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성공한 덕후였다. 그는 주공周公을 사랑해 마지않았는데, 꿈에서도 만나기를 바랐단다. 과연 그는 주공을 꿈에서 보았을까. 공자 이후 주공이 성인의 반열에 올랐으니 자신의 꿈을 다른 식으로나마 성취한 셈이다.
한편 공자는 주공의 나라 주나라를 이상으로 삼았다. 주나라는 은나라 폭군을 몰아내고 세운 나라로, 주나라의 임금 무왕武王은 은나라와의 싸움을 준비하며 천년이 넘도록 회자되는 명언을 남겼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牝雞之晨 惟家之索)" 그러니까 요즘으로 치면 주나라는 꽤 빻은 임금의 나라였다.
그렇게 주나라는 은나라와의 결전에서 승리를 하고 천명天命의 수호자로 자처한다. 하늘[天]의 명령[命]에 따라 은나라를 정벌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암탉 토벌전을 슬로건 삼아 전장을 누빈 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어린 아들이 임금이 되니, 그가 성왕이다. 이때 성왕을 보필하여 주나라 초기의 안정을 꾀한 인물이 무왕의 동생 주공이라나. 그러나 이것은 먼 옛날의 이야기. 주나라의 성립이 대충 11세기 경이라 하니, 공자시대보다 약 600년 전의 일인 셈이다.
공자 시대는 이미 주나라의 체제가 거의 힘을 잃은 상황이었다. 각 제후들이 독자적으로 세력을 이루어 서로 다투는 상황에서 공자의 이상은 얼마나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을까. 공자의 낡고 고귀한 취향을 보며 코웃음 치는 이들도 분명 있었을 테다. 아니, 대다수가 그렇지 않았을까?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집, <논어>를 뒤져보아도 제자들은 주공에 대해 아무 말하지 않는다. 공자만 홀로 주공에 대한 사랑을 드러낼 뿐이다. 공자의 제자들에게도 주공은 케케묵은 낡은 인물로 비치지 않았을까.
그러나 공자의 명성이 높아지자, 주공은 공자에 앞서 성인의 가르침을 전한 인물로 자리 잡는다. 저 먼 옛날부터 전해 내려 온 '도'의 계보에 당당히 자리 잡는 것. 주공의 '도'를 공자가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운운. 그러나 이것은 상상의 역사일 뿐이다. 600여 년이 지난 공자의 시대에 주공의 무엇이 남아있었을까? 과연 정말 공자는 주공을 제대로 알고 사모한 것일까?
대부분의 덕질이 그렇듯 알기에 사랑하는 경우보다는 사랑하기 때문에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공자 역시 그렇지 않을까. 하나의 상상을 더하자. 공자가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 주공과 주나라의 명성을 이용했다면 어떨까. 나름의 근거, 거기에 유구한 전통을 더하기 위해 끌어 쓴 것이라면. 그럼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주공이 어떤 사람이었고. 주나라가 어떤 나라였기에 공자가 그토록 사모했는가 물어서는 소용이 없다. 반대로 공자가 덕심을 품었던 주공, 그가 동경한 주나라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아야 한다.
상상된 역사는 사실의 역사를 밀어내곤 한다. 공자와 주공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대의 철학사는 이 둘을 이었다. 공자의 철학이 주나라의 전통에서 출발한 것이라기보다는 새로운 해석과 실천에 근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꽤 유구한 연원을 갖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한편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을 공자가 한 적이 없음에도 그가 한 말이라고 여겨지곤 하는 건, 주나라를 사랑해 마지않았던 그의 탓이라고.
이러한 위험한 사랑이 빚어내는 상상의 역사는 오늘도 반복되고 있다. 바로 공자 동이족 설이 그것이다. 공자가 동이족의 후예라는 주장인데, 우리가 동이족의 후손이니 공자가 바로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는 말이다.
먼 옛날, 중국이라는 상상의 공간을 중심으로 동쪽의 사람들을 동이족, 동쪽 오랑캐라 불렀다. 그러나 이 동쪽은 매우 넓어서 오늘날 한반도 일대는 물론이거니와 산둥성 일대에서 오늘날 중국의 동북지역을 모두 포괄한다 할 수 있다. 과거 중국이라 상상되는 공간은 매우 작았고 동쪽으로 불릴 수 있는 지역은 보다 넓었다. 그러니 과연 공자가 동이족의 후예라 한들, 한반도에 갇혀 사는 사람들 만을 가리킨 말이라는 걸 어떻게 아나.
차라리 공자의 고향 취푸와 가까운 산둥성 북부, 혹은 동북지역에 살았던 사람과 더 가깝지 않았을까? 중원의 사람들과 치대고 겨루었던 그들이 진짜배기 동이족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더 동쪽, 해가 뜨는 왜국倭國에 사는 사람이 진짜배기 동이족이 아닐까? 공자 동이족 설에는 이런 식의 상상이 끼어들 틈이 없다. 공자가 동이족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동이족에게 공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민족이라는 상상의 민족이 과연 저 먼 옛날 동이족으로 불렸던 사람과 무슨 상관일까. 한반도의 사람들이 모두 단군 할아버지 자손이라는 말처럼 터무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느니, 국민국가의 출현과 함께 등장하느니 하는 식의 이야기는 도통 소용이 없다. 그저 이 민족에게 긴 뿌리를 붙여주고 싶은 것이다. 거기에 공자라는 멋진 장식을 얹으면 더 좋지.
따라서 이때의 공자의 모습은 새롭게 덧칠된 결과물이다. 중화中華를 중심으로 오랑캐를 배척하려 한 그의 문명관은 쉽게 잊힌다. 도리어 이 상상의 역사는 순수한 동이족의 사상, 공자의 철학을 망치고 훼손한 것으로 중국 철학사를 서술한다. 요즘 쓰이는 표현을 빌리면 중국 묻기 전, 깨끗한 공자의 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과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그것이 무엇일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한편 중국은 꿈을 꾸고 있다. 부강몽에 이어 중국몽을. 중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중국 역시 공자를 소환한다. 공자학원을 세워 중국의 언어와 문화, 사상을 세계 곳곳에 전하겠단다. 이제 공자는 중국의 유구한 전통과 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물론 이 역시 상상의 역사일 뿐이다. 무엇보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자를 부정하고 타도하는 혁명의 유산을 물려받은 나라가 아닌가. 공자는 줄곧 봉건의 잔재를 상징하는 인물로 배척되었다. 그러던 그를 중화민족의 사상가로 내세우는 꼴이란.
공자가 중국인이라는 주장도 헤아려보면 상상의 결과물이다. 저 먼 옛날에서 면면이 이어지는 중국의 역사가 있다고 상상해야 한다. 우리가 편의상 중국사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실제 역사는 한줄기로 졸졸졸 흐르지 않는다. 먼 옛날까지 포괄하는 하나의 커다란 중국을 상상해야만, 그런 상상에 동의할 때에만 공자는 중국인이라는 식의 표현이 가능할 테다. 중화인민공화국 국민으로서의 신분증을 공자는 달가워할까. 모를 일이다.
공자 동이족 설이 전해졌기 때문일까. 중국 방송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공자를 자기 나라 사람이라고 주장한다며 이를 성토하는 내용을 내보내기도 했다. 방송에 나온 한국인은 모든 한국인이 공자는 중국 사람이라 생각한다며 오해하지 말라고 그들을 다독여야 했다. 해당 방송의 클립이 올라온 한국 커뮤니티 게시판에서는 중국 묻은 건 그 무엇도 싫다는 식의 비아냥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쪽에서는 공자 동이족설이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 실상 비슷한 입장이다. 한쪽에서는 중국 묻은 공자를 싫다고 내치고, 한쪽에서는 중국 묻기 전 공자를 민족의 사상가로 내세우고.
동이족으로서의 공자와 중국인으로서의 공자, 어느 것이 맞느냐는 쓸데 없는 질문은 접어두자. 그보다 흥미로운 것은 두 상상 가운데 무엇이 승리할 것인가 하는 전망이다. 공자의 예를 보건대 성덕, 성공한 덕후란 별거 없다. 성공하면, 나름 빠방빠방 이름을 알릴 정도로 유명세를 타면 그가 상상한 것이 역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