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헐적 옹달랩 소식
頤自十七八讀論語,當時已曉文義。讀之愈久,但覺意味深長。
나는 열일고여덟살에 논어를 읽었다. 그때에도 이미 글의 뜻을 깨우쳤다. 그러나 읽을수록 그 의미가 깊고 넓다는 것을 알았다.
주희의 <논어서설>에 실린 글입니다. 주희는 정이의 글을 인용하여 <논어> 읽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생각해보면 어찌 단순히 <논어>에만 해당하는 일일까요. <논어> 뿐만 아니라 고전에는 두루 해당하는 말입니다. 고전이란 낡고 낡아서 그 의미를 쉬이 파악할 수 있는 책이지만 읽을수록 그 의미를 새롭게 곱씹게 되는 글입니다. 꼭꼭 씹어 읽으면 새로운 맛을 만나게 됩니다.
밤밤고전에서 <논어>를 읽으며 이 문장을 기억하는 것은 좀 새로운 만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익숙한 <논어> 문장을 새롭게 만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다른 번역 탓입니다. 이을호의 번역이 가진 장점이기도 하지요. 구수한 옛 우리말로 옮겼기 때문에 공자를 새롭게 만납니다. 공자의 말을 조금 더 가깝게 읽는다고 할까요.
이는 <논어> 자체의 힘이기도 합니다. 읽을수록 <논어>는 정감가는 책입니다. 우선 공자의 여러 감정이 묻어 있어요.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불행함,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 뜻대로 따르지 않는 제자들에 대한 답답함. 그러면서도 은근한 애정이 묻어납니다. 공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고, 옛 성인의 정치를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아가 제자들에 대한 기대를 잃지 않았습니다. 짧은 책에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습니다.
다정하다 말하는 것은 그만큼 여러 감정이 엉켜 있다는 말인 동시에, 공자와 그 제자들의 감정이 소박하게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논어>를 깊이 읽을수록, 공자의 철학이나 사상, 이상이나 이념 따위보다는 그 옛날 살았던 한 인물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문득 그 인격을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깐깐하고 고지식한, 그러나 외롭고도 쓸쓸한. 그 인격은 <논어>의 숱한 문장을 넘어 툭툭 말을 건네곤 합니다.
曰:「今之從政者何如?」子曰:「噫!斗筲之人,何足算也。」
(자공이) 묻기를 "지금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아! 보잘것없는 이들인데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연일 뉴스가 쏟아집니다. 대선을 앞두고 여러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는 탓입니다. 그 치열한 다툼을 흥미롭게 지켜보면서도 냉소가 깃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 꼭 드는 인물을 만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은 선비(士)에 대해 공자에게 질문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나아가 당대의 권력자들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지요. 깐깐한 공자씨는 그런 하찮은 이들에 대해 할 말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십분 동의하기는 힘듭니다. 공자의 시대야 군왕이 정해진 시기였고, 오늘날은 인민들이 권력을 쥔 시대인 까닭입니다. 민주民主라는 말이 그 권한과 책임을 인민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공동체의 지도자가 누가 되든, 그것은 오롯이 인민의 책임이겠지요. 시큰둥하게 남의 일처럼 구경꾼이 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매주 수요일 20대 청년들과 책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링크) 올해 첫 시작으로 정치와 언론이라는 주제로 책을 꼽아 읽습니다. <한국 정치의 결정적 순간들>과 <장면들> 두 권을 읽습니다. 지난 수요일 첫 만남 자리에서 두루두루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주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최근 회자되는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다행히 서로 정치적인 지향이 비슷해 논쟁으로 전개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까닭에 도리어 악역을 자처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 선명한 자기 입장을 가져야 하며, 이를 설명할 근거를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때론 반론을 제기하고, 의문을 던지고, 딴죽을 거는 역할을 해야겠지요. '토론'이란 그런 선명한 입장 차이에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일요일에는 청소년들과 만납니다. 인문논술(링크)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책을 읽었어요. 본디 고전이나 철학책을 읽고자 했지만 온라인에서 그런 밀도 있는 책을 읽기는 쉽지 않더군요. 보다 풍성한 감상을 위해 SF소설을 읽었습니다. 그래도 뻔한 책을 읽기는 싫었어요. 옥타비아 버틀러, 테드 창, 켄 리우, 최정화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백인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SF와는 다른 소설을 읽고 싶었기 때문이예요.
과학 기술은 늘 발전하지만, 문득 21세기 초엽을 사는 지금이야말로 고도의 기술 세례를 받는 시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기술은 앞으로도 더욱 발전한 것이고, 우리 삶을 더욱 바꾸어 놓을 테지만 그 진폭이 과거와 비교할 때 얼마나 클까 의문을 던져보는 것이지요. 사실 'SF소설=미래소설'이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21세기의 우리는 미래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부푼 기대를 품고 살지 않아요. 20세기에 막연한 동경을 꿈꾸었던 것과는 영 딴판이지요.
소수자적 관점에서 쓰인 SF 소설을 읽은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찬란한 찬사보다는 좀 다른 시선을 엿보고 싶었기 때문이예요. 옥타비아 버틀러는 흑인 여성의 관점에서, 테드 창과 켄 리우는 아시아계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에서 이야기합니다. 최정화는 비인간, 난민과 이주민의 입장에서 SF 소설을 전개하지요. 이런 관점은 우리의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을 재검토하게 합니다. 설령 까마득한 미래에도 여전히 오늘 우리의 문제가 반복되리라 경고하는 것이지요.
하여, 미래는 새로운 문제를 가져오지 않고 현재에 풀지 못한 문제를 반복하는데 머무르고 맙니다. 오늘 우리가 현재의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면 미래라고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지요. 이렇게 고전을 읽는 역설적 이유를 발견합니다. 인간은 결국 똑같은 질문을 붙들고 끙끙대며 조금이라도 나아가고자 애쓰는 존재인 것이지요.
일요일 청소년들과 책을 읽는 시간은 뒤늦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2021년 12월부터 읽은 책이 1월 중순에서야 마무리되었던 까닭이예요. 한 해 공부를 뒤늦게 정리하면서 1년 간 읽은 책을 훑어보았습니다. 정말 많은 책을 읽었어요. 쉬이 읽히지 않았던, 이른바 흑역사를 수놓은 책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책들도 나름 신선한 인연을 선물해 주지 않았을까요. 한해 동안 읽을 책을 헤아려보며 또 새로운 한해 만날 책을 헤아려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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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짧은 소식을 전합니다. 2월 부터는 활동에 대한 소식을 넘어 보다 알찬 글들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