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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May 24. 2022

<장자열전>, 장자는 누구인가

올라서당 - 장자 명문선 1강

莊子者蒙人也名周
周嘗爲蒙漆園吏
與梁惠王齊宣王同時

장자는 몽蒙 지역 사람으로 이름은 주周이다.
장주는 한때 몽 지역의 옻나무 동산의 관리였다.
양혜왕, 제선왕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 


노자와 장자는 각각 도교의 신선으로 추앙받는다. 노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장자는 남화노선南華老仙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이 둘이 각각 <서유기>와 <삼국지>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아는지. 


<서유기>는 잘 알려져 있듯 손오공과 삼장법사 주인공으로 하는 활극이다. 헌데 그 장난꾸러기 손오공을 꼼짝 못 하게 제압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석가여래와 태상노군. 석가여래가 오행산에 손오공을 가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으나, 태상노군이 손오공을 잡아 팔괘로에 넣어 불태워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한편 <삼국지>에서 남화노선의 활약은 더욱 중요하다. <삼국지>의 시작을 여는 황건적의 난[황건기의黃建起義]의 주동자 장각은 산에서 나물을 캐다 한 노인을 만나 천서天書를 얻는다. 그 책의 이름이 <태평요술서太平要術書>, 그 책을 준 사람이 바로 남화노선이다. 


이 두 이야기는 후대 사람들의 상상력이 빚어낸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와 장자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태상노군, 노자는 천궁을 어지럽히는 이 말썽꾸러기를 제압하는 인물이다. 반항하는 이를 찍어 누르고 안정을 찾으려 했다. 반면 남화노선, 장자는 혼란의 씨앗을 심어준다. 장자 때문에 제국이 무너졌다면 너무 결과론적인 해석일까? 하나는 어지러움을 제압했고, 하나는 어지러움을 일으켰다. 


후대의 일반적인 철학사는 <노자>와 <장자>를 함께 이야기한다. 그래서 노장학老莊學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이를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 노자를 제국의 철학자로, 장자를 반역의 철학자로 보는 입장도 있다는 점을 짚어두자. '국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노자>는 권력의 정점을 추구한다면 <장자>는 탈주와 해방을 추구한다. 하여 <노자>의 말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반면, <장자>의 말은 아래에서 아래로, 인식의 지층을 허물고 사회의 토대를 흔든다. 


흔히 <장자>를 반문명의 철학이라 주장하나 이는 틀린 말이다. 장자는 자연과 가까운 반문명의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 보였다면 권력의 속성, 남을 베어내고 자르는 폭력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칠원리漆園吏, 옻나무 동산의 관리였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잘리는 나무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는 나무는 물론 인간을 재목材木으로 삼는 폭력을 경계한다. 국가는 나무꾼과 같다. 인민을 베어가는 도끼질이 국가의 폭력이다. 양혜왕과 제선왕, 그들의 시대가 바로 이런 시대였다.





其著書十餘萬言大抵率寓言也
其言洸洋自恣以適己
故自王公大人不能器之

십여 만 자의 글을 남겼는데 대체로 우화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터무니없고 제멋대로여서
제후나 대부와 같은 이들에게 쓰일 수 없었다. 



<장자>는 무용無用의 철학이다. 장자는 무용지용無用之用, 쓸모 없음의 쓸모를 이야기한다. 국가에게 쓸모 없는 것이 나에게는 쓸모 있다. 자본에게 쓸모 없는 것이 삶에는 쓸모가 있다. 그런 면에서 그에게 제 멋대로 지껄이는 인물이라는 딱지가 붙은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는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의 장단에 맞춰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왕공대인王公大人은 적당한 쓸모를 지닌 도구[器]를 찾는데 혈안이었다. 그러나 장자는 이들의 눈밖에 있었다. 


모든 이를 위한 철학은 없다. 누구를 위한 철학인지, 무엇을 위한 철학인지를 물어야 한다. <장자>는 제멋대로인 이들을 위한 철학이다. 제 가치를 높이기 위한 이들을 위한 글이 아니다. 도리어 삶에 가격을 매기는 이들을 무시한다. 과감하게 가격표를 떼어내는 이들을 위한 이야기이다. 그에게 자유를 찾을 수 있다면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 무엇을 소유하기 위한 자유가 아니라, 소유되지 않기 위한 자유. 그래서 그의 글은 생각보다 멀리 있다.


광언狂言, 그의 말을 헛소리라고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즐겨이 받아들여야 한다. 정언正言이나 교훈教訓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하나의 또렷한 목표를 제시하지 않는다. 하나의 가치로 수렴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세우기보다 해체하는 데 열심이다. 망언망청妄言妄聽, 멋대로 말하니 멋대로 들으라. 장자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헌데 그 헛소리를 10여 만 자나 남겼단다. 그러나 오늘날 전해지는 <장자>는 약 6만 4천 여 자. 약 1/3이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다. 



千金重利卿相尊位也
子獨不見郊祭之犧牛乎
養食之數歲衣以文繡以入大廟
當是之時雖欲爲孤豚豈可得乎
子亟去無污我
我寧游戲污瀆之中自快
無爲有國者所羈終身不仕
以快吾志焉

귀한 재물을 가져왔고, 높은 재상 자리를 제안하는 구려.
헌데 교제郊祭에 바치는 희생 소를 보지 못했소?
여러 해 동안 잘 먹이고, 비단옷을 입혀서 태묘로 끌고 갑니다.
그때 혼자 나뒹구는 돼지를 바란들 어찌 그럴 수 있겠소?
나를 더럽히지 말고 썩 꺼지시오.
나는 이 지저분한 곳에서 멋대로 즐기며 살지언정,
나라를 가진 자에게 끌려다니지 않겠소.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고자 하오.


그런 장자를 품으려 한 인물이 있단다. 바로 초나라 위왕. 그는 사신을 보내 장자를 초빙한다. 많은 재물[千金]과 높은 지위[卿相]로 장자를 꾀고자 한다. 그러나 장자는 자신을 찾아온 사신에게 웃으며 위와 같이 말했다 한다. 제사에 바치는 소[犧牛] 같은 꼴은 되지 않겠단다. 그가 보기에 국가는 제의 공동체이다. 누군가를 희생으로 삼아 하나의 이념을 공유하는. 


그는 자신이 처한 자리가 말끔한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어떠리. 지저분한 곳[污瀆]에도 그 나름의 즐거움[游戲/自快]이 있다. 하나 주목해서 볼 것은 두 더러움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장자는 자신의 자리가 지저분하다 말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無污我] 말한다. 더러운 곳에 있는 자를 어떻게 더럽힐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역설을 잘 읽어야 한다. 장자가 자처하는 더려움이 무엇이고 장자가 꺼려하는 더러움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제임스 C. 스콧은 <농경의 배신>에서 국가의 탄생이 '길들이기domestication'과 함께 시작했다고 말한다.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는 고도의 길들이기의 산물이다. 작물을 길들였으며, 가축을 길들였다. 한편 생민生民을 길들였다. 그러나 장자는 저항하고 있다. 나라를 가진 자들에게 끌려다니지 않겠다![無爲有國者所羈] 길들여지지 않는 정신, 야만野蠻의 눈에서 장자를 읽어야 한다. 




* 올라서당 :: <장자> 명문선 1강 자료입니다. 아래 링크에서 교안을 다운로드 할 수 있습니다. 

https://zziraci.com/w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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