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 믿지 않는 사람이 셋 있다. 하나는 특파원, 하나는 경제 전문가, 마지막으로 서양 학자.
십수 년 넘게 특파원 생활을 했다는 사람도 수도 베이징과 몇 개의 주요 도시들 밖에 이야기하지 못한다. 그가 중국 사회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더 잘 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과연 얼마나 통찰력을 가지고 중국 사회를 이해한다고 할지 모르겠다. 경제 전문가는 더하다. 오늘날 중국에 대한 다양한 경제 전문가들의 진단은 어떤가. 모두 미중관계의 틀에서 중국을 바라본다. 중국은 기존의 경제적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고 하면서도 그렇게 경제적으로 분석하려 애쓴다. 게다가 언론에서 만나는 경제 전문가는 죄다 시장경제주의자 아닌가. 태반의 서양 학자들은 중국을 하나의 별종처럼 취급한다. 벌레 보듯 하거나 신선 보듯 하거나. 혐오와 추앙 사이에서 갈팡질팡.
중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연구자로서 나는 미조구치 유조의 접근을 좋아한다. 정체성으로서의 중국, 영토로서의 중국을 넘나들며 오늘도 늘거나 줄거나 하는 하나의 사유로서의 중국이라 하자. 이 중국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는 것이 바로 국가중국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얼굴을 한 저 중국에 몰두하다 보면 그 아래 중국에 대한 이해를 놓치기 십상이다. 국가중국에서 벗어나 중국을 읽어보려는 노력은 그 반대 방향에도 목적이 있다. 역사와 철학의 이해를 통해 국가중국을 넘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간중국>은 꽤 반가운 책이다. 21세기 ‘중국인의 조각보’라는 부제에서 볼 수 있듯, 이 책은 단면적인 국가중국에서 벗어나 다양한 측면에서 중국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비록 그것이 조각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을 깁어보면, 조각보를 만들어보면 다른 모습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민간중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을 무엇을.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1부 ‘찬란한 소수’에서는 중국 변두리 소수민족 이야기를 다룬다. 2부 ‘개혁개방의 만화경’은 개혁개방 이후의 경제적 사회적 변화상에 주목한다. 3부 ‘선전, 도시에서 민간 읽기’는 21세기 중국 경제의 발전의 축소판 선전을 통해 다양한 사회 모순을 살펴본다. 4부 ‘일상에서 만나 국경’은 중국과 대만, 중국과 한국 사이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책을 여는 글, 조문영의 '중국 민民 조각을 덧대다’는 꽤 반가운 글이었다. 국가중국이 아닌 다른 중국을 보자는 이야기는 내가 내내 가지고 있던 갈증과 공명하는 부분이 있었던 까닭이다. 나는 중국을 경험한 사람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언제, 어디에 있었느냐 묻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2002년 깐수성 란쩌우에서 중국을 경험했다. 시대와 장소가 달라지면 중국에 대한 인상도 크게 바뀐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중국 사회의 경험은 크게 다르다. 게다가 2000년대 초반과 2010년대 경험은 물론, 코로나 이전과 이후는 또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것뿐인가. 동북에서 경험한 중국과 서북에서 경험한 중국, 베이징에서 경험한 중국과 시닝에서 경험한 중국, 선전에서 경험한 중국과 옌지에서 경험한 중국은 서로 천차만별일 것이다.
글쓴이 역시 넓고 큰 나라, 10억이 넘는 중국을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만약 그것이 또 다른 중국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시도였다면 크게 매력적이지는 않았을 테다. 온라인의 발달은 거꾸로 중국의 속살을 생생하게 지켜보는 또 다른 통로를 여럿 제공해주고 있다. 마음만 있다면 소수민족의 독특한 삶이며, 지방 소도시의 억척스런 생활상, 마천루가 번쩍이는 대도시의 화려한 삶까지 얼마나 다양한 컨텐츠가 있는가.
국가중국에 포섭되지 않는 중국의 다른 모습, 이를 ‘민간중국’이라 명명한 데 이 책의 중요한 덕목이 있다.
'중국'을 '중국 국가'와 등치 시키는 습관은 한국 기자나 베이징 시민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민이 제 삶에서 어떤 '국가'를 만나는가, 어떻게 만나는가는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다. (11쪽)
‘중화인민공화국 공민公民’이라는 분명한 국민 정체성 대신 ‘민’이라는 모호한 수사로 등장인물을 에두른 것은, 이들의 삶에서 ‘국가’가 현현하는 양태나, 이들이 ‘국가’와 마주하는 방식의 차이 혹은 ‘접면’이 현대 중국의 역동과 곤경을 들여다보는 데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13쪽)
그러나 그 속을 채 알뜰히 채우지 못했다는 게 이 책의 아쉬운 부분이다. 책을 덮고도 민간중국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조각보를 잘 깁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10명이 넘는 저자의 글을 한데 묶어 책을 엮어내었기 때문일 테다. 이런 기획의 곤혹스러움,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민간’이라는 주제가 기대만큼 상세히 다뤄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국 인민은 국가를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삶의 터전이 내몰리거나, 급격한 사회변화를 경험하는 와중에 그들에게 국가는 어떻게 현현하는가. 그들은 국가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가. 국가와 당, 정부, 자국민에 대해 그들은 어떻게 이야기 하나. 나아가 그 입장은 ‘민간’, 국가와는 다른 또 다른 영역을 어떻게 형성하거나 구성하는가.
‘민간중국’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인간 중국’을 읽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일 테다. 민간중국을 찾아 읽을 수 있는 그 입구가 내내 궁금했다. 아마도 이는 저자들도 고민하는 부분일 테다. 더 많은 연구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몇몇의 글은 너무 심드렁하게 읽었다. 불만은 크게 둘이었는데 하나는 중국인을 너무 있는 그대로 소개한다는 점이었다. 중국인의 생각, 입장을 그대로 소개하는 것보다는 저자의 입장이나 경험의 해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중국을 타자로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김유익의 글이 흥미로웠다.
또 다른 불만은 답정너로 중국 사회를 읽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선전은 개혁개방 이후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룬 곳이다. 그만큼 오늘날 자본주의의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폭스콘 노동자들의 자살이 대표적. 도시 중국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동일한 모순을 발견할 수 있고, 그런 면에서 연대가 가능하다는 식의 접근은 나에게 낡은 논의로 읽혔다. 선전의 중국인 노동자가 ‘전태일에게 바치는 노래’를 부른다 한들 그것이 어떤 연대를 가능케 할 것인가. 한국 사회의 낡은 추억을 소환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중국은 동류이자 타자다. 어쨌든 서로 몸을 부비고 살아온 게 반만년이다. 역사 속에 함께한 경험은 숱하게 많고, 지금도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다. 아주 멀고 동떨어진 객관적 타자가 아니기에 더 살피기 어렵다. 중국의 민간을 읽기 힘든 것은 그 거리와 심도를 조절하기 힘들기 때문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