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로 읽는 장자 - 제물론 2/2
가리킨 것을 가지고 가리킨 것이 가리키려던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보다는 가리키지 않는 것을 가지고 가리킨 것이 가리키려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낫지. 어떤 말을 가지고 말이 그 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다른 말을 가지고 말이 그 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나아. 세상의 모든 것이 똑같은 법. 정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정말 다른 것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할 거야.
옳은 건 옳은 거고,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거야. 길(道)은 사람이 다녀서 만들어지듯, 사물은 불려서 그런 거야. 어째서 그러냐고? 그렇다니 그런 거지. 어째서 그렇지 않냐고? 그렇지 않다니 그렇지 않은 거야. 옳은 것도 있고, 옳지 않은 것도 있듯, 그런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어. 그러나 모든 사물에는 그런 것, 옳은 것이 있기 마련이야. 그렇지 않은 사물은 없고, 옳지 않은 사물은 없어.
자, '여기'에 가느다란 풀줄기와 굵은 기둥, 못난이와 미인 서시를 예로 들어 보자. 기이하고 이상하겠지만 도道는 함께 하나로 보아. 나누는 것은 고정하는 것, 곧 통념을 따르는(成) 거고, 통념을 따르는 것은 망가뜨리는 거야. 통념을 따라 망가뜨리지 않으면 다시 함께 하나로 볼 수 있어. 오직 통달한 자만이 함께 하나로 볼 줄을 알지. 바로 '여기'에서 다른 마음이 일지 않고 그런대로 내버려 두자. 그런대로 내버려 두어 생기는 마음, 그 생기는 마음이란 함께 아우르는 것이고, 함께 아우러야 지혜를 얻을 수 있어. 지혜를 얻으면 도를 깨우친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그러니 '여기'에 있을 뿐, 어째서 그런지 알지 못하는 것을 '도'라고 해.
쓸데없이 정신을 힘들게 하면서 한 가지 주장에 몰두하지. 헌데 이전과 별 차이 없다는 건 모르고 있어. 이를 '조삼모사'라 해. 무슨 말이냐고? 이야기를 들어봐. 원숭이 사육사가 도토리를 주며 말했어. '아침엔 세 개 저녁엔 네 개다.'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지.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마.' 이번에 원숭이들이 모두 환호했어. 도토리 개수나 이로움이나 달라진 것은 없는데 성내고 기뻐하는 마음이 생겼잖아. 그러니 말에 휘둘리지 말로 바로 여기, 내 자리에서 시작해야 해.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성인은 옳고 그름의 다툼을 조화시키고 우주적 평등함에 쉰단다. 이것이 양행兩行, 옳고 그름을 모두 포괄하는 자리야.
옛날 사람은 말이야 깨우침이 지극한데 이르렀어. 어느 정도였냐고? '있음' 이전을 생각하였지. 지극히 훌륭했어. 더 말할 게 뭐 있을까. 그다음은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도 경계를 생각하지는 않았어. 그다음은 경계를 생각했지만 그래도 맞다 틀리다를 따지지는 않았지. 맞다 틀리다를 세세하게 따지니 '도'가 엉망이 되어 버린 거야. 도가 엉망이 되어 버려서 치우친 마음이 생겨났지. 생겨난 것과 엉망이 된 것은 무엇이며, 생겨나지도 않고 엉망이 되지도 않은 것은 무엇일까?
소문昭文의 거문고 연주로 예를 들어보자. 연주를 하자 생겨난 것이 있고 엉망이 된 것이 있지. 연주를 하지 않았다면 생겨난 것도 엉망이 된 것도 없었을 거야. 소문의 훌륭한 연주, 사광師曠의 추임새, 혜시의 논변. 이 셋의 깨우침은 거의 완벽하여 모두 완전하다고 할 수 있어. 그래서 죽을 때까지 그 좋아하는 것을 지켜가려 하겠지. 헌데 사람들과 달리 유별나게 그것을 좋아했잖아. 그것을 사람들에게 일러주려고 했어.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지 않는데도 일러주려고 한 거지. 그러니까 혜시는 어리석게도 견백론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고. 소문의 자식은 아버지의 거문고 줄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어. 죽을 때까지 생겨난 것, 즉 이룬 것(成)이 없겠지. 그런 것을 이루었다고 한다면 나 같은 사람도 이룬 게 있을 거야. 그런 것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면 그들이나 나 모두 이룬 게 없는 셈이야. 그래서 번쩍거리는 화려함을 성인은 피해. 바로 '여기'에서 다른 마음이 일지 않고 그런대로 내버려 두자. 이것을 '참된 지혜'라고 하는 거야.
지금 어떤 주장이 있다고 하자. 그것이 '이것이다'와 비슷한지, '이것이다'와 비슷하지 않은지 알 수 없다고 해. 비슷하거나 비슷하지 않거나 이 둘을 비슷하게 한다면 '저것이다'와 차이가 없을 거야. 그렇지만 한번 말해보자. '시작'이라는 것이 있어. 그러면 "'시작'이 아직 시작하지 않음"이 있겠지. 또 "'시작'이 아직 시작하지 않음"이 아직 시작하지 않음도 있겠지. '있음'이 있어. 그러면 '없음'이 있지' 또 "'없음'이 아직 생기기 이전"이 있을 거야. 그리고 "'없음'이 아직 생기기 이전"의 그 이전이 있겠지. 문득 '없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있음'과 '없음' 가운데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 아직 모르겠어. 지금 내가 말한 것이 있잖아. 그런데 내가 말한 것이 말한 게 있는지 말한 게 없는지 아직 모르겠어.
본디 '도'에는 구분이라는 것이 없었고, '말'에는 일정함이라는 것이 없었지. '이것이다'라는 말 때문에 나뉘게 되었어. 나뉨에 대해 말해보자. 이쪽과 저쪽, 인륜과 의리, 나눔과 말다툼, 힘겨룸과 힘싸움 이 여덟 가지가 있어. 이 세상 바깥의 일에 대해 성인은 그저 가만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지. 이 세상의 일에 대해 성인은 이야기할 뿐 의견을 밝히지 않아. 역사나 정치, 훌륭한 임금에 대해서 성인은 의견을 밝힐 뿐 말다툼을 하지 않아.
"나눈다고 하나 나누지 못하는 것이 있고, 말다툼 하나 말다툼하지 못하는 게 있다." 어째서 그럴까? 성인은 그저 마음에 두지만, 사람들은 말다툼을 하며 서로 옳음을 내보이려 하지.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 "말다툼하나 보지 못하는 게 있다."
참된 '도'는 무어라 부를 수가 없어. 참된 말다툼은 말로 하지 않지. 참된 사람다움은 사람다움 같지 않아. 참된 깨끗함은 겸손하지 않아. 참된 용기는 겁주지 않아. 도라고 말하면 도가 아니야. 말다툼을 해서 가리자고 하면 실패한다니까. 사람다움을 지킨다는 사람은 정작 그렇지 않아. 깨끗하다는 사람은 믿을 수 없어. 남을 겁주는 용맹은 쓸 데가 없어. 이 다섯 가지는 맞는 말인데, 부족한 구석이 있어. 그러니 알지 못하는 데 나아가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지극한 것이야.
누가 말로 하지 않은 말다툼을 알까. 말할 수 없는 도를 알까. 만약 안다는 사람이 있다면 우주를 품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 아무리 부어도 차지 않고, 아무리 퍼내어도 마르지 않을 테지. 그렇게 끝이 없지만 어째서 그런지는 몰라. 이것을 보광葆光, 가리어진 지혜라고 하자.
그래서 옛날에 요가 순에게 물었어. "내가 종, 회, 서오 이 세 곳을 정벌할 생각이다. 그런데 임금의 자리에 앉아서 이런 궁리를 하는 게 마음이 좀 캥기는구나. 어째서 그럴까." 순이 말했지. "세 곳은 꽉 막혀 있습니다. 수고롭게 정벌할 생각에 어찌 마음이 불편하십니까. 옛날에는 태양 10개가 한꺼번에 떴다고 하지요. 밝게 온 세상을 비추었답니다. 태양보다 더 나은 덕을 가진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설결이 왕예에게 물었어. '그대는 만물이 모두 같다는 것을 아시오?" "내 어찌 알겠나." "그대는 그대가 모른다는 것을 아시나?" "내 어찌 알겠나." "그럼 아무것도 알지 못하시나?" "내 어찌 알겠나.
그래도 한번 말해보지. 어찌 내가 안다고 말하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알겠는가. 어찌 내가 모른다고 한 것이 아는 것이 아님을 알겠는가. 또 내가 한번 그대에게 물어보세. 사람들은 습한데 자면 허리에 병이 생기고 한쪽 몸이 마비가 되어 죽기도 하는데, 미꾸리도 그런가? 나무에 올라가면 덜덜 떨리고 무서운데, 원숭이도 그런가? 사람과 미꾸리, 원숭이 이 가운데 올바른 터전이라는 게 있을까. 사람들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뜯지. 지네는 뱀을, 올빼미는 쥐를 좋아해. 이 가운데 올바른 식성이라는 게 있을까. 원숭이는 침팬지와, 사슴은 노루와, 미꾸리는 물고기와 어울려 지내지. 모장이나 려희는 사람들이 칭송하는 미인이야. 그러나 물고기가 그를 보면 깊이 숨고, 새가 그를 보면 높이 날고, 사슴이 그를 보면 재빨리 달아나. 이 가운데 누가 올바른 미모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라는 생각에서 시작하면 인의 같은 규범, 맞다 틀리다 하는 다툼 등이 번잡하고 어지럽게 일어나지. 그런데 어찌 내가 이것들을 다 헤아릴 수 있겠어."
설결이 말했어. "그대는 이로움이니 해로움이니를 모른다 하는데, 지극한 사람도 이로움이니 해로움이니를 모를까?" 왕예가 말했지. "지극한 사람은 신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온 세상이 불타더라도 더위를 느끼지 않고, 온 세상이 얼어붙어도 추위를 느끼지 않지. 벼락이 산을 깨뜨리고, 바람이 바다를 흔들어도 놀라지 않아. 이런 사람은 구름을 타고, 해와 달을 부리며 세상 밭을 노닐지. 죽음이니 삶이니 하는 것도 그에게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데, 이로움이니 해로움이니 하는 것 따위는 어떻겠어."
구작자가 장오자에게 물었어. "내가 선생님께 들은 말씀이 있네. 성인은 애쓰는 일이 없다고 해. 이익을 좇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지도 않아. 얻는다고 기뻐하지도 않고, 규범에 얽매이지도 않지. 말이 없으면서도 있는 듯하고, 말이 있는 듯하면서도 말이 없어. 티끌 같은 세속 바깥에서 노닌다지. 선생께서는 터무니없는 말이라 하셨지만, 나는 오묘한 도리를 이야기한 게 아닌가 싶어.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장오자가 말했어 "이는 황제도 듣고 아찔하게 여길 이야기라오. 그대의 스승 공구(孔丘, 공자)가 어찌 그것을 알겠나. 게다가 그대도 너무 서둘러 헤아리고 있구려. 마치 알을 보고 새벽을 알리는 닭을 떠올리고, 탄환을 보고 새 구이를 생각하는 것처럼. 내 그대를 위해 엉터리로 말해볼 테니 그대도 엉터리로 들어보게나.
해와 달과 함께하며, 우주를 옆에 끼고 있다면 어떨까? 우주와 꼭 맞으면서도 어지러이 흐린 상태로 내버려 두면서도 귀천을 따지지 않아. 보통 사람은 바지런하게 움직이나 성인은 어리숙하게 행동하지. 시대의 흐름에 함께하면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아. 그렇게 만물이 다 그렇게 성인과 함께 얽혀 살아간다네.
삶을 즐거워하는 것이 어리석은 게 아닌지 내 어찌 알 수 있을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어려서 집을 잃고서도 돌아갈 줄 모르는 게 아닌지 내 어찌 알겠나. 여희麗姬는 애艾 땅을 지키는 자의 딸이었지. 처음 진나라에 시집갈 때는 얼굴이며 소매가 모두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네. 헌데 궁궐에 이르러 왕과 잠자리를 함께하고, 맛난 음식을 먹게 되자 슬피 울었던 것을 후회했다지. 그러니 죽은 자들이 살고자 애쓰던 것을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내 어찌 알겠는가.
꿈에서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다가도 아침에 깨어나 문득 펑펑 울기도 하지. 꿈에서 펑펑 울다가도 아침에 깨어 아무렇지도 않게 사냥을 즐기러 나가기도 해. 꿈을 꿀 때는 그게 꿈인 줄 모르잖아. 꿈속에서 꿈을 꾸고 그 꿈을 점쳐보기도 하지. 꿈에서 깨어나서야 그것이 꿈인 줄 알아. 그러니 커다란 깨침이 있어야 커다란 꿈인 줄 아는 거라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깨어있다고 여기면서 똑똑한 체 한단 말야. 군주니 목동이니 하며 사람을 가르는데 어리석기 짝이 없지. 공구도 그대도 모두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내가 그대에게 꿈을 이야기하는 것, 이것도 꿈이지. 이런 걸 해괴한 이야기라 해. 만세 뒤라도 큰 성인을 만나 꿈에서 헤어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반가운 일이겠나."
나와 네가 말다툼한다 치자. 네가 나를 이기고 내가 너를 이지지 못했다면, 네가 정말 맞고 내가 정말 틀린 걸까? 내가 너를 이기고 네가 나를 이기지 못했다면, 내가 정말 맞고 네가 정말 틀린 걸까? 한쪽이 맞거나 한쪽이 틀린 걸까? 아니면 모두 맞거나 모두 틀린 걸까? 나와 네가 모두 알 수 없다면 다른 사람도 어리둥절 알 수 없겠지. 그럼 누가 이것을 판단하지?
너와 생각이 사람으로 판단하게 하면 어떨까. 너와 생각이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판단하겠어.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으로 판단하게 하면 어떨까.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판단하겠어. 나와 너,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으로 판단하게 하면 어떨까. 우리와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판단하겠어. 우리와 생각이 같은 사람으로 판단하게 하면 어떨까. 우리와 생각이 같은데 어떻게 판단하겠어. 그러니 너와 나, 또 누구든 모두 알 수 없는 거야.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맡기겠어?
하늘의 경계에 따르게 한다는 건 이런 말이야. 옳거나 옳지 않거나, 그렇거나 그렇지 않거나 따진다고 해. 옳은 것이 정말 옳다면, 옳지 않은 것과 다른 것은 따로 말다툼하고 따질 게 없을 거야. 그런 것이 정말 그렇다면, 그렇지 않은 것과 다른 것은 따로 말다툼하고 따질 게 없을 거야. 목소리 내어 서로 견주는 것은 서로 견주지 않은 것만 못하지. 하늘의 경계에 따르고 흐름에 맡겨두어. 이게 제대로 사는 길이지. 나이도 잊고, 도의도 잊으면 가 없는 세계로 나갈 수 있어. 그렇게 가 없는 세계에 살아보자구.
망량罔兩, 옅은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물었어. "잘 걷다가 갑자기 멈추기도 하고, 잘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서기도 하고. 어찌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요?" 그림자가 말했지. "내가 기대고 있는 게 있어 그렇겠지? 내가 기대고 있는 것 역시 기대고 있는 게 있어서 그럴 테고. 내가 기대고 있는 건 뱀의 껍질이나 매미의 날개 같은 건가 봐. 그러니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어찌 알겠는가?"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던 적이 있어.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였지. 맘껏 즐겁게 돌아다니며 자기가 장주인 줄 몰랐어. 문득 깨어나 보니 꾸벅꾸벅 조는 장주였다나.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 모르겠네. 장주와 나비는 분명 다른데 말야. 이것을 사물의 변화라고 해.
* 매주 목요일 메일을 통해 장자 번역을 나눕니다. 메일링을 신청해주세요. https://zziraci.com/mailing
* 번역문은 원문과 함께 편집하여 차후 <장자씨 헛소리도 잘하시네(가제)>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어볼 예정입니다. 우화의 형식을 살려 대화체로 옮겼고, 딱딱한 직역보다는 가능한 의미가 통하도록 옮겼습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사전구매 해주세요. https://zziraci.com/kuangrenzhuangz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