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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l 04. 2021

밤이면 밤마다 우린 고전을 읽었고

1. 난 인싸가 아닌데


2021년 2월 16일. 클럽하우스에 가입한 날짜이다. 어느 날 오후 쑤욱 빨려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새로운 SNS가 출현했다고 사방팔방 시끄러운 상황이었다. 사실 조금 갈등했다. 해가 바뀌면서 몇 년간 이용했던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삶을 번잡하게 하지는 않을까? 그래도 시대에 뒤쳐지면 안 되지. 여러 생각이 엇갈리다 그냥 어플을 설치해보자는 식으로 시작했고 어느새 대학시절 선배를 만나 수다를 떨고 있더라.


캐나다에 사는 그와 동시간에 소통할 수 있다는 게 재미있었다. 그는 나에게 유튜브 채널 개설을 권하기도 했었는데, 클럽하우스에서도 이것저것 해보라고 권해주었다. 말이 씨가 되어서일까? 무엇을 해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낯선 사람과 만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저 옛날 피씨 통신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생각났다고 할까? 무작정 부딪혀보기로 했다.


그러나 시작은 참담했다. 방을 열어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프로필을 꾸미는 것도 힘들었다. 뭔가 멋있는 걸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른바 '인싸의 놀이터'라는 말도 좌절감을 더했다. 맞아, 나는 인싸가 아니지. 둘러보니 재주있는 인물들이 여럿 있었다. 끝말잇기 방, 노래하는 방, 상담방 등등. 나는 재미와는 영 거리가 먼 사람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 



2. 버스킹도 하는데 뭐


해가 바뀌면서 <관종의 시대>라는 책을 샀다. 나름의 막막한 상황에서 벗어나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오래도록 인문학을 공부했는데, 뭔가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도권 학계를 손가락질하면서 학위를 마치지도 못했다. 그나마 끙끙대며 책 하나를 번역했는데, 코로나로 출판이 기약 없이 멀어졌다. 스스로를 무엇하는 사람이라 설명해야 할까. 무엇보다 생계가 막막했다.


전국 도서관 사서들에게 메일을 보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결국은 답장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메일이 공개된 곳은 메일을 보내고, 없으면 전화해서 담당자 연락처를 받았다. 이러저러한 것을 강의할 수 있습니다 하는 식으로 강의 제안서를 보냈다. 지금도 한 자 한 자 쓰는 것이 왜 그리 힘들었는지, 나를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왜 그리 힘든 일인지 잘 모르겠다.


스스로를 내보이는 것이, 날 좀 봐 주소하는 식의 호소가 어떤 자괴감을 낳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잘 팔리지 않는 상품을 내어야 한다는 부끄럼 때문일까. 유튜브를 처음 시작할 때, 시선을 어디 두어야 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몰랐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서 혼자 뻘짓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수 없이 들었다.


낯선 사람을 만나야지, 새로운 만남을 찾아야지. 거리에서 제 목소리를 내고 있으면 누구라도 들어주지 않을까? 버스킹 하는 마음으로 해보자 생각했다. 혼자라도 유익한 시간을 만들어야지. 다시 읽고 싶은 책을 꼽아 소리 내어 읽어보기로 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책을 읽자. 나는 여전히 글에 힘이 있다고 믿는다. 문자를 소리 내어 읽는 것에 마치 주술과 같은 신비한 힘이 있다고. 



3. 내딛지 않으면 어떻게 길을 찾을 것인가


<루쉰독본>을 선택했다.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갈팡질팡하는 데는 루쉰의 글이 재격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희망이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있다던 루쉰의 말이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땅 위에 길과 같다고. 사람들이 다녀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을 곱씹고 싶었다. 매일 밤 루쉰의 글을 읽었다. 책 한 권을 다 읽는 것이 목표였다. 루쉰의 글을 꼭꼭 십어먹고 싶기도 했다.


루쉰의 저 말은 <장자>에서 빌려온 것이 분명하다.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 길이란 사람들이 다녀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 <루쉰독본>을 읽고는 <장자>를 집었다. 아름다운 글을 읽고 싶지 않았다. 그냥 멋진 글을 읽자면 다른 좋은 책이 있었으리라. 단순한 낭독을 넘어 길을 찾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 어떻게든 한 발을 내디뎌보고 싶었다.


무작정 읽었다. 아무도 없어도 읽었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가능한 보지 않기 위해 스마트폰을 한쪽에 치워두기도 했다. 그래도 혼잣말에 그치지 말아야지. 몇몇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사랑하는 글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렇게 이야기 꽃을 피우는 날이 조금씩 늘었다.


진행방식이라 하자. 어떻게 시간을 이끌어야 하는지, 글을 읽고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노하우도 늘었다. 30분 정도 낭독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이 자리 잡았다. 낭독, 읽기 실력도 늘었다. 너무 빠르지 않게, 너무 느리지도 않게 또박또박. 매일의 읽기는 텍스트를 내 삶에 새겨 놓으려는 몸부림이자, 새로운 만남을 부르는 손짓이었다.



4. 대한민국은 10시 30분


꾸준한 참여자가 늘었다. 흥미롭게도 서로 사는 곳이 달랐다. 중국과 일본, 프랑스와 스위스, 독일, 게다가 샌디에이고에 계신 분까지. 대한민국 시간 10시 30분, 중국은 9시 30분 유럽은 오후 시간이고 미주는 새벽시간이다. 한국에서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지만 어디서는 저녁을 마련하기 전, 하루의 중간 시간이고, 또 어디서는 도시락을 싸며 출근을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밤밤고전'이라 이름 붙였지만 실상과는 영 다른 셈이다. 한국에 있는 사람에게나 밤에 읽는 고전이지, 누구에게는 한낮에 읽는 고전이고 누구에게는 새벽에 읽는 고전이다. 그래도 '밤밤고전'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밤과 고전이 잘 맞는 까닭이다. 잠시 소란스러운 일상에서 벗어나 옛 글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 한적하고 나직하게 글을 빗대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기술의 발달은 만남의 양상도 바꾸었다. 세계 각지에서 약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매일 모인다. 곁다리로 세계 다른 곳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솔솔하다. 사는 곳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니 모이는 것이 더 즐겁다. 같은 글을 다르게 읽을 수 있는 다양한 갈래길을 이렇게 자연스레 만난다. 차이의 즐거움이야 말로 골방의 독서에서 느낄 수 없는 새로운 감각일 테다.



5. 글며드는 삶


음성 SNS의 장점은 침묵과 참여가 자유롭다는 점이다. 누구는 목소리로 참여하고 누구는 듣기만 한다. 때로는 켜놓고 다른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밤 시간이라 켜놓고 잠드는 일도 있다. 다른 강도의 참여는 책과 배움에 대한 여러 질문을 만들어낸다. 늘 모두가 동일한 강도로 책과 지식에 달려들어야 하는 걸까. 선생과 학생이 아니라 구경꾼의 자리는 없을까?


배움을 삶으로! 오래도록 이 강령에 매달렸다. 삶이 되지 않는 지식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일상, 혹은 '현생'이란 버겁다. 버거운 삶에 배움을 끼워넣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배움에 전력으로 투신하라는 것은 지식인의 생활 강령을 무작정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그냥 배움에 가까운 삶이면 어떨까. 너무 진지하고 딱딱하지 않게. 클래식 공연장을 찾는 삶이 있지만, 식탁 옆 클래식 라디오 방송을 듣는 삶도 있는 것처럼.


지식은 동경을 낳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책은 경전처럼 숭배받기도 하고, 어떤 지식인은 마치 성인처럼 떠받을여진다. 지나친 동경과 숭배, 존경, 선망은 종교적 소비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고이 떠받들여 읽히지 않는 먼지 앉은 낡은 경전처럼. 그보다 글이 스며드는 삶이 더 낫지 않을까. 삶에 스며드는 지식, 삶에 스며드는 옛이야기들. 너무 멀리서 삶의 풍요로움을 찾지 말아야지.


매일 진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진행하니 드나듦이 있어도 상관없다. 오늘이 아니라 내일도 있고, 이번 주가 아니면 다음 주도 있다. 가능한 부담되지 않게. 글이 삶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일상과 만나야 한다. 특별한 시간의 특별한 활동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매일의 리듬. 꼭 책상에 각 잡고 앉아 두 눈을 부릅뜨고 읽지 않아도 좋다. 귀로 읽고 일상으로 읽는 법도 있으니.



6. 밤이면 밤마다 


루쉰 문집과 <장자>를 번갈아 읽다가 5월과 6월에는 <사기>를 읽었다. 춘추전국시대 여러 인물을 만났다. 우정과 배신, 탐욕과 복수, 신의와 암투 등등. 처음에는 낯설고 어지러웠던 책이 나중에는 떠나보내기 못내 아쉬운 글이 되었다. 소박하게 책거리를 하면서 모두 <사기>와 사마천과 얼마간 더 친해졌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사기>, 그리고 사마천과의 다음 만남은 조금 미루자. 7월부터는 루쉰을 다시 만날 예정이다. 루쉰 문집을 읽고 이어서 8월 중에는 잡문을 읽는다. 루쉰의 글은 또 얼마나 우리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줄까. 길고 짧은 그의 소설을 읽는 데는 또 다른 식의 방법이 필요할 테다. 새로운 글과 새로운 작가에 맞는 새로운 리듬을 발견해야지.


https://zziraci.com/daldal/2107


루쉰은 정확히 100여 년 전 사람이다. 그는 시대의 변화를 채찍질했고, 낡은 전통을 끊어내길 바랐다. 그는 혁명의 우상이 되기도 했고, 20세기의 성인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그러나 번다한 배경 지식을 접어두고 루쉰의 글을 만나보려 한다. 고전이란 늘 새롭게 읽혀야 한다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해석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소박한 믿음을 가지고 읽어보련다.


늘 그렇듯 클럽하우스를 중심으로 진행한다. 밤에 귀가 심심한 사람은 놀러 오기를. 차이나리터러시 클럽을 통해 진행 소식을 받아볼 수 있다. 유튜브 채널 취투부에서도 매일 중계중이다. 부족한 중계실력도 조금씩 나아지겠지.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을 정리 해 보니, 5월과 6월 총 38번의 만남이 있었다. 평균 1시간 30분이 넘으니 50시간이 훌쩍 넘는다.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5z5qgRR7h563Oc5zTK3JJf8MpBfIqIQg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다. 길고 두터운 인연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에 얽힌 글을 읽어서 그럴까? 이렇게 말해도 될 듯하다. 밤이면 밤마다 우리는 고전을 읽었고, 함께 만리장성을 쌓았다. 루쉰을 읽으며 또 긴 장벽을 쌓아야지. 더 많은 이야기들과 더 많은 인연, 더 많은 새로운 배움이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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