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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Sep 13. 2022

우리는 죽어서

아싸장자

장자는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삶을 가꾸는 법은 곧 지혜롭게 죽음을 맞는 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슬픔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또한 고통도 함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장자는 <양생주> 편에서 노자의 죽음을 다룹니다. 진일이라는 자가 노담, 노자의 장례에 참여하는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진일은 노자의 친구였는데 그 장례에 참여하고는 실망하고 돌아옵니다. 노자의 죽음에 곡하며 슬퍼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까닭입니다.  


장자는 끊임없이 죽음이 슬퍼할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장자가 그 아내의 죽음에도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물론 이는 하나의 과장입니다. 죽음 자체를 찬양할 수도, 소멸 자체를 노래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표현한 것은 죽음이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이야기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하나의 필연적 사태는 슬픔이나 즐거움 따위의 감정과는 무관한 하나의 현실입니다.


주어진 현실을 편안히 받아들이고 거스르지 않으면 슬픔이니 즐거움이니 하는 것이 일어나지 않아. 


<대종사> 편에서는 생사를 함께 보는 이들을 친구로 등장시킵니다. 자사, 자여, 자리, 자래 이 넷은 서로 벗이 되어 삶과 죽음을 함께 이야기하기로 합니다. 그들은 과연 어떻게 죽음을, 그에 앞선 병듦을 이야기할까요. 

자여가 병이 들자 자사가 문병을 갑니다. 자여는 병이 들어 몸이 성치 않은 상황입니다. 이를 두고 이야기하는 자여의 말이 흥미롭습니다. 


자사가 말했어. "너는 그게 싫어?" "아니, 내가 어찌 싫겠어. 내 왼팔이 조금씩 변해서 닭이 된다고 해. 나는 그걸로 새벽을 알릴 거야. 내 오른팔이 조금씩 변해서 활이 된다고 해. 그러면 나는 그걸로 새를 잡아 구워 먹어야지. 내 꽁무니가 조금씩 변해서 바퀴가 되고, 마음이 말이 된다고 해. 그러면 나는 그걸 타야지. 다른 수레가 필요 없겠지. 때가 되어 태어났으니 순순히 죽어야지. 주어진 때를 편안히 여기고 순순히 따르면, 슬픔이니 즐거움이니 따위가 스며들지 않아."


근대 의학은 인간을 무수한 질병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불과 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고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은 대부분의 질병의 공포에서 벗어났으며 또한 다양한 의료적 도움을 통해 죽을 때까지 온전한 신체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근대 의학이 이처럼 죽음을 미루어 놓았지만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건강한 신체는 없으며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장자는 자여의 말을 통해 신체의 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길을 이야기합니다. 바뀐 신체는 그것대로의 새로운 길이 있을 것이라는 말은, 또 다른 긍정적 태도로 읽힙니다. 팔이 닭이 되면 새벽을 알릴 것이라는 말은 일종의 유머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자래가 병에 걸렸습니다. 자리가 그를 찾아가는데 더 상태가 심각합니다. 자래가 막 숨을 거두려는 상황. 자리의 태도가 좀 이상합니다. 


얼마 뒤 자래가 병에 걸렸어. 숨을 헐떡이며 죽음을 앞두고 있었어. 아내와 자식이 곁에서 울고 있었지. 자리가 문명을 가서 말했어. "훠이! 저리 가시오. 죽음을 슬퍼하지 마오." 그는 문에 기대어 이렇게 말했어. "위대하도다! 조물자가 앞으로 너를 어떻게 할까? 너를 어디로 가게 할까? 너는 쥐의 간이 될까? 벌레의 다리가 될까?" 


그는 친구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슬퍼하는 가족들을 물리칩니다.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며. 한편 이 구절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無怛化)를 '죽는 자를 놀라게 하지 말라'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죽음이란 자연스런 변화[化]이니 이를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장자의 일관된 태도니 그렇다 칩시다. 그러나 헐떡이며 죽음을 앞둔 친구에게 던지는 질문은 참 기이합니다.


자리는 그가 죽은 뒤 무엇이 될까 궁금합니다. 위대한 조물주가 그를 어떻게 할까. 장자는 이 세계를 마치 커다란 화로처럼 생각했습니다. 인간이라는 개별적 존재가 일시적으로 살아 있지만, 죽고 나면 커다란 화로 속에 들어가 녹아버리는 쇳덩이처럼 그렇게 개별적 존재성이 사라지리라 생각했습니다. 화로에서 꺼내어 새롭게 만들어진 물건은 이전의 쇳덩이와 무슨 관계일까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는 인간이 죽어 다른 존재가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은 죽음과 함께 개별성을 잃어버린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죽어 쥐가 되는 게 아니라 쥐의 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죽어 벌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벌래의 다리가 될 수 있다는 것. 물론 그것은 나라는 존재 전체의 변화도 아닐 것입니다. 나는 무수히 많은 존재로 흩어질 것이며, 또 다른 무엇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사실. 


이 생각은 돌아오면 거꾸로 나라는 개별적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을 뒤집어버립니다. 나 역시 일시적 혼합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요. 자리의 말을 뒤집으면 이런 기묘한 질문이 됩니다. '너는 이전에 무엇이었을까? 쥐의 간이었을까? 벌레의 다리였을까?' 


장자는 이렇게 흩어지는 존재로서의 소멸을 이야기합니다. 영원을 욕망하는 사람에게 장자가 던지는 미래는 영 불편하고 두렵게 느껴질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이렇게 산산이 흩어 버리다니. 그러나 필멸의 존재, 앞으로 소멸할 존재로서의 삶의 정직함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삶을 가꾸어 살아내어야지. 장자가 이야기하는 삶은 그렇게 투철하나 담담한 삶입니다.  




구리시 인창도서관 '아싸 장자' 강의안 일부입니다. 차후 다른 경로를 통해 강의 내용 전체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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