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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Oct 04. 2022

열자의 삼시 세끼

아싸장자

<장자> 내편의 마지막 <응제왕>에는 몇 개의 흥미로운 우화가 실려 있습니다. 그 가운데 열자의 이야기에 주목해봅시다. 등장인물은 셋입니다. 열자, 그의 스승 호자, 그리고 정나라의 영험한 무당 계함.


계함은 사람의 수명과 운명을 정확히 알아맞히는 능력이 있었다고 해요. 어찌나 신통한지 사람들은 계함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답니다. 계함의 말대로 되는 바람에 일부러 그를 피해 다녔다고 해요. 그러나 열자는 달랐어요. 그는 계함을 만나고는 마음을 쏙 빼앗겨버립니다. 그래서 돌아와 스승 호자 앞에서 이렇게 자랑스레 말을 늘어놓습니다. '선생님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선생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 있더라구요.' 이 말을 들은 호자는 어땠을까요? 영 반갑지 않았겠지요. 


심통이 났을까요. 호자는 열자에게 그렇게 신통하다는 계함을 불러오라 말합니다. 계함과 호자의 첫 만남. 헌데 호자를 만나고 나오는 계함의 얼굴이 어둡습니다. 호자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네요. 마치 젖은 재처럼 아무런 가망이 없답니다. 이 말을 들은 열자는 펑펑 울며 호자에게 소식을 전해줍니다. 그러나 호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땅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계함이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이튿날 다시 계함을 불러오라고 해요. 


두 번째 만남. 계함은 우쭐대며 열자에게 말합니다. 자신을 만난 덕분에 호자의 병이 나았다고 하네요. 막혔던 부분이 트여서 비로소 생기를 찾았답니다. 이 기쁜 소식을 호자에게 전해주지만 호자는 역시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반응합니다. 이번에는 하늘의 모양을 보여주었다고 하네요. 세 번째 만남은 어떨까요?


세 번째 만남 뒤 계함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호자의 모습이 일정치 않다고 해요. 이랬다 저랬다 도무지 상태를 읽을 수 없답니다. 다음에 안정되면 다시 보겠다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호자는 이번엔 텅 비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랍니다. 변화무쌍한 호자. 헌데 호자는 더 보여줄 것이 있다고 해요. 아홉 가운데 셋만 보여주었답니다. 그 나머지에 대해 계함은 또 무어라 말할까요.


네 번째 만남이 이뤄집니다. 그러나 계함은 호자를 보자마자 얼이 빠져 달아납니다. 호자는 열자에게 계함을 쫓으라 말합니다. 그러나 어찌나 재빠른지 그를 붙잡지 못합니다. 빈손으로 돌아온 열자에게 호자는 근원에서 아직 나오기 이전을 보여주었답니다. 대체 그것은 무엇일까요. 비움조차도 있기 이전의 어떤 기묘한 상태일 것입니다. 


이렇게 신묘함으로 명성을 떨치던 계함은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이 우화에서 계함은 세상만사를 명료하게 이야기하는 지혜로운 자를 의미합니다. 세상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변화무쌍한 세상의 움직임이라던가 사람 개개인의 운명이라던가. 그러나 결국 헤아리지 못하는 게 있습니다. 보면 볼수록 우리를 혼란에 빠트리는 무엇. 그렇게 장자는 명료한 지식을 거부합니다. 분명한 말일수록 진실에서 멀어지기도 하지 않나요.


이 우화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계함과 호자를 통해 모든 것을 지켜본 열자의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그 후 열자는 스스로 배우지 못했다고 여기고 집으로 돌아갔어. 삼 년 동안 집 밖을 나서지 않고 아내를 위해 밥을 지었어. 가축을 마치 사람처럼 기르고 세상 일에 따로 마음을 두지 않았지. 소박한 삶을 살고자 했어. 묵묵히 홀로 살고자 했고, 어지러운 일에 상관치 않았어. 그렇게 평생토록 살았지. 


열자는 계함과 호자 사이에서 무엇을 깨우쳤을 까요. 그는 편협한 지식의 한계를 깨닫고 무한한 도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열자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별로 대단하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도에 대한 깨우침은 그에게 큰 변화를 주지 못한 것일까요.


우리는 <장자>와 같은 책이 세속을 등진 삶을 이야기한다 생각하곤 합니다. 마치 구름을 타고 홀로 훨훨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신선처럼. 그러나 열자가 보여주는 삶은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입니다. 저는 장자가 이야기하는 삶의 모습이란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장자는 모험을 이야기하지만, 그 모험은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어쩌면 허망한 귀결이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여행이란 돌아옴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열자는 손수 밥을 지어 아내를 먹이며 사람처럼 돼지를 길렀다고 이야기합니다. 밥을 지어 식구를 먹이는 일, 그리고 또 다른 존재를 챙기는 일. 열자의 일상은 그렇게 소박하면서도 자질구레합니다. 장자는 열자의 우화를 통해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결국 일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상은 아닐 것입니다. 더 소박하고 충실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장자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삶의 모습 아닐까요. 


열자가 아내를 위해 밥을 지었다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전통사회에서 밥 짓고 식사를 마련하는 것은 여성, 혹은 하층 계급의 일로 이야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제 손으로 밥을 하고, 남을 먹이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장자로부터 약 2,000년이 훨씬 지났지만 지금도 세 끼를 챙겨 먹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동이 필요합니다. 이 노동, 밥을 지어 식사를 마련하는 노동이 중단되면 일상은 무너집니다. 식구食口란 이 부단한 노동이 지탱하는 생활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매일 분주하지만 대단할 것 없는 소박한 공동체. 


장자 시대에 삶을 얽어매는 다양한 신분, 차별은 오늘날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밥을 지어 먹이는 일은 여전히 권력과 위계를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누가 차리고 누가 먹느냐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찍이 맹자는 마음을 쓰는 사람, 지식으로 세상에 이바지하는 사람과 몸을 쓰는 사람, 노동하는 사람의 위계를 말했습니다. 몸을 쓰는 사람이 마음을 쓰는 사람을 먹여야 한답니다. 그러나 장자는 그런 이야기에 의문을 붙일 것입니다. 어째서 지식인은 늘 받아먹기만 하는가? 남이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먹기만 하는 사람은 일상의 자질구레함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구리시 인창도서관 '아싸 장자' 강의안 일부입니다. 강의안 전체 자료는 다음 링크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zziracilab/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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