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6-3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가령 말일세, 창문도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는 철鐵로 된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그 안에는 많은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네. 머지 안아 모두 숨이 막혀 죽겠지. 그러나 잠든 상태에서 죽어가니까 죽음의 비애는 느끼지 않을 걸세.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 비교적 깨어 있는 몇 사람을 일으켜, 그 불행한 몇 사람이 구제할 길 없는 임종의 고통을 겪게 된다면 도리어 그들에게 미안한 일 아닐까?”
“그러나 몇 사람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 <외침> 서문 (<루쉰독본>, 루쉰, 이욱연 역, 371쪽.)
루쉰(魯迅1881 ~ 1936)은 19세기 말, 청나라 말기에 샤오싱(紹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북경의 중앙 관리였다. 나름 지역에서 이름난 가문 출신이었던 셈이다. 그 역시 여느 도련님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 서당을 다니며 고전을 익혔다. 과거시험에 합력하여 조정의 관리가 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당연한 미래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뻔한 삶을 살지 않는다. 루쉰 개인이 대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집안에 불어닥친 풍파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루쉰'은 그가 즐겨 쓴 필명으로 그의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이었다. 루쉰이 13살 되는 해, 할아버지가 과거시험에 부정 청탁을 받았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루쉰은 외갓집으로 몸을 숨겨야 했고, 집안의 가산은 할아버지를 옥바라지 하는데 사용되었다. 또 다른 불행이 연이어 닥쳤다. 아버지가 병으로 몸져누웠다. 루쉰은 각종 기이한 약재를 구하기 위해 전당포와 약방으로 오가곤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내 목숨을 잃는다. 루쉰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성씨 '저우(周)' 대신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루(魯)'를 썼다는 것은 할아버지, 아버지의 삶을 따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은 아니었을까.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연이어 닥친 불행이 아니었다면 루쉰 역시 과거시험에 몰두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이어 닥친 불행으로 집안의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루쉰은 집을 떠나 난징으로 떠난다. 그는 처음에는 강남수사학당이라는 해군 학교에 들어간다. 1898년, 옌푸의 <천연론>이 발간되었고 캉유웨이가 무술변법을 일으킨 해였다. 그 역시 옌푸의 글을 읽고 큰 영향을 받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광무철로학당으로 적을 옮긴다. 그곳에서는 철도와 광산에 대해 배운다. 그리고 국비 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으로 떠나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다.
해군학교에서 철도와 광산, 나중에는 의학까지. 지금 보면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상황에 비춰보면 루쉰의 일관성 있는 방향을 읽을 수 있다. 서양 사상을 중국에 소개한 옌푸가 해군학교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철도와 광산은 근대를 상징하는 산업이었다. 일본이 난학, 네덜란드의 학문을 수용하여 근대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난학은 특히 의학이 중심이었다.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역시 당시의 청년 지식인처럼 근대에 관심이 깊었다.
센타이 의학전문학교에서의 경험은 또 다른 길을 모색하게 만든다. 당시 해부학 수업에서는 슬라이드를 보여주곤 했는데, 수업자료를 다 보여주고 시간이 많으면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여주곤 했다. 한 번은 러일 전쟁 가운데 포로가 된 중국인의 사진을 보았다. 건장한 체구를 지녔지만 포로가 되어 조리돌림 당하는 동포의 모습을 보고는 의학을 포기하기로 마음먹는다. 육체가 튼튼하고 건강하면 무엇하나.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데. 그는 정신을 고치는 일을 사명으로 삼는다. 바로 문학이 그 도구였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문학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1918년 신청년 잡지에 <광인일기狂人日記>를 연재하면서부터였다. 신해혁명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났지만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기껏 황제를 내쫓았는데도, 스스로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각지에서 일어난 군벌이 전횡을 일삼기도 했다. 루쉰의 말을 빌리면 이때 그는 ‘고독’을 느끼고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절망을 경험하고 있었다고 해야겠다. 이때 <신청년> 잡지에 기고 요청을 받는데, 루쉰은 던지는 질문이 이렇다.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는 철의 방에 갇혀 있어서 홀로 깨어 있다면 구태여 사람들을 깨워야 할까? 괜히 절망만을 심어주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희망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느냐는 기묘한 대답에 그는 마음을 움직였다고 한다. 그의 <광인일기>는 입말, 백화문白話文으로 기록한 최초의 소설이었다. 낡은 옛 글의 형식이 아닌 사람들이 말하는 말로 기록한 소설. 이듬해 1919년 5.4 운동이 일어나며 새로운 문화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었을 때 루쉰의 <광인일기>은 크게 주목받는다.
<광인일기>에서 루쉰은 옛 경전에 숨긴 폭력성을 고발한다. 예교禮教라는 전통 규범이 사실은 사람을 잡아먹는 게 아니었느냐는 질문이다.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규범. 자식보다는 아비를, 여성보다는 남성을, 백성보다는 군주를 중시 여기는 규범은 다르게 말하면 자식을, 여성을, 백성을 잡아 먹는 것이나 다름없다. 루쉰은 <광인일기>를 통해 전통 사상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동시에 전면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당대 지식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청년 세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루쉰 자신은 별로 바라지 않는 일이었겠지만 그는 이후 혁명 정신의 화신이 된다. 신해혁명으로 낡은 체제를 무너뜨렸지만 그다음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혁명은 완수되었는가 아니면 여전히 혁명이 필요한가. 새로 혁명이 필요하다면 대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격동의 시대를 사는 청년들은 루쉰의 글에서 혁명의 정신을 찾았다.
"루쉰은 중국문화혁명의 주장主將이다. 그는 위대한 문학가이며 위대한 사상가이자 위대한 혁명가이다." (鲁迅是中国文化革命的主将,他不但是伟大的文学家,而且是伟大的思想家和伟大的革命家。) 루쉰의 글을 즐겨 읽었던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의 평가이다. 그 역시 루쉰처럼 청년시절 옌푸의 <천연론>을 읽으며 신문물에 눈을 떴다. 신해혁명 이후 새로운 혁명을 꿈꾸며 그는 루쉰을 자주 언급하곤 했다.
루쉰의 정신으로 혁명을! 마오의 루쉰론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기서 혁명이란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짚어두자. 반봉건 반외세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도 혁명이며,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것도 혁명이며, 새로운 역사를 여는 것도 혁명이다. 20세기 중국에서 혁명만큼 다의적으로 뜨겁게 이야기되는 말이 있었을까.
마오의 평가 이후 새롭게 수립된 중국에서 루쉰은 새로운 중국의 성인이 된다. 사람들은 루쉰의 이름을 빌어 공자를 내쫓았다. 루쉰의 글은 현대 중국의 경전이 되었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사람들은 <논어> 대신 루쉰의 글을 읽었다.
이것이 루쉰에 대한 적절한 독해인가는 다시 점검되어야 할 주제이다. 루쉰은 창업보다는 파괴에 걸맞은 인물이었다. 그는 낡은 시대의 파괴를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으며, 자신조차 낡은 시대의 잔재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서 낡은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도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후 자신의 관에 민족혼이라는 걸개가 덮였고, 자신의 글이 경전이 되고 자신이 성인의 위치에 이르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결코 반기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 루쉰을 문학가로 많이 기억한다. 그러나 중국철학사를 새롭게 기술한다면 루쉰의 이름도 함께 기입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20세기 중국 사상사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통 규범과 근대 국가를 넘어 좀 다른 중국을 상상하도록 도와주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고대 중국의 시인 굴원처럼, 그는 오르락내리락하며 새로운 중국의 길을 모색하던 인물이었다.
루쉰에 비해 마오쩌둥은 확고한 신념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 공산당을 이끌고 대장정을 감행했다. 한쪽에서 보면 국민당의 포위에서 벗어나 후퇴하는,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도망치는 길이었지만 어느새 공산당의 새로운 실험을 위한 위대한 행진으로 바뀌었다. 나아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도전이 된다. 마오의 독특한 사상적 유연성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마오는 독특한 혁명가였으며 독특한 공산주의자였다.
본디 혁명革命이란 낡은 왕조를 바꾸는 것을 의미했다. 새롭게 천명을 받은이가 황제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 탕임금과 무왕의 혁명은 하늘을 따른 것이다.(湯武革命,順乎天。<백호통>)" 따라서 중국 전통의 혁명은 근대적 의미의 혁명,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체제를 세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오의 혁명은 왕조를 바꾸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혁명을 실현한 인물이었다. 중국 전통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그의 주창한 혁명은 낯선 것이었다. 마오의 혁명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는 여전히 복잡한 문제이다.
마오를 이야기할 때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는 말이 인용되곤 한다. 열에 일곱은 공적이요, 열에 셋은 과오라는 평가.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 공산당이 내린 평가이다. 과연 이것만으로 충분할까. 혁명을 빼놓고 20세기 중국을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오는 여전히 거대한 물음표로 남아 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참고하면 그는 광기의 방조자, 혹은 광기의 조장자라고 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의 본질, 과격하고도 급진적인 변화를 생각한다면 문화대혁명 또한 다른 식의 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실상 중요한 것은 어떤 혁명이었느냐는 혁명의 양상이 아니라 무엇으로부터의 혁명이었느냐는 혁명의 원인과 결과가 아닐까.
마오는 혁명의 이상을 숭배한 인물이었다. 그의 생애를 보면 절대적인 권력의 자리에서도 혁명, 특히 사상의 혁명을 끊임없이 주창했다. 그에게 혁명이란 결코 멈추지 않는, 단발적으로 끝낼 수 없는 일회성 사건이 아니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문화대혁명을 혁명의 이상을 새롭게 실험하는 거대한 실험 현장으로 보기도 한다. 무엇을 실험했는가 하는 점은 더 구체적인 연구와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조반유리造反有理, 모든 혁명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문화대혁명의 주요 구호 가운데 하나다. 기성세대와 지식인에 대한 폭력으로 문화대혁명을 기억하곤 한다. 규범과 지식, 문화와 전통의 파괴. 확실히 중국은 과거로부터 철저히 단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중국의 미래는 어때야 하느냐는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 중국은 어떻게 미래의 초상을 그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