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는 많은 수고가 필요한 능동적 활동입니다. 그러니 힘이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성장과 함께 이 힘을 자연스레 키우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뉴미디어의 범람이 읽기 능력의 퇴화를 가져왔다고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보기와 듣기는 읽기보다 훨씬 수동적 활동입니다. 가만히 앉아 보고 듣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요. 유튜브로 보면 될 것을 굳이 책으로 읽어야 하느냐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디오북으로 들으니 더 좋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립니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대부분 성인의 반응이라는 점입니다. 태반의 아이는 영상 노출 빈도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어려서 TV나 유튜브 시청을 제한하는 어린이들에게도 읽기 능력의 저하가 보인다는 점이 더 문제가 아닐까요. 그 가운데는 책을 좋아하는 친구들도 많습니다. 책을 가까이 하나 읽기 능력을 키우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꼼꼼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너무 쉬운 책, 학습 만화의 범람 때문은 아닐까 질문합니다. 공을 들여 읽지 않아도 되는 책들이 이전보다 많아졌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읽기 좋은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도서관이나 서점에도 아동 도서 쪽은 늘 붐빕니다. 문제는 읽기 자체가 아니라 '힘들여 읽기'에 있는 것 아닐까요.
쓰기는 더 힘든 일입니다. 서당 수업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에게 쓰기를 강조하지만 쓰기에 대한 '저항(?)'이 해마다 조금씩 커지는 것이 걱정입니다. 저항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붙였지만 아이들의 투정, 불만 정도에 불과하긴 합니다. 그럼에도 저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가로막는 현실적 힘의 세기가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입니다. 10년 전에도 아이들은 쓰기를 귀찮아했고, 지금도 여전히 귀찮아합니다. 그러나 쓰는 힘, 연필을 손에 쥐고 글자 하나씩을 쓰는 힘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면 괜한 지적질일까요. 귀찮음 차원이 아니라 정말로 힘이 부족하여 쓰지 못하는 모습이 늘고 있습니다.
쓰기를 위해서는 더 구체적인 힘들이 필요합니다. 쓰기는 매우 정교한 신체 활동입니다. 손가락보다 가는 필기도구를 잡아 글자를 쓰는 것은 매우 고된 일입니다. 게다가 제 손에 익지 않은 글자, 예를 들어 한자 같은 낯선 문자를 쓴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요. 여기에는 분명 물리적인 힘의 한계가 있습니다. 힘들어서 못쓰겠다는 아이들의 말에는 얼마간의 진실이 묻어 있습니다. 하긴, 손을 움직일 기회가 없으니 힘든 게 당연합니다. 교실에서 칠판이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필사는 낯선 활동입니다. 공책에 정리하지 않아도 PPT로 인쇄물로 학습자료가 넘쳐납니다. 제 이름 석자만 쓰면 되지 힘들여 글자를 쓰고 익힐 필요가 있을까.
선생도 판서하지 않고, 공책과 필기도구의 자리를 아이패드가 대체하고 있습니다. 전자교과서의 시대에는 전자펜조차 필요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클릭조차도 필요 없이 '터치'로 모든 것이 가능할 테니까요. 그런 현실이 먼 미래가 아니라 현재적 미래라 하더라도 읽기와 쓰기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사유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능동적으로 학습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쓰는 인간과 읽는 인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글 없이 익힐 수 있지만, 문자는 쓰지 않고는 도무지 익힐 수 없습니다. 어쩌면 도리어 읽기와 쓰기를 '일부러' 익혀야 하는 시기에 이르렀는지 모릅니다.
'숨쉬기 운동'이란 우스개 소리처럼 어떤 읽기와 어떤 쓰기는 읽는 힘, 쓰는 힘을 기르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너무 쉬운 글과 간단한 메모로는 읽기와 쓰기 능력을 기를 수 없습니다. 일상의 활동이 운동이 되지 않는 것처럼,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거운 덤벨을 들고 땀을 흘려야 하는 것처럼 읽기와 쓰기도 힘이 듭니다. 학습력과 사고력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읽기와 쓰기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조금은 버거운 책을 선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안을 쓸 때에도 친절한 문체를 사용하려 하나, 마냥 쉬운 표현만 사용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소리 내어 글자를 익혀도 되는데 굳이 쓰라고 강요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혼자 읽을 수 없는 글을 읽어야 읽기 능력을 키울 수 있고, 손가락이 조금은 얼얼할 정도로 써야 쓰기의 기초체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물론 마냥 어려운 책을 들이밀 수도 없는 일이고, 무작정 쓰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아이들의 현재 상황을 잘 파악하고 적절한 텍스트와 적절한 강도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늘 고민입니다. 적절한 세기와 방법이 무얼까. 불평하는 아이들을 보며, 교육의 본래 모습이 '강제의 기술'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합니다. 강제가 폭력이 되지 않도록, 그러나 멈춰있지 않도록 채찍질하는 기술. '즐거운 공부'를 경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고통을 주어야 한다는 못된 다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땀 흘림의 개운함, 성장의 기쁨, 배움의 희열을 함께 찾고 싶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