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무덤> 읽기 #2
大都不為順世和樂之音,動吭一呼,聞者興起,爭天拒俗,而精神复深感后世人心,綿延至于無已。雖未生以前,解脫而后,或以其聲為不足听;若其生活兩間,居天然之掌握,輾轉而未得脫者,則使之聞之,固聲之最雄桀偉美者矣。然以語平和之民,則言者滋懼。
대체로 세상에 순응하는 화락和樂의 소리를 내지 않았고 목청껏 한번 소리 지르면 듣는 사람들은 흥분하여 하늘과 싸우고 세속을 거부했으니, 이들의 정신은 후세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켜 끝없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해탈한 이후라면 이 시인들의 소리는 들을 필요가 없겠지만, 만약 천지지간에서 생활하고 자연의 속박 속에서 살며 전전긍긍해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 그 소리를 듣고 나면 진실로 소리 중에서 가장 웅대하고 위대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평화를 말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시인들이 자못 두려울 것이다.
<무덤: 마라시력설>
여기 평화로운 동산이 있다. 후세의 누군가는 이 동산을 빌려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젖먹이가 살무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땐 어린아기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으리라.”(이사야 11:6-8, 공동번역) 살육과 약탈이 없는 곳. 죽음이 없는 영원한 동산. 그러나 인간은 이 동산을 잃고 말았다.
이 동산을 에덴이라 불렀다. 인간이 이 동산에서 내쫓기게 된 이유는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 동산에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그런데 최초의 여자가 사탄의 꾐에 넘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신이 금지한 나무의 열매를 먹자 이들은 세계를 다르게 보았다. 그들은 부끄러워 숨었다. 이때 신의 물음에 첫 인간, 최초의 남자는 핑계를 댄다. 여자 때문에! 최초의 여자도 핑계를 댄다. 뱀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서 죄罪를 읽는다. 신의 명령을 어긴 사악한 인간.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핑계 대는 인간을 본다. 최초의 인간이 죄를 지었다면 바로 이것일 테다. 누구 때문에 라며 자신은 그 자리에서 도망친다. 그렇기에 악행의 뿌리는 뱀, 사탄이 뒤집어 썼다. ... 라고 사람들은 알고 있으나 거꾸로 덕분에 사탄은 그 덕德을 독점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 신 앞에, 한 인간이 나서서 내가 먹었다며 한발을 내딛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 그는 인간이 아니었을 테다. 신이 되었을까, 악마가 되었을까? 무엇일지 모르는 존재가 불쑥 튀어나왔을 테다.
루쉰은 <마라시력설>에서 악마파 시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대에 사탄이라 손가락질받았던 악성惡聲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루쉰은 그들의 목소리에서 시詩를 읽는다. 시란 무엇인가. 화락 혹은 평화와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옛사람은 시에는 사악함이 없다(思無邪)고 말했다. 여기서 시는 도덕과 한 몸이다. 즐겁더라도 지나치면 안 되고, 슬프더라도 상처를 입어서는 안 된다(樂而不淫 哀而不傷)는 말은 어떤가. 고요한 마음, 소리가 사라진 텅 빈 공간, 어쩌면 적막이라 불러야 하는 썩은 나무(枯木) 같은 평정이 시라고 말한다.
루쉰이 말하는 시인은 그렇지 않다. 사악한 존재이자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대는 존재이다. 가까운 사람으로 그나마 옛사람 가운데 굴원을 꼽아야겠다. 그는 애통, 원망, 회의 따위를 말했다. 이전 사람들이 감히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내뱉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멱라강에 몸을 던졌다. 그의 시는 죽음을 선물해주었을 뿐이다. 그는 악마가 되지 못했다. 반항과 도전 따위가 없으니.
<마라시력설>에서 바이런을 비롯한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그들에게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악마의 덕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반항, 저항, 복수, 도전, 전쟁, 분투 따위들. 평화를 깨뜨린 다는 점에서 그들은 사탄, 낙원을 파괴한 주범으로 지목되는 루시퍼를 닮았다. 그가 낙원을 깨뜨렸던 것처럼 루쉰이 소개하는 시인들도 무엇인가를 부수고 있다.
여기서 루쉰의 <광인일기>를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테다. 루쉰은 잡아먹히고 말 것이라는 식인食人의 공포를 느끼는 인물을 그려낸다. 골방에 갇혀 자신의 낡고 어두운 과거를 헤아려보는 인간이 여기에 있다. 밥상을 받으면서 자신도 언젠가 누군가의 식탁에 오를 것이라 생각한다. 과연 악마라면 어땠을까? 한번쯤 악마의 식탁을 떠올려 볼 일이다. 광인은 자신의 식탁을 끝내 가지지 못했으나, 악마도 그럴까? 루쉰이 그려낸 광인이란 악마가 되지 못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광인의 불우함은 평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늑대들 무리에 뒤섞여 살지 못했던 까닭이다. 인간이 될 수 없는 마을에서 태어난 인간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질문을 루쉰에게 돌리자. 루쉰은 광인인가 악마인가. 분명 루쉰은 복수자를 자처했다. 그는 야만의 전사를 따라 투창을 들었다. 그는 반항의 정신이었다. 그를 두고 <반항에 저항하라>라는 제목의 책도 나왔다. 그는 구습의 타파를 끊임없이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구습을 타파하면 무엇이 남는가? ‘오직 개혁의 새로운 정신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정신은 어떤 모습인가. 루쉰은 거기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아니, 그것은 루쉰의 몫이 아니다. 이제 방향 없는 정신만이 남는다고 해야겠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본래 전쟁터라고 보았다. 평화는 거짓이고 경쟁이 진실이다. 그는 강자에게 손을 들어준다. 이 자연스러운 경쟁에 손을 들어줄 게 무엇이 있겠냐만, 그는 파괴를 막는 인도人道의 적들이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 루쉰의 모순이 있다. 경쟁이 천도天道라면 인도人道를 찾을 것은 무엇인가. 아니, 루쉰은 평화와 화락을, 천도를 이야기하는 이들을 주적으로 삼지 않았나. 그는 하늘, 낡고도 유구한 저 하늘과 싸우는 인간이었다. 오래된 천인天人간의 구도에서 그는 인간의 편에 선다.
<마라시력설> 앞에서 그가 장황하게 말한 민족이란 바로 이런 독특한 전장을 말하는 것이리라. 지나치게 도식적 일지 모르나, 악마를 자처한 시인들이 신과 싸웠다면 그는 지금 하늘과 싸워야 한다. 적막을 드리웠다는 점에서는 똑같겠지만 신과 하늘이 똑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신과 다투었던 악마는 두발이 지상에 묶이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형이상이라 부르건, 외부라 부르건 신과 악마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존재들이다.
그럼 루쉰은? 그에게는 질척이는 전장이 보인다. 천상을 떠나, 저 깊은 땅 속 어딘가 혹은 다른 이세계를 창조한 위대한 악마는 되지 못했다. 바로 지금 여기, 단 하나의 세계만을 가졌던 중국인의 현주소를 여기서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는 소멸을 꿈꾸었으나, 무덤으로 밖에, 삶도 죽음도 아닌 기묘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도덕의 악덕을 알며, 악행의 미덕을 아는 존재.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우리 역시 악행으로 구원받을 뿐이로다. 오직 악행으로 구원받을 뿐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