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 vs 양명 ??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5-4

by 기픈옹달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대인’이란 천하 만물을 한 몸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는 천하를 마치 한 집처럼, 중국을 한 사람처럼 여긴다. 만약 몸뚱이를 기준으로 너와 나를 가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소인이다. 대인이 천지만물을 한 몸으로 여긴다는 것은 일부러 마음먹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본디 마음의 본래 모습이 천지만물과 하나인 것이다. 어찌 대인만 그런 마음을 가졌겠는가 소인이라도 그 마음의 본래 모습은 모두 똑같으나, 그 스스로 작게 만들어 버렸을 뿐이다.
大人者, 以天地萬物爲一體者也. 其視天下猶一家 中國猶一人焉. 若夫間於形骸, 而分爾我者, 小人矣. 大人之能以天地萬物爲一體也, 非意之也, 其心之仁本若是,其與天地萬物而爲一也. 豈惟大人, 雖小人之心, 亦莫不然, 彼顧自小之耳.
<대학문大學問>


오경과 비교할 때 사서는 주희 개인의 역할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오경은 국가가 공인한 경전이었다. 그렇다면 사서는 어떻게 정당성을 얻었을까? 우선은 당대 학자들이 비슷한 문제를 공유하고 있었다. 주희 한 사람이 돌연히 나타나 이 네 권의 책을 콕 집어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사서라는 이름으로 네 권의 책을 함께 묶어 체계화하지 않았을 뿐 이 네 권은 송나라 때에 이미 많은 주목을 받았다.


주희가 큰 영향력을 발휘한 데는, 그가 가진 빼어난 능력 탓도 있겠지만 새로운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도 짚어 두어야겠다. 주희 당대에는 인쇄문화가 크게 발달하여 개인이 서적을 소유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 일일이 필사해야 했다면 이제는 인쇄본으로 경서를 구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주희가 편찬한 주석서는 단연 돋보이는 판본이었다. 여러 주석을 모았다는 점에서 하나의 종합적 시각을 선물해주었다. 또한 주석을 통해 사서를 서로 인용하고 풀이하여 더욱 풍성한 해석을 가능케 했다.


주희는 당대에도 꽤 중요한 인물이었다. 많은 제자가 그를 따랐으며 학술적인 영향은 조정에서도 주목할 정도였다. 그러나 말년 주희는 원치 않는 고초를 겪는다. 정치적인 이해다툼에 휘말려 사상 탄압을 당하기도 한다. 그의 <사서집주>가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원나라 때였다. 원나라 이후 주희의 <사서집주>는 과거를 준비하는 모든 선비가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되었다. 자연스레 과거시험의 내용도 그의 해석에 얼마나 충실한가를 따지게 되었다. 1905년 중국에서 과거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기 이전까지 그는 모든 중국 지식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사서가 오경보다 우선시 되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사서오경四書五經’이라는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방대하고 복잡한 오경을 공들여 읽는 일이 줄어들자 자연스레 오경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서오경보다는 ‘사서삼경’이라는 말이 더 친숙하기까지 하다.


흔히 주희를 보수적인 인물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유가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을 그에게 투영한 결과일 것이다. 확실히 유가 지식인으로서 그의 철학에는 보수적인 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전통을 수호하고 기존의 규범에 순응하려 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도통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전통을 새롭게 변형했던 인물이었다. 경서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오경 대신 사서를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주장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도발적이었다. 기존의 경전 체계를 따르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혔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기존 경전을 반대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 역시 오경을 존중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변화를 주문하고 있었고, 어떻게 보면 그의 주장은 불순하게 해석될 수도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오경 대신 사서를, 그것도 그가 손수 편집하고 주석을 단 책을 읽으라니. 그 방향만으로도 충분히 다른 결과를 생각해볼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사서를 하나의 세트로 묶어 읽는다. 누구는 <논어>로 <맹자>를 풀이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주희의 철학을 따르건 따르지 않건 사서를 함께 읽는 순간 주희의 체계 안에서 해석하고 사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했던 <논어>의 또 다른 주석가 하안에게 물었다면 그는 좀 다른 독서를 추천했을 것이다. <논어>와 <장자>, <노자>를 함께 읽으라는 식의.


사서 가운데 주희의 영향력이 가장 큰 것은 <대학>이라 할 수 있다. 주희는 기존 <예기>에 실린 대학 본문이 순서가 잘못되었으며 일부 내용이 빠져버렸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주희는 <대학> 본문 전체의 순서를 새롭게 배열했으며 일부 부분을 보충해 넣기도 했다. 일부 글자를 고치기도 했다. 그 결과 오늘날 읽는 <대학>의 모습은 <예기>에 실려 있던 그 모습과 영 딴판이 되고 말았다. 주희 손을 거치기 이전을 <고본대학>이라 부른다.


이를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정체를 알 수 없이 마구 뒤섞여 있던 고대 문헌이 빼어난 철학자의 손에 의해 체계적으로 말끔하게 잘 정리되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독단적으로 경전의 형식을 파괴하고 자의적인 해석을 덧붙여 경전의 본래 모습을 억지로 바꾸었다고 해야 할까. 전통적으로는 전자의 입장이 우세하였으나 원칙적으로 따져보면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주희는 생각보다 과감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학>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친민親民을 신민新民으로 고쳐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학> 전체의 맥락에 따르면 ‘신민’이 되어야 앞 뒤가 맞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주희의 편집대로 <대학>을 해석하는 입장에서도 논란이 분분한 부분이다. 이를 그대로 ‘친민’으로 두고 읽어도 크게 무리가 없는 까닭이다. 혹시 주희가 가지고 있던 사대부 엘리트 지식인의 입장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이는 명나라 시대의 걸출한 철학자 왕수인(王守仁 왕양명王陽明1472~1528)과 대비되어 많은 주목을 받았다. 주희의 신민설과 왕수인의 친민설은 각각 백성에 대한 입장을 대변하는 중요한 차이점으로 언급되곤 했다.


주희와 왕수인을 대립적인 철학자로 분류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주자학과 양명학이라는 구도가 대표적이다. 주자학을 사대부 엘리트 지식인의 철학으로, 양명학을 평민 계층을 포괄하는 하층 지식인의 철학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주자학을 규범적이고 윤리적인 보수적 사상으로, 양명학을 개성이 넘치고 활발한 개혁적인 사상으로 나누기도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러한 식의 구분이 가능했던 것은 주희의 철학을 비판하기 위해 상대되는 짝을 찾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 비판이 유효한가를 따져보면 좀 복잡한 구석이 있다. 가장 결정적으로 주희의 시대와 왕양명의 시대에 커다란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송나라와 명나라 사이에 원나라가 끼어 있지만 본질적인 변화는 크게 없었다. 두 시대는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다.


왕수인 개인을 보아도 주희가 주장했던 것과 크게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역시 주희가 만들어놓은 체계 위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을 펼쳤을 뿐이다. 그 역시 사대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서를 중시하는 경전 체계를 따르고 있었다. 주희가 사용한 다양한 개념들을 그 역시 비슷하게 사용했다. 결정적으로 왕수인은 말년에 <주자만년정론>, 주희가 말년에 주장한 철학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나름 주희의 계승자로 자신의 위치를 놓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의 주장이 주희의 본의와 어긋나는 경우가 있기도 하며, 주희와 좀 결이 다른 식으로 해석될 부분도 상당하나, 이 역시 ‘진짜 주희의 철학이 아니다’ 정도에 불과하다.


IMG_1495.jpg 공자의 고향 공묘孔廟에 늘어선 위패들


사실 개인적으로 이런 논의가 별로 달갑지 않다. 주자학이라는 잘못된 명칭이 빚어낸 불필요한 논의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주희의 역할이 크다 하지만 한 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 예를 들어 <논어>를 읽으며 공자학을 연구하고, 장자학과의 차이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주자학이건 양명학이건 한 개인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다. 칸트의 철학이나 스피노자의 철학과 같은 식의 쓰임이라면 어떨까? 그러나 이는 독립 저작을 남긴 서양철학자들에게나 적합한 접근이다. 주희와 왕수인의 차이 정도로 더 개인화하거나, 아니면 성리학이나 송명리학宋明理學 처럼 더 커다란 범주에서 흐름을 논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다.


주희와 왕수인 두 사람의 개인사를 파고들면 기존의 판단과는 전혀 다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주희는 변변치 않은 집안 출신에 과거 성적도 그리 좋지 못했다. 반면 왕수인은 명문가문 도련님으로 일찍이 이름을 떨쳤고 명성에 걸맞게 과거 시험에서 꽤 준수한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 결과 주희는 거의 평생토록 하급 공무원 신세였던 반면 왕수인은 고위 관료로서 조정의 여러 일을 현장에서 처리하곤 했다.


더 흥미로운 접근은 이 둘의 태도를 추적해 보는 것이다. 주희는 자신의 주장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 경서를 빌어 무기로 삼았다. 그러나 왕수인은 강학, 즉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을 통해 명성을 떨쳤다. 또한 주희는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사유를 하는 인물이었던 반면, 왕수인은 보다 통합적이고 실천적인 면에 주목하는 편이었다.


주희와 왕수인 모두 성인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주희는 배워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전제를 따라 구체적인 배움의 과정과 내용에 관심을 두었다. 한편 왕수인은 본래 성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따라 성인이란 바로 이런 사람이라는 식의 논의를 펼치곤 했다. 여기서 성인이 배워서 된다는 주장과 성인의 마을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둘 모두 성인은 배워서 될 수 있다는 송대 이래 사대부 도학자들의 이상을 떠받치는 중요한 논의였다. 다만 강조점이 달랐을 뿐이다.


그렇다면 송대 이래 여러 유학자들이 그린 이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으며 역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신사紳士 혹은 사신士紳 계층의 출현으로 설명하곤 한다. 지역에서 교육과 정치, 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계층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들은 향촌鄉村이라는 새로운 범위의 활동 공간을 창출했다. 기존의 행정 조직과는 다른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인 자치의 움직임이라고 해야 할까. 굳이 관직에 나가지 않아도, 관료로서 천하에 이름을 떨치지 않아도 자기 삶의 현장에서 성인의 삶을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통상적인 이해는 이런 자율성의 측면보다는 통제와 교화의 측면에 더 많이 주목하는 편이다. 이는 성리학, 나아가 중국철학 전체 혹은 전통을 싸잡아 비난해야 했던 까닭이다. 바로 서양제국주의의 침입. 서구근대의 압박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가 하나의 표준이 되자 과거의 철학적 유산은 모두 거대한 잘못 덩어리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렸다. 그나마 긍정적인 면을 건져내야 한다는 주장이 그나마 힘을 얻었다. 긍정적인 부분이란 규범적이고 도덕적인 부분에 치우쳤다. 단순히 요약하면 서구 기술문명의 폐해를 동양의 정신문화가 보완할 수 있다는 식으로. 그러나 그런 식의 접근이야 말로 중국철학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아닐까? 폄하와 환상을 넘어 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 4강 불법을 찾아 서역으로

강의 영상 : https://youtu.be/xhd8lbVUkk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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