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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Dec 29. 2020

반역과 좌절

취투북 - <주자학과 양명학> #5

취투북 - <주자학과 양명학>에서 나눌 내용입니다.

https://zziraci.com/qutubook


저자는 사대부의 철학을 넓은 의미에서 송학이라 말하며 이를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본다. 첫째, 장재의 유물론, 즉 '기氣'의 철학. 둘째, 정이가 시작해서 주희가 완성한 객관유심론, 즉 '성즉리'의 철학. 셋째, 육상산이 주장한 주관유심론, 즉 '심즉리'의 철학. 왕양명은 셋째 심즉리의 계승자로 이야기된다.(274쪽) 그러나 이는 대략적인 구도만 이야기한 것으로, 저자는 주희에서 왕양명으로 이어지는 '내면주의의 전개'를 주장한다. 


졸업 논문 이래 지금까지 나의 입장은 종래의 일반적인 견해 - 양명학을 육왕학陸王學이라 부르고, 결국 그것이 육상산 학문의 단순한 계승이라고 파악하여 주자학과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형이상학으로 보는 입장을 부인하고, 양명학은 주자학의 전개라고 보는 시각으로 일관한 것이었다. 이는 나 스스로 올바른 견해라고 은근히 자부하고 있다. (528쪽)


저자 시마다 겐지는 1941년 교토대학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졸업논문 내용을 보완하여 <중국에서의 근대 사유의 좌절>이라는 책으로 출간한다. 역자 김석근은 시마다 겐지의 이 책을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와 더불어 일본 학계를 대표하는 동양학의 명저로 손꼽는다. 미조구치 유조의 <중국 전근대 사상의 굴절과 전개>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시마다 겐지의 영향을 받은 책이다.(342쪽)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루야마 마사오와 미조구치 유조의 책은 번역되었으나 시마다 겐지의 책은 번역되지 못했다.


미조구치 유조가 '굴절과 전개'라는 표현을 쓴 것은 시마다 겐지의 '좌절'에 대한 대응이었다.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 이어지는 내면주의의 전개가 양명 좌파의 종착역 이탁오에 이르러 '좌절'되고 말았다는 것이 그 내용이라고 알고 있다. 그의 책을 직접 읽지 못하기에 그 좌절이 유가 내부의 한계인지, 아니면 시대적 조건이라는 외부의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좌절이라는 표현은 사상사의 단절을 상상하게 만든다.


저자는 양명이 주창한 '양지'가 중국사 전체를 되돌아보게 만들었으며 나아가 유학 중심의 학술 조류를 크게 바꿀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유학'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학學' 그 자체, 즉 '중국의 학'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적어도 그런 기운의 단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원리는 송학이 형이상학적 원리이며 또한 명나라 시대의 여러 종류의 새로운 움직임들이 모두 그러했던 것처럼, 결국은 아무런 결과도 맺지 못하고 끝나버려서 이단과 유학의 통일은 역시 청나라 말기의 '제자백가학'의 부흥, '국학'의 성립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314쪽)


이탁오는 전환기의 인물이었다. 그는 1527년에 태어나 1602년에 죽었다. 왕양명이 죽기 한 해 전에 태어나, 황종희가 태어나기 8년 전에 죽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약 40여 년 뒤 명나라가 망한다. 동시대 사건 및 인물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임진전쟁이 일어났고, 서양이 항로를 통해 동양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탁오는 마테오 리치를 만나기도 했다. 콜럼버스, 마르틴 루터, 미켈란젤로, 몽테뉴 등과도 동시대 인물이다. 그는 '커다란 역사적 전환기(283쪽)'를 살았다.


그는 복건 천주泉州 사람으로, 천주는 당나라 이래 광동과 더불어 중국 최대의 무역항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세계 2대 무역항 중 하나"라고 할 정도였다. 서역과의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이슬람교도도 많았다. 10세기 초에 건립된 이슬람 사원 청정사清淨寺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283쪽) 그 역시 이슬람교도 집안사람이었다. 이런 배경은 그의 독특한 행보의 기원을 상상하게 한다. 


"사람들은 모두 공자를 성인이라 한다. 나도 역시 그를 성인이라 한다. …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 유학자들은 억측해서 그렇게 말하고, 부모와 스승은 그 말을 그대로 답습해서 말하고, 어린아이들은 철없이 그렇게 듣고서는 모두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하니 그런 생각을 깨뜨릴 수가 없었다. …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눈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역시 많은 사람들을 따를 뿐이며, 또 많은 사람들을 따라서 그를 성인이라 하고, 많은 사람들을 따라서 그를 섬길 뿐이다." (272~273쪽)


이탁오의 이 말은 그의 독특한 관점을 잘 보여준다. 자기 눈으로 세상사를 보겠다는 말이다. 그것이 설사 전통에 어긋나더라도, 이단이라 낙인찍히더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여기에 담겨 있다. 


그는 26세 향시에 합격한 이후 관직 생활을 하는데, 대체로 낮은 관직에 머물렀다. 54세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저술과 함께 사상가, 평론가로 활동한다. 나중에 그는 머리를 깎기까지 하는데, 승려도 아니고 유학자도 아닌 기괴한 모습이었다.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다.


"식견이 없는 무리들이 나를 큰 소리로 이단으로 지목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나도 나아가서 이단이 되어 그런 이름에 부합되기 위해서일 뿐이다." (287쪽)


74세 마성현 지불원에서 추방당하고 76세의 나이에 체포되어 북경의 감옥에서 자살한다. 그의 책은 청나라 시대까지 금서였으며, 지나치게 파격적이고 기괴한 행보 때문에 <명유학안>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290쪽)


이탁오의 <동심설童心說>이 유명한데, 그는 동심이 곧 진심真心이라 보았다. 허위와 가식을 벗어버려야 한다 주장했다. 허위와 가식, 즉 거짓이란 제 관점으로 보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앞서 성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전통적인 해석이 갖는 권위에 저항하는 인물이었다. 나아가 경전을 읽는 것이, 전통적인 독서가 동심을 해칠 수도 있다까지 이야기한다.(294쪽) 


그러다 보니 기존의 경전 중심의 독서에서 벗어나 다른 글을 읽으라는 이야기까지 한다. 잡극雜劇을 보아도 좋으며 <서상기>나 <수호전>과 같은 글을 보아도 좋다고 말한다. 명 중기에 이름을 떨친 복고주의자들을 비판하여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시라고 해서 반드시 옛날의 시여야 할 필요는 없으며, 문장이라고 반드시 선진 시대의 그것일 필요는 없다."(298쪽)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크게 문제 될 말인가 싶지만 당대의 평가는 참혹하다. <사고전서총목제요>에 실린 평가를 보자.


"이지의 책은 모두 인륜에 어긋나고 포악하며 오류에 가득 찬 것으로 성인을 그릇되다고 하고 법을 무시했다. 특히 공자를 배격하여 별도로 그 포폄을 세우고 무릇 천고의 선악을 전도시켜 그 위치를 바꾸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죄가 가히 목을 베고도 남음이 있다." (303쪽)


그는 불태워져야 할 책이라는 뜻에서 자신의 글을 묶어 <분서焚書>라 이름 붙였다. 역사를 서술하고는 숨겨둘 책이라는 뜻에서 <장서藏書>라고 이름 붙였다. 그 내용을 보면 <사고전서총목제요>가 그렇게 평가한 이유를 알 법하다. 


"서초의 패왕 항우는 치우를 계승함으로써 패업을 재흥시켰으며, 무제는 황제의 위업을 계승하여 그 규모를 확대했으니 모두 천고의 대성인이어서 가볍게 논의할 수가 없다." (310쪽)


전통적인 역사관과 다른 접근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패왕이나 무제를 '천고의 대성인'이라고까지 치켜세우고 있다. 그는 누구든지 역사의 시비를 논할 수 있다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도학자들의 미움을 크게 샀다. 


도학자들의 위선을 드러내고 발칙한 주장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그는 꽤 매력적인 인물이다. 저자의 평가처럼 그는 '유교의 반역자'였다. 그러나 그는 복잡한 인물이기도 했다. 다만 이 책에서 이런 부분까지 포괄적으로 살펴볼 수는 없다.


특히 그가 분명하게 노자의 영향 아래에서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정치를 역설하고 있는 것, 그리고 무단적 독재 정치가 장거정에 대한 찬미, 상인에 대한 변호, 허우와이루가 '사회적 다위니즘'의 기미가 보인다고 평한 강자와 부자에 대한 긍정 등을 주목해야겠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313쪽)


다만 저자는 이탁오의 그런 측면이 불교의 영향이 아닌가 추측하면서 글을 맺고 있다. 선禪의 리얼리즘, 진리를 위해 몸을 던지는 실존주의적 '의지력'이 영향을 주었으리라 짐작한다.(318쪽) 이 주제가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를 세세히 다루면 매우 두꺼운 책이 되었겠지. 저자가 밝히고 있듯 마지막 장, '유교의 반역자 이지' 이 부분은 다른 논문을 부록으로 실은 것이기에 상세한 내용을 기대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서양에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범유럽적 시야에서 서술했듯, 유교의 역사 혹은 주자학의 역사도 동아시아 전체를 포괄하여 서술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한다.(329쪽) 이 책에 저자가 마침표를 찍은 것이 1967년 4월, 벌써 반 세기가 넘게 지났다. 한편 이 책이 우리말로 처음 번역된 것이 1986년, 2020년 올해 10월 다시 재발간되었다. 그러나 저자가 이야기한 것과 같은 식의 접근은 여전히 요원한 듯하기도 하다. 


https://youtu.be/ZRZbPDca1nM




* 2021년 1월부터는 도올의 <노자가 옳았다>를 읽습니다.

https://zziraci.com/qutubook/lao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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