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6-2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공자는 거란세에 살았으나, 지금은 지구가 소통되고 구미歐美가 대변동하여 승평세로 진입했고, 미래에 지구의 대소원근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되면 국경은 없어지고 인종도 분리되지 않고 풍속과 교화가 똑같아져 하나와 같이 태평해질 것임을 공자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孔子生當據亂之世 今者大地既通 歐美大變 蓋進至升平之世矣 異日大地大小遠近如一 國土既盡 種類不分 風化齊同 則如一而太平矣 孔子已預知之
캉유웨이康有爲의 <논어주論語注> (<중국철학사 (하)>, 펑유란, 박성규 역. 678쪽.)
중국의 마지막 두 왕조의 교체는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중국의 동북쪽에서 힘을 키운 군사집단은 후금後金을 건국하고는 끝내 중원을 정복한다. 이후 국호를 바꾸어 청淸이라 일컫는다. 통상적으로는 만주족이 중국의 한족을 지배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오늘날 역사에는 만주족이라는 정체성이 건국 이후 형성되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여튼 이렇게 중국은 다시 오랑캐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당시 중국인들은 이방 민족의 통치를 순순히 받아들였을까? 오랑캐에 지배당하는 것에 필사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흥미롭게도 명청 교체기에는 역대 왕조의 교체기에 나타나는 그런 혼란기가 상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간 혼란기가 지속되곤 했으나 청은 제국을 빠르게 안정적으로 지배해나갔다. 강희康熙, 옹정雍正, 건륭乾隆의 세 황제의 지배기간(1662~1796)은 중국 역사 가운데서도 가장 융숭한 시대로 이야기되곤 한다. 강희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청나라 군대가 북경에 입성한 지 채 50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곳곳에서 반란이 있었고, 명나라의 유지를 이어 남명南明 정권을 세운 이도 있었다. 그러나 강희제가 제위에 오를 때쯤이면 이미 크고 작은 분란의 불씨를 모두 잠재운 뒤였다.
팍스 시니카(Pax Sinica), 강희-옹정-건륭 세 황제의 전성기를 빠르게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어째서일까? 청이 강력한 군사력으로 반란을 꿈꾸지도 못할 만큼 잔혹하게 제국을 지배했기 때문일까? 확실히 청의 군대는 이 군대는 강했다. 역대 중국의 왕조 가운데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하니 말이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방대한 영토보다 더 넓다. 힘으로 지배할 수는 있으나 힘만으로 전성기를 구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청은 송, 명의 사회 제도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오랑캐가 세운 새로운 나라가 들어섰지만 송, 명을 거치며 구성된 사회 시스템은 큰 변화가 없었다.
송나라 시대에 등장한 사대부 계층은 명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지방의 독자적인 정치적 역할을 하는 신사 계층으로 자리 잡는다. 청 역시 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민간의 입장에서 보면 나라가 바뀌었고, 황제가 바뀌었으나 그것뿐이었다. 유가의 통치 이상은 고스란히 전승되었다. 따지고 보면 크게 갈등을 벌일 일도 아니었다. 천자天子, 하늘의 대리자를 통해 천하가 잘 다스려지면 그만일 뿐이었다. 그가 어느 혈통인지, 어디 출신인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청은 대규모 학술 사업을 통해 지식인들을 끌어들였다. 강희제 시대에는 <강희자전康熙字典>을 편찬했다. 역대 자전字典을 종합하여 펴낸 기념비적인 결과물이었다. 건륭제 시대에는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한다. 여기서 ‘사고四庫’란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이라는 전통적인 도서분류법을 의미한다. 오늘날로 치면 역사이래 철학, 역사, 문학 방면의 모든 책을 수집하여 정리하는 대규모 작업이었다.
보통 청나라 시대의 철학을 고증학이라고 한다. 이렇게 모인 여러 문헌을 두고 진위 문제, 본래의 의미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 성행했던 까닭이다. 실제로 이들은 일부 경전이 위조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경서의 기록에 역사적 오류가 있음도 밝혀냈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유가 사상을 반대하고 새로운 이념을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철학 체계를 의심하기보다는, 진위를 가리고 근거를 확실히 하여 전통 적인 철학 체계를 보다 합리적으로 구축하고자 했다.
전통적인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도리어 서양의 충격이 가져온 결과였다. 아편전쟁의 패배는 충격이었으나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2차 아편전쟁(1856~1860)은 더 큰 상처를 남겼다. 이번에는 서양의 군대가 수도 북경에까지 이르렀다. 황제는 도망갔고, 서양 군대는 원명원圆明园을 파괴하고 약탈했다. 원명원은 예수회 선교사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가 설계한 정원이었다. 주세페 카스틸리오네는 궁정화가로서도 활약하여 궁정 인물들의 여러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제2차 아편전쟁으로 텐진조약, 베이징조약을 맺는다.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풍자화처럼 중국은 여러 제국이 갈라먹기에 좋은 먹음직스런 먹잇감이었다.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양을 배워 살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양무운동洋務運動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활동이었다. 빼어난 이를 선발하여 서양에 유학을 보내 서양 기술, 특히 군대 및 무기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였다. 옌푸(嚴復, 1853~1921)는 당시 영국으로 유학하여 해군학교에 진학한다. 귀국 후 그는 북양함대 구축에 힘을 보탠다. 북양함대는 이홍장이 주도하여 양성한 해군이다. 아편전쟁 때 해군의 힘을 자각하였던 까닭에 국가가 주도하여 해군을 양성하고 강한 군사력을 갖고자 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1894~1895)으로 북양함대는 괴멸하고 만다. 청일전쟁의 패배는 중국에게 또 다른 아픔을 선물해 주었다. 일차적으로 서양 기술과 함선을 도입하여 야심 차게 준비한 함대가 한 차례의 전쟁으로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모든 패배는 뼈아프지만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그 아픔의 크기가 다른 법. 그 상대가 일본이라는 점에서 이 패배는 더 큰 아픔을 가져왔다. 양이洋夷, 낯선 서양 오랑캐와 왜倭라는 익숙한 오랑캐를 대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동쪽 변방의 보잘것없는 오랑캐에게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패배하다니.
옌푸는 1898년 <천연론天演論>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 책은 토마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Evolution and Ethics)>를 번역한 책이다. 그는 진화를 천연天演, 자연이 펼쳐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는 다윈의 생물진화론이 아니라 헉슬리의 사회진화론에 주목했다. 생물이 진화하는 것처럼 사회도 변화해야 한다. 그는 진화론의 다양한 개념을 번역했고 중국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생존경쟁을 의미하는 경물競物, 적자생존을 뜻하는 천택天擇, 약육강식弱肉強食과 같은 개념은 상용어가 되다시피 했다. 가만히 있어서는 도태되고, 서양이나 일본처럼 진보한 국가에게 잡아 먹히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옌푸는 <천연론>이외에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원부原富>,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법의法意>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군기권계론群己權界論> 등을 번역했다. 그러나 <천연론>만큼 막대한 영향을 끼친 책은 없었다. 당시 중국 지식인들에게 <천연론>은 필독서였다. 그만큼 생존 자체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1898년 옌푸가 <천연론>을 세상에 내놓은 그해, 또 다른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이 해는 무술戊戌년으로 개혁파 지식인들이 내놓은 개혁안을 황제 광서제光緖帝가 수용하면서 일대 개혁을 추진하였으므로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 한다. 개혁안에는 다양한 사회 변화의 요구를 담았으며, 궁극적으로는 입헌군주제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서태후와 수구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광서제를 유폐하고 개혁안을 폐지해버리기 때문이다. 개혁을 주도했던 여러 지식인들이 여럿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일본으로 도망치는데, 그 가운데는 무술변법을 주도한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도 있었다. 그는 일찍이 <춘추공양전>과 같은 경서에 의거하여 역사의 발전을 셋으로 나누어 보았다. 거란세據亂世, 승평세升平世, 태평세太平世가 그것이다. 거란세는 혼란한 시대를 의미한다. 승평세는 거란세의 어지러움이 줄어드는 시대로 자신이 그런 시대를 열 수 있다 생각했다. 사회 변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태평세라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이는 크게 보면 경서를 통해 서양식의 진화론을 새롭게 해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무술변법의 실패 이후 그는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닌다. 그럼에도 그는 경서에서 이야기한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았다. <대동서大同書>는 그의 이상이 담긴 책으로, <예기>에 나오는 ‘대동大同‘이라는 개념을 빌어 국가와 인종, 사회와 가족의 장벽이 모두 무너진 세계를 그리고 있다.
결국 그는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청황조가 무너지고 나서야 다시 중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신해혁명은 만주족 정부를 몰아냈다는 점에서 한족 중심의 민족운동이기도 했지만, 중국 역사의 커다란 틀에서 보면 약 2,000년 넘는 황제 제도를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까지 또 한바탕 혼란기를 겪는다. 지역마다 군벌이 세력을 키웠으며, 여러 정권이 어지럽게 등장한다.
이런 과정 가운데 우리에게 익숙한 쑨원(孫文 1866~1925) 등은 공화제를 추진한다. 그러나 거꾸로 황제제도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이도 있었다. 위에 소개한 옌푸와 캉유웨이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사회의 개혁과 변화를 요구하던 인물들이 어째서 황제 제도의 부활을 바랐던 것일까? 게다가 둘은 모두 공교孔教운동, 즉 공자 섬기는 종교를 창시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사상적으로 전향한 것일까. 아니면 나이가 들어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했기 때문일까. 어떻게 보면 시대의 변화를 뒤쫓아 가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들이 변절하거나 생각이 바뀌었다기보다는 시대의 변화가 너무 빨랐던 것일지도. 한편으로는 황제 제도와 공자의 철학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세계관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을 보여주기도 한다. 황제 없는 천하와 공자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었다.
당대의 여러 지식인들처럼 이 둘의 영향을 받았던 루쉰은 새 시대는 새로운 인간과 함께 출현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관습과 생각의 변화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때로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새로운 시대는 그냥 오지 않는다. 새로운 변화는 새로운 인간의 출현과 함께 온다는 선언. 그가 <신청년新青年>이라는 잡지에 기고하며 문학계에 이름을 알렸다는 사실은 상당히 상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