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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Dec 23. 2020

싱어게인 30호, 넌 뭐니

도래할 새로운 해석을 기다리며

도래할 새로운 해석을 기다리며

초등학교 시절 TV를 끼고 살았다. 편성표를 줄줄 꿰고 있을 정도였는데, 그 시절 다들 그 정도는 상식이었다. 어느 날 오후였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날, 아마도 주말이었을 텐데 한 가수의 데뷔 무대였다. 음악 방송은 아니었고, 이런저런 주제를 다루면서 신인 가수를 소개하곤 했다. 다른 가수들도 있었을 텐데 그날 무대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무대는 정신없었고, 심사평은 대체로 혹평이었다. 10점 만점에 7.8점이니 좋은 성적은 아니었다. 승자독식의 연예계에서 얼마 버티지 못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날이 새로운 역사의 출현이었다는 것은 한참이 지나서나 알았다. 



20년이 넘어서도 그날의 무대가 기억나는 건 꽤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을 테다. 그땐 정말 몰랐지. 가사가 모두, 리듬 하나씩 몸에 새겨지리라고는. 1992년에는 뉴키즈온더블록의 내한 공연 중에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가수를 좋아하면 큰 사고를 당할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는 대중 음악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여느 친구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을 따라 하기도 했지만 나는 노래 한 구절, 춤 하나도 따라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난 알아요', 이 노래가 생생한 것은 그만큼 푹 젖어 있기 때문일 테다. 


요즘 싱어게인이라는 방송을 보고 있다. 저마다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빛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하나씩 무대를 펼치는 모습이 보기 좋다. 가끔은 감정을 이입하며 푹 빠져 노래를 듣기도 한다. 나도 무명인데 하면서... 며칠 전 30호와 63호의 무대가 화제다. 63호는 옛 노래를 새로운 감성으로 불렀고... 30호는 유희열의 평을 빌리면 '족보 없는 음악'을 보여줬다.



넷 상에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음악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혹자는 호극호를 갈리는 음악이라고도 하고. 대체 무엇이 화제였을까 관심을 갖다 나 역시 수 없이 노래를 반복해서 듣고 있다. 뭔가 이질적인 리듬과 구조, 쉽게 볼 수 없었던 보컬과 행동. 그리고 버릴 것 없는 가사까지.


원곡을 들어보니 가사만 빌려온 수준이 아닌가 싶다. 영 다른 노래가 되었다. '너의 말이 나는 그냥 웃긴다'라는 가사로 시작하며 심사하는 이들을 엿 먹이며 시작한 이 노래는 '여기까지 혼자 왔어 난, 손 내밀 때 어디 있었나'라는 가사로 경연 자체를 웃음거리고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못 이기는 척 나를 따라와 / 큰일이 나기 전에 내 말 들어'라며 마음을 흔들더니, 나중에는 '뱅~! 뱅~! 뱅~!' 묵직하게 한방씩 날린다.


심사위원들의 엇갈린 평은 좋은 이야깃거리가 된다. 누구는 느끼고 누구는 느끼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각자의 감상과 평가를 두고 많은 말이 오간다. 과연 그는 새로운 무언가를 던져준 것일까. 아니면 인디판에서는 익숙한 것을 TV 경연 프로그램에 들고 나와 화들짝 놀란 것일까. 아니면 30여 년 전 서태지 코스프레를 하는 걸까. 아직 나로서는 제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다만 이런 기묘함과 당혹감에 말을 보태는 것은 최근 고민하고 있는 주제와 관련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다. 역사를 보면 둔감한 사람들이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시대의 변화를 뒤늦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의 사태가 이미 벌어졌으나 한참이 지나서야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 경우가 있다. 얄궂게도 역사는 그런 사람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방탄소년단을 두고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아미'인 청소년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질문은 이렇다. 방탄이 상징하고 가져오는 변화는 크고 명확한데 이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발단은 어느 교수가 BTS에 대해 쓴 책이 시작이었다. 팬질로 논문을 쓰느냐 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까지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 궁금하기도 했다. 어쩌면 해석 이전에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적어도 내 주변의 사람들은 대체로 그런 것 같다.


어떤 변화가 누군가에게는 고개를 돌려 주의를 기울일 만큼 호기심을 주는 대상이라면, 누군가에게는 아무 관심을 줄 필요조차 없는 하찮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상 문제는 언젠가 낯선 해석이 도래할 때, 호기심조차 갖지 못했던 이들은 더 큰 당혹감을, 박탈감을 느낄 것이라는 점이다. 


'현실이 이론을 압도하고 있다.' 요즘 자주 하는 말이다. 눈 앞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온통 낯선 현재의 사태들을 해석할 말을 잘 찾지 못하겠다. 이론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리 거대한 이론인들, 그것은 한 시대의 역사적 유물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옛 글을 읽고, 낡은 사람들을 공부하다 보니 낡은 것들이 가진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예민한 감각이 필요하다. 낯선 것을 보고 휙 고개를 돌려버리지 않아야 한다. 거대한 변화가 닥칠 때 곧 썩어 문드러질 낡은 지식을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 시대의 규범이 다음 시대에도 통용되리라는 법은 없다. 새로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낡은 문제를 붙잡고 시대의 변화를 막아서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어쩌면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말도 틀렸는지 모른다. 이미 변화는 도래했는지도. 이미 이 변화 속에 사는 사람과 아직도 변화 속에 살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뉘겠지. 이 변화를 해석해줄 도래할 새로운 해석은 또 사람들을 솎아 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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