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서당 : 장자명문선 3강
南郭子綦隱几而坐
남곽자기가 책상에 기대어 앉아 있었어.
仰天而噓嗒焉似喪其耦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것이 마치 넋을 잃은 것처럼 보였어.
顏成子游立侍乎前曰何居乎
옆에서 서 있던 안성자유가 말했지. "어찌 된 일인가요?
形固可使如槁木而心固可使如死灰乎
모습은 마치 마른 나무와 같고 마음은 마치 죽은 재와 같습니다.
今之隱几者非昔之隱几者也
지금 책상에 기대어 있는 사람은 어제 책상에 기대어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子綦曰偃不亦善乎而問之也
남곽자기가 말했지. "자유야, 좋은 질문이구나.
今者吾喪我汝知之乎
지금 나는 내 자신을 잃었는데 너는 그것을 알겠느냐?
女聞人籟而未聞地籟
너는 사람의 피리 소리는 들었어도 땅의 피리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겠지.
女聞地籟而未聞天籟夫
땅의 피리 소리를 들었다 하더라도 하늘의 피리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을 게다."
<제물론>은 남곽자기南郭子綦와 안성자유顔成子游의 대화로 시작한다. 이 둘의 이름을 두고 흥미로운 해석이 있다. 남곽南郭이란 바로 외진 성곽 남쪽을 의미하며, 반대로 안성顔成은 안성安城, 성 안의 안락한 공간을 의미한다는 거다. 성곽城郭이라고 할 때, 성城은 내성內城을 곽郭은 외곽外郭이라는 말처럼 내성을 둘러싼 외성外城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변두리에 사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가 스승으로, 중심지에 사는 신분이 높고 부유한 이를 제자로 설정했다는 말이 된다. 장자의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자유子游는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하나와 이름이 똑같은데, 남곽자기가 그의 이름을 '언偃'이라 한다. 공자의 제자 자유의 이름이 언언言偃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역시 노림수가 있는 이름 아닐까.
안성자유는 남곽자기가 낯설다. 어제와 달라진 모습, 뭔가를 잃은[喪] 모양이다. 마치 마른 나무[槁木] 같고 죽은 재[死灰]와 같단다. 생기를 잃은 모습을 뜻하는 고목사회槁木死灰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확실히 장자는 나무와 가깝다. <장자>를 잘 읽으려면 나무를 가까이하자. 남곽자기가 다른 사람이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제물론>의 시작을 여는 남곽자기와 안성자유의 우화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다만 맥락상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갈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도리어 '오상아吾喪我'라는 남곽자기의 말을 통해 <장자>는 자기 상실의 상황에 주목한다.
이어서 남곽자기는 인뢰人籟, 사람의 피리 소리와 지뢰地籟, 땅의 피리 소리 나아가 천뢰天籟, 하늘의 피리 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의 피리 소리란 사람이 피리를 불어 나는 소리를 뜻한다. 땅의 피리 소리는 바람이 불어 들리는 다양한 소리를 뜻한다. 하늘의 피리 소리란 무엇일까. <제물론>은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땅의 피리 소리를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바람이 숲 속 나무들의 다양한 구멍을 통과하며 여러 소리를 내듯, 하늘의 기운이 인간의 다양한 구멍을 통과하며 여러 지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미리 당겨 이야기하면 <장자 : 응제왕>에서는 칠규七竅,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일곱 구멍을 이야기한다. 얼굴에 나 있는 이 일곱 구멍을 통해 보고 듣고 먹고 숨쉰다.[視聽食息] 이 구멍은 지각知覺의 통로이자 생명의 통로이다. 거꾸로 말하면 이 구멍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구성되고 살아간다. 그러나 구멍은 구멍일 뿐이다. 하늘의 기운, 우주의 흐름이 그치면 어떻게 될까? 마치 피리가 아무 소리를 내지 못하듯, 바람이 멈춘 숲이 고요함에 빠지듯 적막寂寞만 남을 것이다. 대관절 '나'는 어디에 있는가?
喜怒哀樂慮嘆變慹姚佚啟態
희로애락, 근심걱정, 요사하고 변덕스런 갖가지 마음이 생겨나.
樂出虛蒸成菌
텅 빈 곳에서 음악이 나오듯, 습지에서 버섯이 피어나듯
日夜相代乎前而莫知其所萌
그렇게 매일 우리 앞에 여러 잡생각이 오가는데 어디서 튀어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已乎已乎旦暮得此其所由以生乎
그 원인을 찾아보는 일은 그만두자 그만두어. 아침저녁으로 여러 마음이 오가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일까?
非彼無我非我無所取
그런 마음이 없으면 내가 없겠지. 내가 없으면 그런 감정이 일어나지도 않을 테고.
是亦近矣而不知其所爲使
이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끔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악출허樂出虛 증성균蒸成菌, 텅 빈 곳에 소리가 울리듯 축축한 데서 버섯이 피어나듯. 여러 복잡한 마음도 마찬가지. 희노애락이라는 기본적인 감정을 두고, 유가는 중용을 잃었기 때문이라 말할 테다. 치우치지 않는 마음을 넘어, 이런 감정이 일어나기 이전[未發]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라고 말한다. 장자 역시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일까? 장자는 그런 감정의 탐구에 큰 힘을 들이지 않는 듯하다. 감정의 원인이 있겠지만 과연 그것을 샅샅이 밝혀낼 수 있을까. 아니, 그 원인을 밝혀낸다 한들 달라지는 게 있을까?
이호이호已乎已乎, 그만 두자 그만두어. 잡다한 감정이나 생각의 원인을 찾는 일을. 이를 싹 없애려는 짓을. 자고 일어나면 곰팡이가 피고, 버섯이 나타나며, 잡초가 자라듯 우리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 오늘은 이렇게 내일은 또 저렇게 다른 감정과 생각에 휘말리겠지. 다만 중요한 것은 그 잡다한 것들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또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오상아吾喪我, 나를 잃어버린 마음에는 이런 갖가지 감정들이 일지 않을 테다. 불 꺼진 재에 무엇이 피어날 수 있을까. 바짝 마른 나무에는 버섯이 필 수 없다. 그러니 축축한 마음을 갖지 말 것. 바짝 마른 마음. 그것은 어떤 의도와 기대, 희망, 욕망을 내버려 두고 담담히 내 감정을 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자> 속에 보이는 냉소와 현재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은 이런 데서 자기 상실의 자리에서 비롯되는 것일 테다.
物無非彼物無非是
모든 것을 '저것이다'라고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이것이다'라고도 할 수 있어.
自彼則不見自知則知之
'저것이다'라고 하면 알 수 없던 것도 '여기'에서 시작하면 알 수 있지.
故曰彼出於是是亦因彼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 "'저것이다'는 '이것이다'에서 나오고, '이것이다'도 '저것이다'에서 시작한다."
彼是方生之說也
'저것이다'와 '이것이다'가 함께 생겨난다는 말이야.
雖然方生方死方死方生
그런데 함께 생겨나는 것은 함께 사라지고, 함께 사라지는 것은 함께 생겨나지.
方可方不可方不可方可
옳다고 하면 옳지 않다는 것이 있고, 옳지 않다고 하면 옳다고 하는 것이 있어.
因是因非因非因是
맞다'에서 시작하는 것은 '틀리다'에서 시작하는 것과 같고, '틀리다'에서 시작하는 것은 '맞다'에서 시작하는 것과 같아.
是以聖人不由而照之于天
그래서 성인은 그렇게 하지 않아. 다만 하늘에 비춰볼 뿐이야.
<제물론>에는 다양한 개념의 짝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시비是非가 대표적이다. 옳다는 것과 그르다는 것. 이 둘은 늘 함께 있다. 그것뿐인가. 피시彼是,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지칭도 그렇다. 가불가可不可, 맞다 틀리다 역시 마찬가지. 이렇게 여러 가치들이 함께 생겨난다[方生].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생겨난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생겨난다는 것이 있으니 사라진다는 게 있다.[方生方死] 하여, 이런 가치들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된다. 무엇을 부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긍정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문제화해야 한다는 역설이랄까. 사라지게 하는 것은 생겨나게 하는 것과 같다.[方死方生] 없애려고 하니 그것이 있어져 버리고 [有/無], 허물어뜨리려니 그것이 더욱 견고하다.[成/毁] 생각하지 마!라고 하니 더욱 생각나는 꼴.
결국 장자는 조지우천照之于天, 하늘에 비춰보라 이야기한다. 이것과 저것, 이쪽과 저쪽이 아닌 또 다른 자리. 그것을 다른 말로 '도道'라고 할 수 있을 테다. 이렇게 장자는 '도'라는 새로운 자리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졌기에 '도'는 더욱 이야기하기 힘든 것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라는 식으로 확정적으로 지칭되지 않는다. 결국 '도'는 무엇이 아님으로만 인식되며 이야기된다. 제한적 의미로 확정되지 않고자 하기 때문이다.
자기 상실과 '도'의 발견. 이 둘을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도'는 무엇이라는 가치판단에서 벗어나 있는 까닭이다. 가치판단을 벗어난 자리. 거기에는 '나'라는 주체 역시 서지 못한다. <장자 : 제물론>에 무수히 많은 질문이 담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무엇이라는 확정적 답은 '도'를 알도록 돕지 못한다. 도리어 '나'라는 또 다른 인식의 주체를 강화할 뿐이다. 그렇게 질문은 힘이 세다. 답은 방편이 되지만, 질문은 현재의 자리를 허물고 새로운 길로 끊임없이 나아가게 한다. 무섭게 몰아치는 질문 끝에 던지는 말은 다를 수밖에.
설결이 왕예에게 물었어. '그대는 만물이 모두 같다는 것을 아시오?" "내 어찌 알겠나." "그대는 그대가 모른다는 것을 아시나?" "내 어찌 알겠나." "그럼 아무것도 알지 못하시나?" "내 어찌 알겠나. 그래도 한번 말해보지. ..."
齧缺問乎王倪曰:「子知物之所同是乎?」曰:「吾惡乎知之!」「子知子之所不知邪?」曰:「吾惡乎知之!」「然則物無知邪?」曰:「吾惡乎知之!雖然,嘗試言之。..."
* 올라서당 :: <장자> 명문선 3강 자료입니다. 아래 링크에서 교안을 다운로드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