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헐적 옹달랩 소식
樊遲請學稼,子曰:「吾不如老農。」
번지가 농사일에 대해 물었다. "나는 늙은 농사꾼만 못해."
<논어>를 읽다 보면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제자를 만납니다. 번지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번지가 농사일을 묻자 공자는 알지 못한다고 답합니다. 그래도 모자랐는지 이어서 번지는 밭일에 대해 질문하지요. 공자의 답은 똑같습니다. 그런 건 농사꾼에게 가서 물어보라는 식입니다.
공자는 군자란 스스로 덕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군자에게는 영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라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공자는 번지가 나가자 이렇게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쪼잔한 녀석 같으니라구(小人哉,樊須也)"
공자 이래로 군자는 통치자 계층을, 소인은 피통치자 계층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통치자 계층의 자존심을 강조한 문장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예로부터 농사는 천하의 일 가운데 가장 큰 근본이라 했으나(農者天下之大本), 정작 공자는 농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공자를 두고 오곡도 구분 못한다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논어>를 수 차례 읽으면서 이 문장은 쉬이 지나치는 문장이었습니다. 별로 읽어낼 것이 없다 생각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한 사건을 경험하며 이 문장을 곱씹어 볼 수밖에 없었어요. 정치의 계절에 벌어지는 여러 사건 가운데 한 소식이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저는 서강대 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뜬금없이 이 사실을 밝히는 이유는 아래 이어질 실명 비판을 위함입니다.
며칠 전 대선 후보자 안철수가 삼고초려 끝에 철학자 최진석을 선대위원장으로 모셨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은 철학과에서 수학하면서 최진석 선생께 배웠기 때문입니다. 십여 년 전 일이고, 졸업 후 찾아간 일도 없었습니다. 겉도는 학교 생활을 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그래도 옛 인연이 있어 그냥 지나칠 수 없더군요.
여러 생각이 복잡하게 스쳤습니다. 처음에는 피식 웃음이 났다가, 문득 어떻게 벌어진 일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결국 '절망'이란 단어만 남았습니다. 무엇 때문일까. 그 대선 후보를 지지하지 않기 때문일까. 노장철학의 대가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일까. 나를 붙들어 매었던 것은 정치인과 철학자의 만남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우연히도 그 기사를 읽은 날 아이들에게 들려줄 삼고초려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별 근거지도 마련하지 못한 유비가 와룡선생을 찾아가 삼고초려 끝에 그를 모셨다고. 그가 바로 삼국지에서 가장 똑똑한 인물 제갈량이었다고. 훗날 유비는 그 만남을 수어지교라 했는데 과연 安의 선택도 그럴 수 있을까. 결론을 우선 이야기하면 결코 그렇지는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철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오래도록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철학을 공부했으면서도 정작 그 효용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도 않았고, 이 사회를 좋게 바꾸는데도 별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삶에 위안을 주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철학 전공자로 이 학문의 효용에 대해 늘 고민중입니다. 특히 동양철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이 질문은 더욱 절실합니다. 낡고 시대에 뒤쳐진 지식을 다루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까지 더해져 곤혹스럽습니다.
오래도록 철학은 보편 학문으로 제법 콧대 높은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위세는 예전 같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때로는 정치가, 경제가, 과학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시대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의 질문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믿음도 있습니다. 저도 그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위험하게 한걸음 크게 내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사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하는 것이지요.
철학자에게 지혜를 기대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동양 철학자에게는 또 다른 덕목이 기대되곤 합니다. 보다 윤리적이고, 신비로울 것 같은. '영성'이라 불릴만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강의 현장의 질의응답 시간에 인생상담을 요구받기도 합니다. 뭐 특별한 혜안, 통찰, 영감 따위가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위로를 주리라는.
그러나 철학도 하나의 전공 지식입니다. 그가 남보다 더 훌륭한 삶을 살 것이라는 기대는 종종, 아니 대체로 배신당하기 쉽습니다. 빼어난 물리학자가 계란 하나 제대로 삶지 못하는 일이 있는 것처럼, 철학자가 남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마련입니다. 삶이 고통일 때, 철학자를 찾아가기보다는 상담사를, 혹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여 서양철학 전공자보다 동양철학 전공자가 더 지혜롭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노장철학 전공자라고 국가와 사회, 나아가 세계와 문명에 더 깊은 성찰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닙니다. 철학자가 더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고대의 철학자들은 여럿 있습니다. 플라톤은 노골적으로 철인정치를 주장했고, 공자는 군자君子라는 새로운 통치자의 이상을 그렸습니다. 허나 이런 것은 순수한 이상, 이론의 세계에 불과합니다.
공자의 말을 떠올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군자가 군자의 일을 고민하는 미덕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철학자가 정치의 공간에 뛰어들고, 무속인이 정치에 간여한다는 소문이 드는 시절. 아무리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 하더라도 정치는 정치가의 손에 맡겨야 하지 않을까. 장삼이사, 누구나 정치에 대해 떠들고 참여할 수 있는 시대라 하더라도 그대들은 그대의 일을 하고 나는 나의 일을 하는 미덕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10여 년 전 석사학위 논문을 끝내고 제도권 학교와 연을 끊었습니다. 오가며 만난 선생 가운데는 그래도 학위 따라고 충고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박사 학위를 따야 운신의 폭이 더 넓어진다는 말이었습니다. 십 년이 넘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살갑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았겠지요. 이곳저곳에 명함 삼아 들이밀 수도 있을 테고.
당시 학위를 끝내고 이후 과정을 포기한 것은 '전문가'에 실망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철학 전공자에게 철학을 볼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날카로운 비판정신도, 깊고 절실한 고민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오래 살고 보아야 하는 법. 그 시절엔 철학 전공자에 그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철학 전공자로서의 역할을 생각합니다.
매일 <논어>를 읽으며 철학 전공자로서, <논어> 전문가로서 역할을 고민합니다. <논어>를 더욱 깊고 풍부하게 읽을 수 있도록, 공자를 더욱 생생하게 만날 수 있도록 다양한 해석과 정보를 제공하려 합니다. 때로는 제 관점을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자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논어>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논어>의 이상대로 사회가 굴러가야 한다고, 효제충신의 정신이 사회에 넘쳐흘러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논어>에서 무엇을 솎아내어야 할지 늘 고민입니다.
<논어>를 읽고 나누는 일, 그 밖의 다른 책을 읽고 나누는 일은 저에게 '철학'하기이며 동시에 일종의 '노동'입니다. 인문 노동자로서 매일 읽고 쓰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철학 전공자로서의 전문성과 진실함, 인문 노동자로서의 억척스러움과 근면성을 지켜나가고자 합니다. 철학자와 정치인의 결탁, 철학이 정치에 복무하는 시절 제 스스로 다짐한 일입니다.
끝으로 학위도 없이 무엇으로 전문성을 이야기할까 고민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여야겠습니다. 사실 별 뾰족한 수는 없습니다. 10년 넘게 한 분야에서 일했다면 전문가로 본다는 사회 통념을 들먹이는 수밖에. 꾸준히 말과 글로 증명하겠다고 다짐하는 수밖에. 아울러 오가다 저를 박사 학위자로 오해하는 분이 계셔 강조합니다. 저는 서강대 철학대학원 석사 졸업생입니다. 또한 철학 전공자이자 인문 노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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