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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May 12. 2022

<중용>, 천 번 만 번 이라도

올라서당 고전명문선

子程子曰 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
中者 天下之正道 庸者 天下之定理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치우치지 않음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음을 '용'이라 한다. 
'중'은 천하의 바른 도리[正道]이며 '용'은 천하의 정한 이치[定理]이다.


공자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공리孔鯉. 아들 이름을 잉어[鯉]라고 지었던 것은, 아들이 태어났을 때 임금이 잉어를 선물로 주었기 때문이라나. 그러고 보면 옛사람은 이름을 짓는데 큰 공을 들이지 않았다. 공자의 이름 공구孔丘는 툭 튀어나온 머리 모양에서 지은 이름란다. 하튼, 잉어는 물고기 가운데 오래 살기로 유명한데 공자의 아들은 오래 살지 못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논어>를 보면 공자보다 한참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아들, 그러니까 공자의 손자를 두었는데 그가 바로 공급孔伋이다. 그는 자사子思라는 자字로 더 알려져 있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자사는 공자의 제자 증삼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찐 공자의 손자인 셈이다. 혈통으로 보아도 손자요, 학맥으로 보아도 손자니 말이다. 그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이 <중용>이다. 자사가 정말 <중용>을 지었을까? 개인적으로는 그저 하나의 전설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합리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가 별로 없는 까닭이다. 도리어 하나의 계통系統을 만들기 위해 지어낸 것이 아닐까. 


전설을 하나 덧붙이면 맹자는 자사를 사숙私淑, 그러니까 그 제자는 아니지만 자사를 스승으로 생각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공자 - 증삼 - 자사 - 맹자"로 이어지는 학문의 계보가 완성된다. 이 계보에 주목했던 것이 바로 주희였다. 주희는 이 네 사람을 이어 '도道'가 전해졌다 보았다. 따라서 각 인물을 대표하는 네 권의 책 : 공자의 <논어>, 증삼의 <대학>, 자사의 <중용>, 맹자의 <맹자>는 다른 경전보다 훨씬 주목해야 하는 책이 된다. 이 네 권의 책을 함께 묶어 '사서四書'라 한다. 그러니까 네 권의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단순히 개별적인 내용을 담은 네 권의 책을 함께 읽는다는 것이 아니라, 공자 이래로 면면히 이어지는 학문을 익힌다는 의미이다. 


주희[朱熹 1130-1200]가 '사서'를 중시하기 전에는 다섯 권의 경전, '오경五經'이 핵심이었다. 이 다섯 권의 경전은 <시詩>, <서書>, <역易>, <예기禮記>, <춘추春秋>이다. 한漢나라는 유학을 국가 철학으로 숭상하며 이 다섯 경전의 전문가를 두었는데, 이를 오경박사五經博士라 한다. 그러나 주희가 '사서'를 정리한 이후 '오경'은 상대적으로 덜 중시되었다. 그 결과 습관적으로 '사서'를 '오경' 앞에 두며 이야기하기에 이른다. '사서오경'이라는 식으로. 그것뿐인가. 다섯 권의 경전도 많다는 생각에, 둘을 버리고 '사서삼경'이라 일컫기도 한다. 


읽는 책이 달라지면 생각도 바뀌기 마련이다. 새로운 경전, '사서'를 중심으로 펼쳐진 철학을 '성리학性理學'이라 부른다. 이를 신유학新儒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영어 Neo-Confucianism을 번역한 말이다. 새롭다면 과연 무엇이 새로운 걸까. 우선은 새로운 철학적 개념을 사용한다. '성리학'의 '성性'이니 '리理'니 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성'은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며, '리'는 그 본성을 구현하는 우주적 법칙을 말한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인간의 본성은 모두 선한데[성선설性善說], 그것은 자연에 내재되어 있는 우주적 법칙과 같기 때문이다. 즉, 선한 본성대로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말.


'중용中庸'은 이 원칙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여기서 '중中'이란 가운데라는 뜻이 아니라, 딱 맞는 것을 말한다. 적중的中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과녁[的]을 맞히[中]듯 적합한 행동과 태도가 '중'이다. 그 상태를 변하지 않게 유지하는 것이 '용庸'이다. 그러나 이것이 멈춰있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용'에는 반복과 지속의 의미가 함께 있다. 마치 물이 끊이지 않고 흐르듯. 바로 '도'가 그렇단다. '도'는 늘 적합한 행동과 태도로 구현되나, 이는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다. 배움[學]이란 이를 익히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다. 




君子之道 辟如行遠必自邇 辟如登高必自卑

군자의 길이란, 비유하자면 먼 길을 떠날 때 반드시 가까운 데서 시작해야 하며, 높은 데 오를 때 반드시 낮은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博學之 審問之 慎思之 明辨之 篤行之
有弗學 學之弗能弗措也
有弗問 問之弗知弗措也
有弗思 思之弗得弗措也
有弗辨 辨之弗明弗措也
有弗行 行之弗篤弗措也
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

널리 배우라. 상세히 물어라. 곰곰이 생각하라. 분명히 판단하라. 착실히 행동하라. 
배우지 않는 것이 있겠지만, 배우고 할 수 없다면 그만두지 마라. 
듣지 않는 것이 있겠지만, 듣고 알지 못하면 그만두지 마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있겠지만, 생각하고 깨우치지 못하면 그만두지 마라. 
판단하지 않는 것이 있겠지만, 판단하고 명료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마라. 
행동하지 않는 것이 있겠지만, 행동하고 착실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마라.
다른 사람이 한 번에 할 수 있으면 나는 백 번 하겠고, 다른 사람이 열 번에 할 수 있으면 나는 천 번 하겠다. 


꾸준히 끊임없이. 유학자들이 강조한 공부의 미덕이다. 그들은 공부를 먼 길을 떠나는 데[行遠], 높은 산에 오르는 데[登高] 비유한다. 높고 먼 길이 눈앞에 있다. 바로 여기서 지금 한 걸음 떼어 떠나야 한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중용>에서 나온 사자성어가 바로 '등고자비登高自卑'라는 사자성어이다. 낮은 데서 시작해야 높은 데까지 올라갈 수 있다. 계단을 오르듯 차근차근. 실제로 중국 태산泰山 입구에도 비슷한 글귀가 적혀있다. 등고필자登高必自, 태산과 같은 높은 산에 오르더라도 바로 여기, 입구에서 시작해야 한단다.


나름 곱씹어 새겨볼 만한 말이기는 하지만 또 비유를 꼬아보면 재미있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제 발로 한 걸음씩 발을 떼어 산을 오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요즘이야 케이블 카를 타도 되는 게 아닌가? 꼭 그렇게 입구에서 시작해야 할까? 실제로 케이블카를 타고 태산 정상에까지 오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배움도 그렇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남이 깨치지 못하는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의 도움, 혹은 좋은 방법을 빌어 남보다 더 빨리 나가는 사람도 있다. 깨달음을 중시한 이들은 꾸준한 학습이 좋은 방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들어보았을 테다.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유학자가 꾸준한 수양, 점수를 중시했다면 선사禪師는 돈오, 깨우침을 중시 여겼다. 한편 훌륭한 선생 혹은 좋은 책을 통한 공부는 어떤가. 비전秘傳, 비밀스런[秘] 전승[傳]이 있다는 이야기. 그런 게 있지 않나, 어떤 책을 읽었더니 특별한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고. 무협지에만 나오는 건 아니다. 천기누설, 비법전수 따위가 붙은 것들은 남들이 모르는 비밀스런 길이 있다 말한다. 


누구의 말이 맞을까? 실상 중요한 것은 무엇이 맞고 틀리냐 하는 것보다는, 가치관의 문제이다. 어떤 방식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가? 꾸준하고도 착실한 우직함? 단번에 도약하는 예민함? 남들이 모르는 비밀스런 비법전수? <중용>의 저자는 하나의 길 밖에 없다 말한다. 무식하리만큼 꾸준하게. 남들이 한 번에 되면  백 번 하겠고, 열 번에 되면 천 번 하겠단다. 


후대의 유학자들은 우직함을 중시 여기며 다른 길을 '엽등獵等', 등급과 순서[等]를 건너뛴다[獵]며 비판했다. 차근차근 가야 할 길은 겅중겅중 건너뛰면 탈이 난다. 그들은 하나의 길만 있고, 나머지는 기행奇行이라 보았다. 그런가 하면 비법이니, 누설이니 하는 말도 코웃음 치며 무시했다. 왜냐하면 이미 자연은 그 꾸준한 운행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알아채는 자와 알아채지 못하는 자가 있을 뿐, 천지자연은 감추고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이렇게 <중용>은 성실하고 꾸준한 자연을 이야기한다. 자연은 배신하지 않는다. 해가 뜨고 지며, 달이 뜨고 지는 그 꾸준한 운행은 한 번도 그친 적이 없다. 단계를 건너뛴 적도 없고, 엉뚱한 예상치 못한 변화를 보이지도 않는다. <중용>의 저자는 말한다. 자연이 성실[誠]한 것처럼, 배우는 자도 성실해야 한다. 이는 배움의 덕목인 동시에, 자연의 이치를 체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 올라서당 - 고전명문선 4강 교안입니다.

https://zziraci.com/w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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