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픈옹달 Feb 15. 2022

침묵이 진실을 말할 때

셰익스피어 읽기 세미나 발제문 

주인공 햄릿은 불안한 정신의 소유자이다. 주변 인물들에 의해 '미쳤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다. 그 불안의 원인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아버지의 죽음, 그 자리를 꿰찬 삼촌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증오 때문이라 이야기된다. 그 관점에서 <햄릿>의 결말은, 독주와 독검이 오가는 피비린내 나는 검투의 현장은 복수를 완성하는 장소가 된다. 그러나 그런 평면적 독해로 충분할까? 만약 <햄릿>이 복수의 완성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면 독자-청자는 여기서 어떤 쾌감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어떤 허무를 만난다면? 복수를 '성취'했다기보다는 무언가를 '상실'했다면? 


햄릿은 유령을 만나 부왕 살해 사건의 전모에 대해 듣는다. 그는 유령과 만나기 이전부터 무언가 숨겨진 것이 있을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다. 유령은 말한다. "난 자다가 동생 손에 의하여 / 생명, 왕관, 왕비를 한꺼번에 빼앗겼고..."(65쪽) 문제는 이 셋 가운데 햄릿이 무엇에 심취해 있는가 하는 점이다. 클라우디우스를 향한 분노는 무엇 때문인가.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인가? 그가 왕좌를 차지했기 때문인가? 어머니를 범했기 때문인가? 


햄릿의 독백을 보건대 그는 어머니 거트루드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품고 있다. 햄릿은 클라우디우스와 거트루드의 관계를 '근친상간'으로 생각한다. "순 거짓 눈물의 소금기가 가시기도 전에 / 결혼했어. - 오, 최악의 속도로다! 그처럼 / 민첩하게 근친상간 침실로 내닫다니!"(46쪽)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읽어보면 과연 그가 분노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의문이 든다. 그는 일차적으로 누구에게 분노를 품고 있는가? 클라우디우스인가 거트루드인가? 


햄릿과 클라우디우스 그리고 거트루드 간의 갈등 관계는 또 다른 관계에서 비슷하게 재현된다. 바로 햄릿의 연인 오필리어와의 관계이다. 햄릿은 오필리어를 사랑하나 이 둘의 관계를 방해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오필리어의 아버지 폴로니우스이다. 폴로니우스는 햄릿이 미쳤다고 생각하며 햄릿과 오필리어가 서로 가까워지는 것을 반대한다. 이러한 욕망의 단절 혹은 제약은 햄릿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어머니 거트루드와의 관계를 방해하는 클라우디우스와 오필리어와의 관계를 방해하는 폴로니우스. 


작품 속에서 왕비 거트루드와 오필리어는 가깝게 묘사된다. 그런가 하면 클라우디우스와 폴로니우스는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묘사된다. 어머니 거트루드와 대면하는 상황에서 휘장 뒤에 숨어있는 자를 죽였을 때 햄릿은 그가 왕-클라우디우스가 아닌가 묻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죽인 것은 폴로니우스였다. 


이를 종합하면 햄릿은 욕망의 실현을 방해하는 이들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감정은 그 원인을 향하기보다는 다른 곳으로 왜곡되어 표현된다.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오필리어에 대한 냉담한 그의 태도를 보라. 거트루드와 오필리어를 함께 두고 읽을 수 있다면, '근친상간'이란 정확히 그 불행의 원인이 된다 이야기할 수 있다. 클라우디우스와 거트루드의 관계가 아닌, 햄릿과 거트루드의 관계에 있어서. 어머니에 대한 욕정, 비록 직접적으로 실현될 수는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 은밀한 욕망을 근원적으로 부정당해야 하는 상황에 햄릿은 저항하고 있는 셈이다. 근친상간의 욕망, 그 욕망의 좌절이 빚어낸 광기.


따라서 거트루드와 오필리어는 욕망의 대상인 동시에 증오의 대상이다. 이 왜곡된 감정은 햄릿을 더욱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트린다. 그는 계속 겉도는 언행을 펼칠 뿐이다. 이러한 점은 오필리어와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오필리어에게 매우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오필리어가 정표를 돌려주겠다고 했을 때 매몰찬 언행으로 대응한다. 그런가 하면 왕과 왕비에게 연극을 보이면서 그들의 태도를 엿보는 순간에는 오필리어에게 음탕한 말을 건네기도 한다. 이런 모순적 태도는 결국 오필리어를 미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연극-연기야 말로 이 왜곡된 욕망을 풀어내는 현장이다. 연극-연기는 <햄릿> 전체를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소재이다. 왕과 왕비, 폴로니우스 등은 햄릿의 광기가 무엇 때문인지 알기 위해 연기를 펼치기도 했다. 햄릿의 친구 로젠크랜츠와 길든스턴은 어떤가? 클라우디우스와 레어티스의 공모는? 무엇보다 햄릿이 극단을 초청하여 <쥐덫>이라는 작품을 보여주는 장면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왕의 표정을 살피고자 한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진중한 관찰자의 면모를 찾아볼 수 없다. 도리어 그는 오필리어를 희롱하며 왕과 왕비를 지켜본다. 그의 시선은 진실을 탐구하는 눈이라기보다는, 비밀을 염탐하는 상대의 비행을 엿보는 음험한 눈빛이라 할 수 있다. 훔쳐보기. 대관절 햄릿은 무엇을 보고 싶었을까.


햄릿과 짝을 이루는 호레이쇼를 보자. 그는 햄릿의 친구로 함께 비텐베르크에서 공부하는 인물이다. 그는 여러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수수께끼에 싸인 인물이다. 그의 출신은? 그는 왜 덴마크 궁정에 와 있나? 그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등등. 이러한 질문이 해소되기도 전에 그는 진실을 전달하며 막을 닫는 인물이 된다. 과연 그는 그의 말처럼 진실되게 모든 것을 전달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이는 그가 극적인 장치이기 때문일 테다. 작품을 읽는 내내, 나는 호레이쇼가 햄릿과 짝을 이루는 자가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햄릿은 시종일관 불안하나 호레이쇼는 시종일관 침착하다. 햄릿이 광기와 충동을 의미한다면, 호레이쇼는 이성과 합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가 진실, 사건의 전모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햄릿의 분열된 자아이기 때문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문제는 그가, 합리적인 이성의 눈으로 이 사건의 전모를 참되게 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연 가능할까? 우리는 호레이쇼의 눈으로 진실에 닿을 수 있을까? 


우습게도 햄릿은 검투장에서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적개심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복수는 끊임없이 미루어진다. 어머니 거트루드가 독주를 마시고 죽고, 레어티스가 독을 바른 칼날로 찔렀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클라우디우스를 찌른다. 과연 그것은 복수였을까? 우발적 행동이었을까? 도리어 모두가 죽고 난 뒤 햄릿은 홀로 남은 독배를 마시며 죽음을 자처한다. 그가 죽으며 남긴 마지막 말은 침묵에 대한 것이었다. '그 나머진 침묵이네.'(203쪽)


이렇게 햄릿, 광기 - 왜곡된 욕망은 사라진다. 침묵과 함께. 그러나 과연 소멸했다 말할 수 있을까? 불안한 정서의 소멸이 안정을 가져다주지 않는 것처럼, 햄릿의 죽음, 그리고 포틴브래스의 등장은 이야기를 매듭짓지 못한다. 도리어 독자-청자는 어떤 망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침묵, 모습을 감춘 광기-욕정이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하는. 바로 그것이 호레이쇼의 설명보다 햄릿의 침묵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일 테다. 



* 인용문 페이지 수는 민음사 최종철 역, 비극에디션 기준입니다. 도서정보는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aladin.kr/p/T4JbE 


* 우리실험자들 셰익스피어 읽기 세미나 발제문입니다.(링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