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픈옹달 Oct 10. 2022

그런 슬픈 눈으로

덕자득야 :: <은하철도 999 극장판>

날씨가 차다. 맑던 하늘이 갑자기 흐리더니 비를 퍼붓는다. 토요일은 오랜만에 날이 좋았다. 하늘과 구름이 적당히 반반이네요. 너무 파아란 하늘 보단 적당히 구름이 섞인 하늘이 심심치 않고 좋다. 헌데 일요일, 아침부터 궂은 날씨다. 비가 내리는데, 온 세상이 구름에 덮인듯하다. 스산하고 쓸쓸한 비다. 오후 3시 밖에 안 되었는데 세상이 컴컴하다.


비를 맞으며 외출을 한 것은 영화관에 가기 위해서였다. 어린 시절 로망이랄까. 흑색 기차가 증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그 모습이 좋았다. 금빛의 여인과 그보다는 더 친근한 작고 못생긴 철이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보러 영화관을 찾았다. 79년 원작을 리마스터로 내놓았단다. 이건 봐야 해! 서둘러 예매를 하고 영화관을 찾았다.


워낙 어린 시절 보아서 내용은 잘 기억에 나지 않는다. 그래도 주제가는 목이 터져라 외던 시절이 있었다. 그 옛날 운동회에서는 왜 그리도 만화 주제가를 불렀는지. 그러고 보니, 무료한 하루를 보내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만화 주제가가 담긴 카세트 테잎을 사주셨다. 늘어지도록 들었지. 


돌아보면 그 시절 애니메이션은 죄다 우울한 것들이었다. <엄마 찾아 삼만리라>던가 <개구리 소년>이라던가 모두 저마다 상처를 가진 이들의 이야기였다. '엄마 잃은 소년', 극장 스크린에서 만난 철이, 테츠로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와 함께 테츠로는 눈보라 속을 헤맨다. 그러다 인간 사냥꾼 기계공작에 의해 어머니가 죽고 테츠로는 홀로 살아남는다. 기계 몸을 얻어 기계공작에게 복수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은하철도 999에 탑승하는 것이 테츠로의 목표. 여차저차 하여 메텔을 만나고 그와 동행하여 은하철도에 오른다.


숱하게 많은 별을 들렸던 TV 애니메이션과 달리 극장판은 몇 개의 별을 지나며 굵직한 에피소드를 풀어낸다. 그러면서 그 시절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던 이라면 한 번쯤 지나쳤을 인물도 등장한다. 캡틴 하록, 퀸 에메랄다스, 그리고 그들의 친구 토치로의 이야기까지.


내용은 풍성하나 40년 뒤의 관객이 보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이야기는 불친절하다. 왜 메텔은 테츠로를 무작정 도와주는가. 테츠로는 왜 메텔을 덜컥 믿는가. 빌드업 없이 인물간의 관계가 진행된다. 모든 게 갑자기 툭툭 전개된다. 물론 철 지난 설정도 21세기 관객이 보기엔 낡았다. 우주를 오가는 열차에 증기기차 소리가 웬 말인가. 하긴 우주선 모양이 해적선이나 증기선 모양이니 뭐. 기계 몸을 찾고자 하는 맹목적 목표가, 따듯한 마음을 가진 건 인간이야 하는 식의 발견으로 쉽게 허물어지는 것도 진부하다. 차가운 기계와 따듯한 인간이라는 구도는 옛 것이 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련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어린 시절 낡은 브라운관을 통해 우주를 꿈꾸었던 그 시절을 추억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조금 있으면 나온 지 반 세기가 되는 유물급 애니메이션인데도 음악은 훌륭했다. 장엄하고도 구슬픈 맛이 있다. 내가 아는 그 주제가가 나오지 않아 아쉬웠지만. 


오늘날 보기에는 작화는 거칠다. 그러나 어찌나 눈을 잘 그렸는지. 눈빛만으로 수많은 말을 전한다. 슬픔이며 외로움이며 아쉬움이며 그리움이며 사랑이며 미움이며... 긴 속눈썹이 매력적인 메텔의 눈보다 테츠로의 짙은 눈이 더 좋았다. 흔들리는 그 눈을 보고 있노라면 왈칵 눈물이 솟아오를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문득 그 시절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슬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다음과 같은 대사로 끝난다. "안녕 소년의 환영이여." 70년대 중년들에게 소년의 환영이란 무엇이었을까. 40-50년대를 가로지르는 그 험악한 시절속에 과연 아련한 소년 시절 따위가 있기나 했을까. 모르겠다. 그 시절 감성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안녕'이라는 말에 다 담지 못하는 무언가 아른거린다.


'안녕 사라진 것들과 사라질 것들아.' 이야기의 끝을 보며 나도 속으로 되뇌었다. 


극장판의 결말이 내가 아는 것과 좀 달라 찾아보니 TV판과 극장판이 서로 다른 결말이란다. TV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극장판에서 다른 결말을 내놓아 크게 화제였다는 이야기. 그러나 어떻게 끝나더라도 좋은 일이다. 늘 똑같이 반복되어도 좋은 작품이 있다. 서유기나 은하철도 999 따위가 그렇다. 여행엔 끝이 있지만 이야기엔 끝이 없다. 늘 어디론가 떠나는 중.


이 열차를 타면 다시는 지구로 돌아오지 못해. 안드로메다로 떠나려는 테츠로에게 메텔이 하는 말이다. 만약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난다면 어떨까? 그래도 떠나겠는가? 그러나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게 진짜 문제 아닐까. 어디든 낯선 곳은 없다는 것. 그래서 나는 영영 떠날 수 없어 슬프다.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슬픔. 과거 저들이 귀향을 꿈꾸었다면 이젠 방황을 꿈꾸는 게 아닐까.


그러니 내가 어느 날 훌쩍 사라진다 하더라도 놀라지 말기를. 밤하늘의 아득한 별처럼 아련히 잊히더라도. 언제든 어떻게든 멀리 떠날 테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작가의 이전글 열자의 삼시 세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