀어나왔고 교과서 외의 읽을 거리는 거의 일본의 소설류 아니면 일본말로 된 번역물이었다.
다행히 작가는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축에 속했다. 우리말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도 그즈음이었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청소년기의 독서는 참 오래도록 영향을 끼치는 게 분명하다. 대략 50년 전 작가가 읽은 책들의 제목이며 간단한 감상까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복을 맞기 직전 오빠는 결혼을 했다. 말세라 서술할 정도로 시대는 흉흉했으나 그래도 그런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사랑하고 꿈을 키웠다. 그런데 해방이 된 이듬해 봄 올케가 죽었다. 어쩌면 올케의 죽음은 해방된 땅에서 맞아야 하는 이 가족의 슬픈 이야기의 예고였을 지도.
오빠는 물론 작가도 해방이후 좌익활동의 경력이 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작가의 오빠는 좌익 활동가들과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으며 이 때문에 작가의 가족은 여러차례 이사를 해야했다. 작가도 좌익 메이데이 행사에 참여하느라 학교를 빠진 적도 있었다. 엄마는 이를 크게 반대했다. 좌익과 우익에 대한 일정한 입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나쁘다는 일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1949년 즈음 오빠는 좌익 조직에서 손을 뗀 것은 물론 ‘보도연맹’에 들었다. 이른바 ‘전향’을 한 셈.
1950년 20살 되는 해 작가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다. 스무살 새로운 꿈을 마구 꾸어볼 나이였으나 불행하게도 그의 스무살은 1950년이었다. 한편 가족은 또 한 번의 이사를 꿈꾼다. 엄마는 분주하게 이사를 준비하면서 서울 생활을 접고 새로운 고향을 찾을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을 꾼 것이 하필이면 1950년 5월이었다.
잘 알고 있는 대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 초 북한군의 진격은 생각보다 빨랐다. 발 빠르게 피난을 내려갔어야 하나 오빠를 기다리느라 작가의 가족은 피난을 떠나지 못한다. 참고로 이때 서울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작가처럼 개인적인 일이 있었던 경우도 있었을 테고, 숙부처럼 대통령의 말을 믿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대통령이 수도 서울은 꼬옥 사수한다고 국민한테 철석 같이 약속을 했으니까.”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서울 시민들을 안심시키는 방송을 남겼으나 이미 도주한 뒤였다. 정부의 고위 관계자도 이승만의 도주를 알지 못했다. 그 결과 삽시간에 서울은 인민군의 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약 석 달 간의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서울은 수복되지만 인민군 치하에 남았다는, 그것도 오빠가 인민군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작가는 적지 않은 고통을 받는다. 도강파渡江派, 즉 강을 넘어 피난을 떠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은 그의 가족을 곱게 보지 않는다. 빨갱이라는 딱지를 떼어내기 위해 작가는 이리저리 끌려 다녀야 했다. 그를 만나는 이들은 모두 그를 짐승이나 벌레처럼 보았다. 1950년… 그해를 작가는 이렇게 기억한다.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러나다고 문득 그들이 나를 벌레로 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그야말로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신이 들곤했다.
그 와중에 숙부는 끌려가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게 처형을 당했다. 언제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전쟁통에 죽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어쩌면 전쟁으로 죽는 사람보다도 이념의 딱지 때문에 좌우에서 처형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수복된 서울에서는 작가의 말처럼 ‘빨갱이의 목숨은 파리 목숨만도 못했고, 빨갱이 가족 또한 벌레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시민증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이 떠밀려 온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다시 피난을 준비했다. 그런데 오빠가 돌아오지 않았다. 의용군으로 끌려갔던 사람이 하나 둘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있는 통에 엄마는 오빠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작가 혼자라도 피난을 보낼 생각이었지만 오빠가 돌아왔다. 이제 문제는 오빠였다. 한강 다리를 건너려면 시민증이 있어야 하는데 오빠는 시민증이 없었다. 오빠는 심사를 거치기 싫어했다.
그 와중에 오빠는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총상을 입은 오빠와 엄마, 그리고 오빠 가족… 결국 이들은 피난길을 떠나지 못하고 서울에 발이 묶여버렸다. 우리 동네, 현저동 그 동네로 돌아갔다. 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은 낯설기만 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황량한 서울의 모습은 작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겨울 텅 빈 서울을 보며 작가는 삶의 새로운 길을 찾는다. 그리고 그 끝에서 독자는 이 소설이 쓰인 이유를 발견한다.
지대가 높아서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혁명가들을 해방 시키고 숙부를 사형시킨 형무소도 곧장 바라다보였다. 천지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마치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살짝 긋는 것처럼 소름이 쫙 끼쳤다.그건 천지에 사람 없음에 대한 공포감이었고 세상에 나서 처음 느껴보는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 독립문까지 환히 보이는 한길에도 골목길에도 집마다 아무도 없었다. 연기가 오르는 집이 어쩌면 한 집도 없단 말인가. 형무소에 인공기라도 꽂혀 있다면 오히려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이 큰 도시에 우리만 남아 있다. 이 거대한 공허를 보는 것도 나 혼자뿐이고 앞으로 닥칠 미지의 사태를 보는 것도 우리뿐이라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다. 차라리 우리도 감쪽같이 소멸할 방법이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휙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 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