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유란(1894~1990)은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말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청말에 태어나 전통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1905년, 중국은 과거제를 폐지한다. 결국 그는 대학에 입학하여 신식 학문을 배운다. 1912년에는 신해혁명이 일어나 황제 제도가 폐지되었다. 1919년 그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을 때 중국은 신문화운동이 한창이었다. 낡은 전통문화를 폐기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그의 <중국철학사>는 중국에도 철학이 있음을 증명하고자 애쓴 노력의 산물이었다. 전통 사상이 용도폐기당하는 상황에서 그는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전통 사상을 구제해 내고자 하였다. 그런 노력으로 전통사상은 철학이 시민권을 따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얼마간의 변화를 강요당하는 것이기도 했다. 과연 전통사상, 유가 도가 불가 등등을 '철학'이라 할 수 있을까?
커다란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은 이 책이 제목에서 말하고 있는 한정적이면서도 명확한 주제 때문이다. <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라는 제목은 철학이라는 거창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유학 내부로 눈을 돌리게 만든다. 그러나 문제의식은 공명하고 있다. 과거 전통사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저자가 17세기에 주목하는 이유는 동아시아의 질서가 새롭게 구축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 막부가 시작되는 상황이었으며, 중국은 이른바 명청 교체기였다. 새로운 체제의 등장과 새로운 국가의 출현. 이 가운에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대표되는, 흔히 양란兩亂이라 불리는 혼란기를 겪는다. 양국이 이렇게 변화하는 가운데 조선은 어떤 변화를 겪었는가?
요컨대 조선은 17세기에 이르러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험난한 상황 속에서 조선의 지식인 계층인 유학자들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만 했다. 그래서 체제교학인 주자학에 대한 문제의식이 싹터 '사상사적 전환'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가설하에 17세기의 학술이 주목받게 된 것이다. (30쪽)
한편 이는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위기 상황을 어떻게 대응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과도 맞닿아있다. 시대는 조금씩 다르지만 청과 조선은 모두 제국주의의 침탈을 경험했다. 아편전쟁은 천하의 중심을 자처하던 제국의 몰락을 예고하고 있었다. 조선 역시 안정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서양과의 만남은 적잖은 상처를 남겼고, 결국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른바 '망국'이라는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누구, 혹은 무엇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대두되었다. 이 '낡은' 사회의 원흉은 누구인가? '망국'에 이른 까닭은 무엇인가?
20세기 초반 식민지화되고 있던 한국에서는 자국의 유학사에 대한 엄격한 비판이 행해져, 조선왕조의 체제교학(국가의 학문)이었던 주자학과 유학자가 망국의 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간주되었다. (19쪽)
비판의 최전선에는 일본 학자들이 있었다. 이노우에 데츠지로, 마루야마 마사오 등은 자국이 어떻게 주자학을 극복하였고 근대에 편입될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하였다. 이를 거꾸로 말하면 이웃 나라들은 어떻게 낡은 사회에 머물러 있는가를 고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는 낡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계몽시킬 수 있다는 논리로 흐르기 마련이다.
주자학의 나라 조선은 그렇게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까? 조선에게 다른 운명은 없었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반주자학적 전통에 주목하게 된다. 나아가 이는 '실학', 이른바 내재적 근대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노력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식민지 상황은 제국주의 국가의 폭력의 결과이며, 근대의 싹을 짓밟고 유린했다고 볼 수 있다. 즉, 근대의 맹아, '실학'의 '좌절'로 볼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것인지를 되묻는다. "조선 유학사에 대한 연구는 '식민'이라는 배경에 의해 외부로부터 주어진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연구시점이 굴절될 수밖에 없었던 것"(13쪽)은 아닐까?
결론을 이야기하자. 저자는 윤휴, 박세당 등 반주자학자로 분류되었던 이들 역시 주자학적 세계 안에 있었던 이들이라 평가한다. 반대로 이들 반대편에 있었던 송시열 등도 보수적인 주자학 원리주의자는 아니라고 평가한다. 윤휴와 박세당은 주자의 언어로 주자학 내부의 모순을 드러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주자 개인의 학술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주자언론동이고>와 같은 저술은 그 연구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사실로부터 교훈을 얻었다기 보다 지금 필요한 교훈에 적합하도록 역사를 다시 읽은 것은 아니었을까?"(97쪽)
따라서 17세기 조선 유학사에 대한 서술은 새롭게 재고되어야 한다. 주자학 대 반주자학의 대립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주자학 내부의 전개로 읽어야 할 것이다. 이는 잘 알려져 있듯, 17세기 조선 유학자들이 오랑캐의 나라 청을 대신해 중화의 도통道統을 계승하고자 했다는 점 때문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20세기 연구의 성과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 역시 시대의 산물이라 본다.
"… 식민사관으로부터 탈피하려는 노력은 양날의 검이었다. 주자학에 도전한 인물이다 저작이 과도하게 주목받은 반면, 조선에서 가장 융성했던 주자학 방면에 대한 고찰이나 평가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39쪽)
"조선 유학사에 대한 '오해'는 시대의 산물입니다. 단순히 '잘못'으로 치부하고 망각해 버릴 대상이 아니라 연구하여 연원을 밝혀야 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러한 '오해'를 빚어낸 시대적 필연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한 시대 조류의 역사적 단계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식민사관'에 저항하며 분투했던 한 시대를 이제는 역사 속에서 편히 쉬게 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관점이 필요합니다."(316쪽, 한국어판 후기)
21세기의 연구는 21세기의 문제 설정 위에 서술되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과제는 말처럼 쉽지 않다. 무엇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 역시 20세기의 자장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20세기의 성과를 치밀하게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비판 없는 새로움이란 없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연구를 보면 대체로 조바심과 열등감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근대라는 시대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들, 여기에는 왜 우리는 여전히 낡은 세계에 머물러 있는가 하는 자기부정의 관점이 실리기 마련이다. 그 노력의 결과 근대를 달성하였는가? 그러나 또 하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근대는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이 두 가지 숙제의 어려움. 이중과제의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열등감의 해소에는 승리의 기억이 필요한 법이다. 20세기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면 21세기는 다를 테다. BTS, 기생충, 오스카 수상 따위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건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20세기적 과제에 매몰되어 정당하게 평가하고 뿌리 뽑지 못한 낡은 습속을 버려야 할 때도 되었다. 내가 종종 방문하는 유튜브 채널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빠 성 쓸래 엄마 성 쓸래, 당신의 선택은?" 해묵은 질문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 현재가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