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서당 : 장자명문선 2강
小知不及大知小年不及大年
작은 앎은 커다란 앎에 미치지 못하고, 작은 삶은 커다란 삶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야.
奚以知其然也
어떻게 그런 걸 아느냐고?
朝菌不知晦朔蟪蛄不知春秋
아침에 피는 버섯은 그믐달을 알지 못하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 수 없어.
작은 삶이란 이런 거야.
楚之南有冥靈者
초나라 남쪽에 명령㝠靈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以五百歲爲春五百歲爲秋
오백 년을 봄으로 다시 오백 년을 가을로 산다고 해.
上古有大椿者
저 먼 옛날에는 대춘大椿이라는 나무가 있었데
以八千歲爲春八千歲爲秋
팔천 년을 봄으로 팔천 년을 가을로 살았다지.
而彭祖乃今以久特聞衆人匹之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팽조가 오래 살았다고 떠들어 대면서 그만큼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니
不亦悲乎
애닯지 않겠냐고.
장자는 작고 큰 것의 구분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장자가 말하는 작고 큰 것이란 서로 견주기 어려운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크고 무엇보다 작다고 하는 상대적 크고 작음이 아니다. 큰 것은 큰 것이고, 작은 것은 작은 것이다. 서로 견주어 비교할 수 없다는 점. 아침에 피었다 사라지는 버섯에게 어찌 그믐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니 컴컴한 밤이 있다는 사실조차 일러줄 수 없다. 매미에게 가을과 겨울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은 또 어떤가. 여름이면 집 앞 공원의 벚나무에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댄다. 매미는 우수수 꽃잎이 눈처럼 떨어진다는 날이 있다는 사실을 알까. 또 그렇게 풍성한 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 추위를 견뎌내는 때가 있다는 것을 알까. 아무리 일러 주어도 알 수 없을 테다.
전통사회에서는 한 갑자甲子를 살면 장수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두 갑자, 120년은 살아야 장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지금도 장자가 말하는 명령冥靈이나 대춘大椿의 삶을 헤아리기 버겁다. 500년을 봄과 가을로 삼았다니 천년을 한 살로 살았다는 셈이다. 팔 천년을 봄과 가을로 살았다는 건 또 어떤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삶이 있다. 그러니 하루살이가 인간의 삶을 헤아리지 못하듯 지극히 짧고 작은 인간의 삶이 헤아리지 못하는 것도 있을 테다. 그런데 사람들은 몇 백 년 살았다는 팽조를 동경한다. 고작 거기에 그치는 것은 너무 보잘것없지 않을까.
그러나 장자의 말을 되짚어 보자. 하루살이에게 보름과 그믐을 알려준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매미에게 꽃피는 봄과 낙엽 지는 가을, 그리고 눈 내리는 겨울을 보여준다면?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바다를 선물해줄 수 있을까?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폭력이다. 장자의 우화는 서로 다른 존재를 비교하려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작고 큰 것, 그것은 지각의 구분이다. 깨우침의 차이이다. 매미는 스스로를 매미라고 보기에 매미이다. 매미이기에 봄과 가을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봄과 가을을 모르기에 매미이다. <장자>의 시작을 곤과 붕의 이야기로 시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곤/붕이어서 천지를 가로지르며 구만리 창천으로 날아오른 게 아니다. 까마득한 세계를 엿보는 자, 드넓은 세상에 마음을 두는 자가 바로 곤과 붕이다. 존재가 인식을 제한하는 게 아니라, 인식이 존재를 바꾼다. 식견이 작아 소인이지, 소인이기에 식견이 작은 게 아니라는 말씀.
故夫知效一官行比一鄉
그러므로 지혜가 관직 하나에 어울릴 만한 사람, 품행이 고을 하나를 다스릴 만한 사람,
德合一君而徵一國者
군주 하나를 섬길 만한 덕을 갖춘 사람, 한 나라를 다스릴 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 따위는
其自視也亦若此矣
이처럼(메추라기처럼) 자신을 본단다.
若夫乘天地之正而御六氣之辯
만약 천지의 온전함을 타고, 우주의 기운을 움직이고,
以遊無窮者彼且惡乎待哉
끝없는 세계에 노닌다면 어떨까. 그러면 또 무엇에 의지하겠어.
故曰至人無己神人無功聖人無名
그러므로 이런 말이 있지. 지극한 사람에게는 자기가 상관없고, 신묘한 사람에게는 공적이 상관없고, 성인에게는 명성이 상관없다고.
<장자>는 흔히 자유自由를 노래한 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때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논의하지 않는다. 근대적 가치로서, 자유란 늘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서구의 자유란 왕과 귀족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으며 이는 곧 부르주아지의 소유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장자>의 자유란 무엇일까.
장자는 官/鄉/君/國, 즉 통치 권력과 거리를 두고자 한다. 통치권력은 생민生民을 도구화하여 이들을 사용하는데만 관심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도구로 격하되는 삶으로부터 장자는 벗어나고자 한다. 그를 방외方外의 사상가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반 사회적 사상가였다기 보다는, 반 국가적 사상가였다. 그는 궁극적으로 무대無待, 통치권력에 의존하지 않는 삶을 살고자 했다.
따라서 그가 이야기하는 '무기無己'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자기가 없다는 것은 자신의 사욕이 없다는 게 아니다. 도리어 뒤에 이어지는 功/名으로 구성되는 자기를 의미한다. 통치권력이 구성하는 위계질서로부터의 벗어남. 그것이 이야기하는 사회적 역할로부터 장자는 떨어지고자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작 그 시선으로만 자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자는 통치권력이 빚어내는 가치 기준, 그 가치 체계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今夫斄牛其大若垂天之雲
저 커다란 소는 어떻습니까? 하늘의 구름처럼 커다란 몸집을 가지고 있어요.
此能爲大矣而不能執鼠
크기는 합니다만 굼떠서 쥐새끼 한 마리도 못 잡습니다.
今子有大樹患其無用
큰 나무를 가지고 계신다 하셨지요. 그게 쓸모가 없어 걱정이라구요.
何不樹之於無何有之鄉廣莫之野
그것을 어느 것도 없는 가없이 막막한 들판에 심어둔다면 어떻겠습니까?
彷徨乎無爲其側逍遙乎寢臥其下
어슬렁거리며 그 곁을 돌아다녀도 좋고, 느긋하니 그 아래서 잠을 자도 좋습니다.
不夭斤斧物無害者
잘려 나갈 일도 없고, 해칠 사람도 없을 겁니다.
無所可用安所困苦哉
쓸모없다며 고민할 필요가 뭐 있을까요?
장자의 친구 혜시는 늘 장자가 걱정이었다. 저 터무니없는 친구를 어찌할까. 장자를 아껴주고 걱정하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자. 그러나 장자는 혜시의 걱정에 코웃음을 치곤 했다. 장자 입장에서는 혜시가 걱정이었을 테다. 혜시는 당시 위나라의 재상이었단다. 혜시는 장자를 두고 크기만 하고 쓸모 없다고 빈정거린다. 그러나 장자는 혜시에게 되묻는다. 터무니 없이 커서 쓸모 없는 게 아니라 큰 것을 쓸 줄 모르는 까닭이라고.
큰 것은 큰 것 대로의 쓰임이 있다. 까마득히 큰 소가 쥐를 잡지 못하듯, 장자는 자신의 말이 별 쓸모 없다고 손가락질받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 쓸모가 없지는 않을 테다. 큰 것은 큰 것을 아는 사람에게 쓸모가 있다. 장자의 말은 소수에게 허락된 우화이다. 장자의 우화를 두고 쥐를 잡지 못한다고, 이익을 얻지 못한다고 투덜거리지 말자. 장자는 그 말의 쓰임을 분명히 말한다.
혜시가 빈정거리며 쓸모 없다고 이야기한 그 나무를 장자는 영 이상한 곳에 심어 두자 말한다.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鄉 광막지야廣莫之野, 어느 것도 없는 가없이 막막한 들판. 대관절 그곳이 어디일까. 장자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곳은 도끼질[斤斧]이 없는 곳이다. 해칠 것이 없는 곳이다. 거꾸로 말하면 장자는 이 세상을 도끼질이 번뜩거리는 곳으로 보고 있다. 언제든 내 생명을 해치고 나를 베어갈 수 있는 곳. 이 폭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장자의 이상이다. 그곳에서 장자는 방황彷徨과 소요逍遙를 함께 이야기한다. 그곳은 길과 표지판이 사라진 곳이라 방황이 일상이다. 그러면서도 도끼질이 없어 느긋한 잠자리가 허락된 곳이다.
* 올라서당 :: <장자> 명문선 2강 자료입니다. 아래 링크에서 교안을 다운로드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