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6-4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일면성이란 문제를 전면적으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중국만을 이해하고 일본은 이해하지 못하고, 공산당만을 이해하고 국민당은 이해하지 못하며, 무산계급은 이해하는데 자산계급은 이해하지 못하며, 농민만을 이해하고 지주는 이해하지 못하며, 순조로운 상황만을 이해하고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며, 과거만을 이해하고 미래는 이해하지 못하며, 개체만을 이해하고 전체는 이해하지 못하며, 결점만을 이해하고 성과는 이해하지 못하며, 원고만을 이해하고 피고는 이해하지 못하며, 혁명의 비밀활동만을 이해하고 혁명의 공개활동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등을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해 모순의 각 측면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모순론>, <마오쩌둥 주요문선>, 이등연 역, 학고재. 52쪽
만화 <진격의 거인>은 초대형 거인이 나타나 성벽을 부수며 시작한다. 대체 언제 이 커다란 거인이 나타난 것일까? 한가롭게 질문을 던질 틈이 어디 있나. 어서 빨리 달아나야지. 초대형 거인의 등장에 성 안은 아수라장이 된다. 거인을 상대하는 인간들의 분투를 담은 이 일본 만화는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만화가 인기를 끈 이유 가운데 하나는 거인의 등장이 결코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를 보면 이와 비슷한 충격을 경험한 적이 있다. 흑선, 서양의 커다란 검은 배가 나타나 변화를 강요했다.
서구 열강의 침입은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비슷한 상흔을 남겼다. 잔혹한 몇 가지 교훈도 함께 가르쳐주었다. 살아남으려면 변화해야 한다는 것.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집어삼킨다는 점. 일본은 거인의 충격에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하여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이룬 나라로 평가받는다.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열강의 일원이 되는 것이 20세기 일본의 목표였다.
다시 거인의 충격이 도래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은 <진격의 거인>에 나타난 초대형 거인이 중국을 형상화한 것이라 이야기하기도 한다. 갑자기 등장해서 커다란 덩치로 일상을 뒤흔드는. 실제로 2010년대 이후 중국은 일본의 경제력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매년 격차는 점점 벌어져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일찍이 미조구치 유조는 <중국의 충격>이라는 책에서 비슷한 경고를 한 적이 있다. 고개를 돌리고 무시하고 있지만 언젠가 중국이 다시 ‘충격’과 함께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을 수 있다고.
문제는 ‘이해’에 있다. 서구 열강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들을 무시했던 것처럼, 중국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무시와 몰이해는 더 큰 충격과 상처를 남길 것이다. 아는 만큼 대응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사실 이런 점은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과연 우리는 중국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이해하려고 하는가.
여전히 중국을 ‘쭝국’이라 발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쭝국’이라는 말을 들으면 ‘중공中共’이라는 옛 호칭이 떠오르기도 한다. 1992년 수교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은 공산당의 나라로 상대할 수 없는 나라, 상대해서는 안 되는 나라로 인식되었다. 두 나라 사이에 상호 교류가 많아지면서 이런 생각은 점점 옅어졌지만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여전하다. 거칠게나마 나누어보면 기성세대가 ‘쭝국’이라는 식으로 막연한 멸시하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면, 젊은 연령층은 구체적인 사건을 계기로 혐오의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멸시와 혐오가 뒤섞여 중국에 대한 상식조차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중국어 교사들이 모여 중국에 대해 소개하는 책을 엮기로 했단다. 학생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전국에서 학생들의 질문을 수집했다. 그런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학생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순위대로 보자. “1위 중국 사람들은 왜 인육을 먹나요? 2위 중국 사람들은 장기매매를 한다는데 사실인가요? 3위 중국 음식은 쓰레기라는데 정말이에요? 4위 중국 물건은 왜 그렇게 질이 안 좋나요? 5위 중국 사람들은 더럽다는데 진짜인가요?”
어린 학생들의 유치한 장난이라 생각하지 말자. 일반 성인들의 태도라고 얼마나 다를까. 언론에서 쏟아지는 중국 관련 기사들만 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사를 보면 중국은 늘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비상식적인 나라이다. 멸시와 혐오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긍정적인 답을 찾기 힘들다.
무엇이 멸시와 혐오를 만들었을까. 우선은 다른 이념 체제를 수용하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국가 만들기라는 과업을 수행하며 한국과 중국은 전혀 다른 이상을 추구했다. 어쨌든 중국은 공산당 일당 독재로 사회주의 이념을 추구하지 않았는가. 한편 중국보다 앞서 근대사회에 진입했다는 생각도 있었다. 서구를 따라가는 근대화의 긴 마라톤에서 아시아 국가 가운데 한국은 1등은 되지 못해도 2등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21세기를 좌우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70년대 말 중국은 개혁개방을 표방하며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을 수용했다. 한편 가파른 경제성장률은 세계 여러 나라를 추월하여 이제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을 야만의 나라로 후진국으로 인식하는 것은 멸시와 혐오 아래에 두려움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커다란 힘을 자각하고 있기에 다양한 상상이 펼쳐지기도 한다. 중국 분열론이나 중국 패망론 따위가 그것이다.
나는 종종 저 두려움을 근간으로 한 멸시와 혐오가 어느 순간 선망과 존경으로 뒤집히지 않을까 질문해보곤 한다. 누군가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 하겠지만, 생각보다 변화는 빠른 법이다. 중국 스마트폰을 쓰고, 중국 식의 결재 시스템을 사용하리라는 것을 생각이나 해보았는가.
멸시나 선망도 아닌 또렷한 눈으로 중국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을까. 중국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면 아마도 왜곡된 시각에서 벗어나 중국을 바라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중국은 오랜 역사 위에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구축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현재와 과거, 물질과 정신, 혁명과 전통의 모순 위에 오늘날 중국이 있다.
장자는 일찍이 ‘방생지설(方生之說)’에 대해 이야기했다. 두 가지가 짝을 이루어 함께 생겨난다는 주장이다. 생사生死가 그렇고 음양陰陽이 그렇다. 마오는 이것을 서구의 변증법과 연결시켜 풀이한다. 모든 사태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뜻이다. 모순처럼 보이는 사건을 함께 보아야 전체를 알 수 있다는 말. 한쪽만을 보아서는 사태를 제대로 볼 수 없으며 양쪽을 모두 보아야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법이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알렸다. “中華人民共和國 成立了” 마오의 중국은 ‘혁명’의 이상 아래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을 추구했다. 이른바 ‘봉건 사회의 잔재’를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이 목표였다. 문화혁명은 그 이상이 또 다른 식으로 분출한 사건이라 해야겠다. 문화혁명의 무리들은 여러 곳을 파괴했다. 그 가운데는 공자의 고향 취푸의 공묘孔廟, 공자 사당도 있었다. ‘만세사표萬世師表’라는 현판을 떼어 불살랐다.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 새겨있는 묘비는 두 동강을 냈다. 공자의 무덤도 파헤쳤다. 그렇게라도 다시 공자를 죽이고자 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전세계에 자신을 소개할 때 공자의 제자들을 등장시켰다. 한편 천안문 공장에 공자동상이 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공자상은 곧 치워졌으나 이 사건은 중요한 변화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혁명은 전통을 지우지 못했다. 마오의 붉은 중국도 공자를 영영 씻어내지는 못한 것이다.
최근 2020년 8월 CCTV는 대유주희大儒朱熹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주희의 삶을 추적하며 전통적인 유가의 가치를 되짚어보는 방송이다. 낡은 철학자에 주목하는 이유는 현주소에 대한 고민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힘으로는 뭇 세계 여러 나라를 압도하지만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가치를 찾지는 못하고 있다는 곤혹스러움이 중국의 고민이다. 이렇게 옛 철학자들이 속속 부활하고 있다.
시진핑의 중국을 어찌 보아야 할까. 2018년 시진핑은 ‘초심을 잊지 말로 가명을 기억하자(不忘初心牢記使命)’라고 말했다. 현재 중국을 구축한 공산당의 가치를 잃지 말자는 이야기다. 한편 그해는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었다. 중국은 마르크스 생일을 기념하며 독일에 마르크스 동상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보연 하는 사람 가운데는 이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칠 것이다. 중국은 가짜 사회주의 국가 아닌가? 한편 중국은 ‘공자학원孔子學院’을 통해 자국의 문화를 세계 곳곳에 전파하고 있다. 공자의 이름으로 세계에 얼굴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옛 고문古文을 읽고 외며 고전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칠 것이다. 중국은 일찍이 공자와 예교를 버리지 않았는가? 중국과 미국의 무역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시진핑은 자유 무역의 가치를 수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관세를 높이는 식으로 무역 장벽을 설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장에 맡기자는 말. 오늘날 중국은 자본주의의 최첨단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물 화폐를 없애고 디지털 화폐로 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또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도 코웃음을 칠 것이다. 중국은 모든 것이 가짜 아닌가?
비웃음을 거둬내고 중국을 보면 중국은 사회주의 가치를 추구하며, 공자가 이야기한 소강小康사회의 구축을 지향하고 있다. 또한 동시에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을 수용하며 앞으로 세계 경제를 이끌어 나가는 비전을 품고 있기도 하다. 모순 덩어리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제 고유의 방식을 고수하며 제 길을 찾아나가고 있는 나라이기도하다. 그 길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진격’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행보임에는 틀림없다.
훗날 2020년은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이 될 것이다. 중국발 코로나로 전 세계가 몸살을 겪고 있다. 중국은 일국一國,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며 홍콩을 물들이고 있다. 서북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는 강력한 한화漢化 정책이 시행중이라 한다. 어떻게 보면 조급함일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자신감일 수도 있다. 제국의 모습으로 중국은 또 어떻게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낼까. 그리고 중국철학사는 그때 또 어떤식으로 서술될까.
중국이 중국의 눈으로 세상에 말을 걸고, 자신을 해석할 때조차 우리는 또 우리의 눈으로 중국을 보고 중국을 해석해야 한다.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보는 중국은 오래된 이웃이자, 늘 경쟁하고 다투어야 하는 상대이며, 때로는 같은 철학을 공유하는 형제이기도 하다. 너무 낯설기도 하지만, 너무 가까워 구분이 안 될 때도 있다. 그래서 어렵지만, 그래서 더 잘 볼 수 있는 부분도 있다. 따라서 먼저 제안할 수 있는 또 다른 중국을 상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도래할 중국, 생성될 중국의 철학. 그런 면에서 중국철학사는 또 계속 쓰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