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동점의 파고, 중국을 덮치다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6-1

by 기픈옹달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천주실의>는 대서방국 이마두(마테오 리티) 및 그의 수도 회원들이 우리 중국인들과 문답한 글이다. ‘천주’란 무엇인가? ‘하느님’(상제)이다.
天主實義 大西國利子及其鄉會友與吾中國人問答之詞也 天主何 上帝也
<천주실의> 풍응경의 서문 (<천주실의>, 송영배 외 역. 15쪽.)


전통적으로 시간은 돌고 도는 것이라 생각했다. 환갑還甲이라는 말은 이 순환을 잘 보여준다. 세계의 시간은 60갑자를 기본으로 끊임없이 회전한다. 기본적으로는 우주의 순환에 따라 연, 월, 일, 시 네 개의 시계가 회전한다. 환갑이란 60년, 커다란 시계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오는 걸까? 사실 생각해보면 그보다 커다란 시계를 더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그 이상을 상상하는 것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태반의 인간이 겨우 갑자의 인생을 살기 때문이다. 두 갑자의 삶도 버거운데 그 이상을 어찌 상상하랴.


천년 넘도록 60갑자만으로 충분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근대인의 시간관은 다르다. 근대인의 시간은 끊임없이 누적된다. 누적된 시간만큼 발전과 변화를 이룬다. 2019년은 1919년에서 100년이 흘렀으며, 그만큼 발전했다 생각한다. 그래서 건국 100주년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은 그렇지 않았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지만, 1592년 건국 200주년 행사를 치르지 않았다. 그해는 임진년이었고, 동아시아를 뒤흔든 참혹한 전쟁이 벌어진 해였다. 임진전쟁이 벌어진 해로 기억할 뿐, 그 누구도 조선 건국 200주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간에 대한 생각이 다른 까닭이다.


임진왜란보다는 임진전쟁으로 기억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왜倭, 즉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전쟁은 일본과 조선, 명나라까지 참전한 대규모의 국제전이었다. 또 전쟁의 배경에는 서양 기술의 전래라는 새로운 변수가 있었다. 긴 역사적 안목에서 보면 이 전쟁은 머지않아 들이닥칠 거대한 변화의 예고편이었다.


그보다 앞선 1583년, 중국의 조경肇慶에 푸른 눈의 낯선 인물이 도착한다. 그의 이름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리마두利瑪竇 1552~1610)로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였다.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도 마카오에 포르투갈 상인을 중심으로 서양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마테오 리치도 마카오를 거쳐 중국에 들어왔다. 이미 중국과 서양의 교류가 있었던 셈. 그러나 마테오 리치만큼 중국 깊숙이 들어온 서양인은 없었다. 그는 이후 남경을 거쳐 수도 북경까지 이른다. 1601년에는 황제를 만나기까지 한다.


그가 이렇게 중국의 심장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유가 경전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승려 복장을 하고 중국에서 포교활동을 했다. 승려를 존중하는 일본 문화를 참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승려가 천대받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유학자의 옷을 입는다. 옷만 유학자의 것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옛 유가 경전을 학습하여 상당한 이해에 이르렀다. 그는 빼어난 암기력으로 유가 경전을 달달 외었는데 당시 중국의 유학자들도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 덕분에 그는 유학자들과 폭넓게 교유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는 명말의 괴짜 유학자 이지(李贄 이탁오李卓吾)도 있었다.


마테오 리치는 자신의 포교활동이 유가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도리어 그는 서양에서 가져온 지식이 유가의 가르침을 보완한다고 보았다. 이른바 보유론補儒論. 그가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기독교의 하느님을 상제上帝로 소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가 경전에도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니 따로 먼 데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하늘(天)이자 오래전부터 섬기던 상제上帝이니 유가의 ‘경천敬天‘은 곧, 기독교의 신앙행위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마테오 리치는 1610년 중국에서 세상을 떠난다.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으나 낯선 이국 땅에서 삶을 마감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중국 유학자들은 그를 이자利子라고 존중하였으나 후임 선교사들은 그와 소통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가 모국의 말을 상당 부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은 마테오 리치의 방향을 따라 중국의 전통을 존중하며 선교 활동을 이어간다. 이들은 정기적인 보고서를 통해 중국을 서양에 소개하기도 했다. 중국의 문화와 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덕택에 이들의 보고서는 서양 지식인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상호 존중과 상호 이해의 역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7세기 내내 가톨릭 내에서는 하느님을 상제로 번역한 것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결국 1715년 교황청은 상제上帝를 금지하고 천주天主라는 새로 만든 단어만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조심스러운 태도는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중국의 철학과 문화에 깊은 관심을 두고 두 문화 사이를 상호 중계하는 인물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HEIC_Nemesis.jpg 영국 군함 네메시스호. 철갑 증기선은 서양의 압도적 힘을 보여주었다.


아편전쟁(1840~1842)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아편’전쟁이라는 말처럼 아편이 촉발시킨 이 전쟁이 가져온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잘 알려져 있듯, 아편전쟁은 영국이 중국을 상대로 벌인 전쟁이다. 대중무역 적자를 매우기 위해 영국은 인도 식민지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판매한다. 선교사들 가운데는 앞정서서 아편 밀매상을 도운 이도 있었다. 카를 귀츨라프가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는 빼어난 통역실력으로 상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후 난징조약을 체결하는 자리에도 통역자로 활약했다. 상호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귀츨라프의 역할은 단순한 통역가 이상이었다. 그는 선교사이기도 했지만, 아편밀매업자이기도 했고, 서양 제국주의의 침입의 최전선에서 복무한 인물이기도 했다. 한 손에는 성서를, 그러나 한 손에는 아편 혹은 총을 든 모습은 그에게 모순이 아니었다. 참고로 그는 조선을 밟은 최초의 서양 개신교 선교사로 소개되기도 한다.


마테로 리치는 중국인의 언어를 배우고 중국 이름을 썼으며, 중국 옷을 입었다. 귀츨라프도 중국어에 능통했으며, 중국 이름을 사용했고, 중국인의 복장을 입었다. 그러나 마테오 리치에게는 중국 철학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있었다. 귀츨라프에게는 그런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귀츨라프가 활약한 아편전쟁과 난징조약은 본격적으로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의 문물이 밀려들어오는 시발점이 된다. 이후 중국은 서양과 몇 차례 새로운 조약을 맺는다. 조약은 서양의 군사적 우위를 확인한 결과였다. 그래서 서세동점을 한쪽에서는 폭력의 역사로, 한쪽에서는 개항의 역사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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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리치와 카를 귀츨라프. 둘은 중국을, 나아가 아시아를 대하는 서양인의 서로다른 태도를 상징한다.


많은 서양 역사가들은 아편전쟁과 난징조약으로 중국이 야만의 시대를 끝낼 수 있었다고 본다. 1842년 난징조약을 기점으로 중국에 근대의 여명이 비추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관점에 따르면 1842년을 통해 중국은 비로소 ‘발전’이라는 선물을 얻는다.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던 역사의 시계추가 이제야 비로소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서구인의 직선적 시간관에서 조망한 중국 역사일 뿐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중국의 역사는, 나아가 동아시아의 역사는 고유의 리듬을 따라 꾸준히 돌고 있었다. 이를 의미 없는 반복이라 오해하지 말자. 순환과 변화를 통해 중국은 고유의 역사를 직조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압도적인 힘의 차이는 근본적인 변화를 강요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게 문제였다. 어떤 이는 중체서용中體西用, 동도서기東道西器니 하면서 중국에 서양의 방식을 수용하는 길을 모색했다. 반면 전반서화全般西化, 서양의 것을 모조리 다 흡수하자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얼마만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했다. 서양은 서둘러 좇아가야 할 표준이 되었다.


20세기 초 중국 지식인들은 서양의 민주주의와 과학에 주목했다.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합리적으로 사회를 이끌어가며 과학기술을 통해 부강을 이룰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덕德선생과 새塞선생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당시 지식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덕선생에서 ‘덕德’의 중국 발음은 ‘de’인데 바로 Democracy,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마찬가지로 새선생에서 ‘새塞’는 ‘sai’, 즉 science 과학을 의미한다.


기존의 선생, 기존의 철학은 버려야 할 것이 되었다. 공자와 주자라는 두 선생은 이제 중국의 후진성을 대표하는 인물이 된다. 어째서 중국은 발전하지 못했는가? 대체 누가 중국의 발목을 잡았는가? 여러 인물 가운데 공자와 주희가 가장 혐의가 짚은 인물이었다. 수천 년 공자를 선생으로 모시고 있었고, 수백 년간 주희를 선생으로 모시고 있었는데 이 지경 이 꼴이 되었으니 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 옳지 않을까?


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 공자의 무리를 때려 부수자는 구호가 나왔다. 1919년 5.4 신문화운동은 낡은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해 펑유란(馮友蘭1895~1990)은 태평양을 건나 미국 컬럼비아 대학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한다. 존 듀이에게 수학한 그는 귀국 후 철학이라는 문제를 탐구한다. 그는 단순히 전통을 비판하고 파괴하는 것에 반대하고 전통 가운데 철학이라 부를 만한 것을 찾아내야 한다고 보았다.


<중국철학사中國哲學史>는 그런 고민이 담긴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중국에도 서양의 철학이라 할만한 것이 있다 주장한다. 공자 이래로 여러 철학자들이 등장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공자를 소크라테스에, 맹자를 플라톤에, 순자를 아리스토텔레스에 비유했던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중국에도 철학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는 것은, 바로 서양인들에게 철학이라 인정받고자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의 노력은 성공적이어서 전통의 여러 인물들이 철학의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지금도 철학과에서 공자, 맹자, 주희 등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중국철학사>는 또 하나의 한계를 갖고 있기도 하다. 그가 서술한 철학사는 캉유웨이로 끝난다. 캉유웨이는 중국의 전통적인 철학 방식, 경학經學의 종말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20세기 중국 철학의 향배는? 전통적인 철학은 분명해졌지만 도리어 현대의 철학은 모호해졌다. 20세기 중국철학이라 할만한 것이 대체 무엇이 있을까?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 5강 유가의 새로운 부흥

강의 영상 : https://youtu.be/Z3IluwQ9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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