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5-3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정자가 말했다. “배우는 자는 마땅히 <논어>와 <맹자>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논어>와 <맹자>를 익히고 나면 육경六經은 익히지 않아도 깨우치게 될 것이다. 경전을 읽는 자는 마땅히 성인께서 어떤 마음으로 경전을 지으셨는지 그 뜻을 살펴야 한다. 또한 성인께서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까닭, 내가 아직 성인에 이르지 못한 까닭,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까닭을 살펴야 한다. 구절마다 찾아가며 낮에는 글을 외고 은미하며, 밤중에는 곱씹어 생각하라. 마음을 평안케 하고 기운을 누그러뜨리며, 모호한 부분을 덜어낸다면 성인의 뜻을 볼 수 있을 것이다.”
程子曰:「學者當以論語孟子為本。論語孟子既治,則六經可不治而明矣。讀書者當觀聖人所以作經之意,與聖人所以用心,聖人之所以至於聖人,而吾之所以未至者,所以未得者。句句而求之,晝誦而味之,中夜而思之,平其心,易其氣,闕其疑,則聖人之意可見矣。」
<독논어맹자법讀論語孟子法>
고대인들은 다섯이라는 숫자를 꽤 중시 여겼던 듯하다. 하늘에는 다섯 개의 별(화, 수, 목, 금, 토)이 있고 마찬가지로 우주 역시 이 다섯 개의 요소(五行)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에게는 다섯 장기(五臟)가 있으며, 다섯 가지 덕목(인의예지신)을 갖추고 있기 마련이다. 우주 역시 사방과 중앙이라는 다섯 방위로 나뉘며, 각각이 대표하는 색깔(五方色)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것뿐인가 오백 년에 한 번 성인이 나타난다는 믿음도 있었다. 전설상의 다섯 제왕(五帝), 춘추시대를 호령했다는 패자들(春秋五覇) 역시 다섯이라는 숫자로 역사를 읽어낸 결과였다.
성인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 역시 마찬가지. 한나라 때 유가를 국가철학으로 받아들이면서 다섯 경전을 꼽아 크게 중시했다. <시詩>, <서書>, <역易>, <예기禮記>, <춘추春秋>가 그것이다. 각 경전의 전문가에게는 박사博士라는 칭호를 붙여 관직을 주었는데 이를 오경박사五經博士라 한다. 전통적으로는 공자가 다섯 권의 경전에 모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공자와 <오경>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입장이 많다. 정말로 공자가 말년에 오경을 정리하거나 창작했을까? 워낙 오래전이라 이를 구체적으로 고증하기는 어렵다. 다만 신뢰하기보다 의심할만한 점이 많다는 점만 짚어두도록 하자.
<시경詩經>은 고대에 불리었던 노래 가사를, <서경書經>은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역사를 담았다, <역경易經>은 점술서로, <주역周易>이라고도 하는데 주나라 때 체계를 갖추었다는 전설을 따른 결과이다. <예기禮記>는 예禮에 관련된 고대 사회의 다양한 문헌을 묶은 책이며, <춘추>는 노나라의 역사책이다. 이렇게 오경을 기본으로 하여, 당나라 때에는 <의례>와 <주례>를 더하고, <춘추>의 세 가지 해석 <좌씨전>, <공양전>, <곡량전>을 더해 구경九經이 된다. 송나라에 이르러서는 <논어>, <맹자>, <효경>, <이아>를 합해 십삼경十三經 체제를 갖춘다.
이렇게 경전의 범주가 확대된 것은 국가 차원에서 경전 편찬을 독려했기 때문이다. 경전을 정리, 인쇄하는 것은 꽤 많은 인력과 재원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를 수행하는 것은 기념비적인 업적이기도 했다. 인쇄기술의 발달로 더 많은 경전을 정리하고 편찬해낼 수 있게 되었지만, 경전의 숫자가 늘자 거꾸로 경전의 핵심을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성인의 가르침, 그 참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정신 아래에서 번쇄한 경전을 줄이자는 움직임이 등장한다.
주희는 오경을 근간으로 한 전통적인 경전 체계 대신 사서四書를 주장했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이 이것이다. 그는 왜 이 네 권을 꼽았을까. 이는 성인의 가르침이 특정한 계보를 따라 전해 내려 온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주희가 이 네 권을 묶어 출가했을 때 처음에는 '사자四子'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 볼 수 있듯 네 권의 책은 네 명의 성인을 대표한다.
<논어>는 공자의 말을 기록한 책으로 오래전부터 숭상되었다. 여기에 공자를 이어 성인의 반열에 오른 아성亞聖 <맹자>를 더했다. 송나라 때에 이르러 맹자의 위상이 높아졌으며 공자를 이은 적통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 사이에는 시대적 간극이 있다. 이 간극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주희는 <대학>과 <중용>이 공자와 맹자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논어>의 내용에 따르면 공자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는 안연이었다. 그러나 안연은 공자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버리고 만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바로 말년의 제자 증삼曾参이었다. <논어>에는 공자와 증삼이 주고받은 비밀스런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증삼아 나의 가르침은 하나로 모든 것을 꿰뚫는다. / 네 알고 있습니다.(子曰:「參乎!吾道一以貫之。」曾子曰:「唯。」)" 공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논어> 기록에 따르면 선문답 같은 이 대화의 현장에는 다른 제자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선생께서 자리를 뜨자 제자들이 증삼에게 몰려와 묻는다. 이때 증삼의 친절한 설명. 선생님의 가르침은 ‘충서忠恕’로 요약할 수 있다. 후대 학자들 가운데는 이 대화가 증삼의 제자들에 의해 짜깁기 되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맥락이 다른 두 장면의 대화를 합치고 증삼을 그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했다는 뜻이다. 실상이 어떻든 주희는 이 장면이 증삼이 공자의 적통을 이은 증거라 보았다. 마치 부처가 은은한 미소로 가섭에게만 가르침을 전했듯, 공자와 증삼 사이에도 그런 비밀스런 전승이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공자의 말을 증삼이 정리했다는 짧은 글, <대학>을 사서에 넣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학>은 본디 <예기>의 한 편에 불과했으나 당나라 말에 이르러 독립된 텍스트로 읽히기 시작한다. 송대의 유학자들은 학문의 체계와 순서에 대해 논하는 책이라 보고 <대학>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 게다가 증삼이 공자를 계승했으니 성인의 가르침을 꿰뚫는 핵심을 <대학>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중용>이 경전의 반열에 오른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공급孔伋)가 쓴 것으로 여겨졌다. 공자에게서 증삼으로 이어진 가르침이, 증삼에게서 자사로 이어졌다. 일찍이 맹자가 자사에게 사숙私淑했다는 전통이 있었다. 실제로 <맹자>에는 증삼과 자사의 이야기가 몇 차례 등장한다. 결국 공자, 증삼, 자사를 이어 맹자까지 이어지는 계보가 완성된다.
이렇게 유가의 정신은 주희에 이르러 새로운 계보를 갖는다. 요-순-우-탕-문-무-주공을 이어 공자에까지 이르렀던 전통적인 계보에 이어 공자-증삼-자사-맹자로 이어지는 새로운 전승이 덧붙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주희는 한, 당 시대의 암흑기를 건너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야 비로소 성인의 가르침을 다시금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주희는 북송시대의 여러 학자를 언급하는데 특히 이정二程이라 불리는 정 씨 형제를 진정한 계승자라고 보았다. 그 가운데서도 동생 정이를 중시 여겼으며 주희 본인은 정이의 충실한 계승자를 자처했다. 즉, 고대 성인으로부터 시작되어 공자를 이어 전승된 가르침이 주희 자신에게서 새롭게 해석되고 정리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도의 계보, 이를 도통론道統論이라 한다.
도통론은 선종의 전등설에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성인의 가르침, ‘도’는 어째서 유독 한 사람에게만 전해지는 걸까? 여럿에게 동일하게 전해질 수는 없는 걸까? 혹은 각각 일부만 전해지거나, 아니면 시대에 따라 그 ‘도’의 내용이 더해지거나 바뀔 수는 없는 걸까? 주희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본인이 공자의 순수한 계승자라는 주장을 통해 주희는 당대의 여러 학자들과의 논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도학자들이 그렇듯 주희 역시 종합하고 체계화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는 사서를 통해 경전을 새롭게 체계화하였으며 그 결과 사서는 각각 서로를 참조하여 해석될 수 있었다. 사서는 말 그대로 네 권의 책이지만 도통道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하나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풀이하고 부연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그는 당대의 여러 개념을 묶어 하나의 거대한 체계를 구축한다. 그가 무기로 삼은 개념 가운데 성性과 리理를 중시하였으므로, 그가 체계화한 학문을 성리학性理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근사록近思錄>은 주희의 이런 노력이 엿보이는 책이다. 이 책의 제목은 <논어>에 실린 공자의 말, ‘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 절실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라’는 말에서 따왔다. 이 책은 주희와 친구 여조겸이 선대 학자들의 글을 정리한 책이다. 주희는 이 책에서 북송시대 네 명의 글을 추려 정리했다. 주돈이(周敦頤 주렴계周濂溪 1017~1073), 장재(張載 장횡거張橫渠 1020~1077) 그리고 정호(程顥 정명도程明道 1032~1085), 정이(程頤 정이천程伊川1033~1107) 형제의 글을 실었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연년생인 데다 두 사람의 제자들이 서로 오가며 활발히 교류하였고, 둘 모두 정자程子라는 존칭으로 불리곤 해서 둘의 주장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까닭에 이정자二程子, 혹은 간단히 이정二程이라고 둘을 묶어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들은 천리天理라는 개념을 새롭게 주창하였다. 장재는 기氣를 통해 사물을 해석했다. 주돈이는 태극과 음양, 오행을 함께 엮어 체계화한 인물이었다. <근사록>은 태극도太極圖라는 그림과 이에 대한 해설 <태극도설太極圖說>로 시작한다. 조선의 유학자 퇴계의 그 유명한 <성학십도聖學十圖>역시 <태극도설>을 첫 번째로 소개하고 있다.
즉, 주희는 북송시대 네 명의 철학자의 독자적인 개념을 종합하여 체계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넷에 소옹(邵雍 소강절邵康節 1011~1077)을 더해 북송오자北宋五子라 한다. 소옹은 숫자를 통해 <주역>의 이론을 정리하려 했던 인물이다. 주희에 이르러 다섯 명이 각기 주장한 개념들이 정합적인 체계를 이룬다. 그러나 주희는 그 내용을 하나의 독립된 저작으로 정리하지는 않았다. 독자적인 저술을 남기기보다는 경전에 주석을 다는 방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랐던 까닭이다.
주희는 사서에 주석을 달면서 북송오자의 개념은 물론, 당대까지 주요한 해석을 종합하여 실었다. 그의 작업을 집주集注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러 주석을 모아 정리했으며,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렇게 <사서집주四書集注>라는 작업물을 통해 주희는 또 한 명의 성인으로 자리매김한다.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에 가면 주희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모시는 동시에 공자의 제자들도 함께 모신 공간이다. 공자가 중앙에 있으며, 그 양쪽으로 네 명의 주요 후계자가 자리 잡는다. 여기에는 <사서>의 저자인 증삼, 자사, 맹자와 공자의 애재자였던 안연이 자리한다. 그 아래로 10명이 다시 자리하는데, 나머지 9명은 모두 <논어> 등에 기록된 공자의 제자이나 나머지 한 자리가 주희의 차지이다. 즉, 공자를 둘러싼 유가의 핵심 성인들 가운데 주희만이 홀로 그 자리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