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무덤> 읽기 #5
人生多苦辛,而人們有時卻极容易得到安慰,
又何必惜一點筆墨,給多嘗些孤獨的悲哀呢?
于是除小說雜感之外,逐漸又有了長長短短的雜文十多篇。
其間自然也有為賣錢而作的。這回就都混在一處。
我的生命的一部分,就這樣地用去了,也就是做了這樣的工作。
然而我至今終于不明白我一向是在做什么。
比方作土工的罷,做著做著,而不明白是在筑台呢還在掘坑。
所知道的是即使是筑台,也無非要將自己從那上面跌下來或者顯示老死;
倘是掘坑,那就當然不過是埋掉自己。
總之:逝去,逝去,一切一切,和光陰一同早逝去,在逝去,要逝去了。
--不過如此,但也為我所十分甘愿的。
인생에는 고통이 많지만 사람들은 때때로 아주 쉽게 위안을 받으니, 구태여 하찮은 필묵을 아껴 가며 고독의 비애를 더 맛보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소설과 잡감 이외에도 점차 길고 짧은 잡문이 십여 편 모이게 되었다. 그중에는 물론 돈을 벌기 위해 지어진 것도 있는데, 이번에 모두 한데 섞어 놓았다. 내 생명의 일부분은 바로 이렇게 소모되었으며, 또한 바로 이런 일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내가 줄곧 무엇을 하고 있는지 끝내 알지 못하고 있다. 토목공사에 비유하자면, 일을 해나가면서도 대를 쌓는 것인지 구덩이를 파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설령 대를 쌓는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스스로 그 위에서 떨어지거나 늙어 죽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구덩이를 파는 것이라면 그야 물론 자신을 묻어 버리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요컨대, 지나가고 지나가며, 일체의 것이 다 세월과 더불어 벌써 지나갔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가려 하고 있다. -- 이러할 뿐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주 기꺼이 바라는 바이다.
:: <무덤: 무덤 뒤에 쓰다>, 루쉰전집, 그린비
루쉰의 글을 읽으면 그가 엉망진창인 세상을 살아내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눈을 크게 뜨고 볼 것에 대하여>는 시대의 문제를 명확하게 직시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사람들은 적당히 하는 것을 좋아한다. 루쉰의 말을 빌리면 이는 자신과 남을 모두 속이는 것이다. 문제는 결코 쉽지 않고, 적지않은 병폐가 있으나 사람들은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하는 생각에 젖어버린다. 아마도 이는 오랫동안 쌓여온 인과응보의 이야기, 이른바 해피엔딩이 심어준 버릇일 테다.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를 보면 그는 결코 그런 날을 오지 않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이야기 속이라면 모르겠지만, 현실에서 착한 사람이 선한 결과를 얻기란 요원한 일이다. 착한 마음에 적당히 하다가는 도리어 호되게 당할 수 있다. ‘이중 도덕’ 때문이다. ‘주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등 모두 서로 다른 도덕을 가지고 있다.’ 세상은 평평하지 않다. 어떤 식으로든 기울어져 있는데, 사람들은 애써 이 비탈지고 굴곡진 모습을 외면하려 한다. 반듯하고 평평한 세상이 좋은 것이다만, 거저 주어지는 건 아니다. 몽둥이를 들어야 한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영 불편한 말이겠지만, 미친 개는 패야한다. 설사 물에 빠졌다 하더라도 말이다.
아마도 이 지점이 이상주의자들과 루쉰의 가장 큰 차이점일 테다. 그는 발 밑에 차이는 현실의 모순을 계속 이야기한다. 다른 글의 표현을 빌리면, 사방이 먼지일 뿐이다. 그런데도 ‘개혁자만이 여전히 꿈속에 있으면서 늘 손해를 보고 있’다. 구름이 지나가고 아름다운 새가 날아가고 하는 따위의 낭만이 루쉰에게 보이지 않는 건 이런 까닭이다. 루쉰이 비탈진 세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어디쯤으로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기울어진 세계를 다른 식으로 돌려내려면 적지 않은 힘이, 실제적인 분투가 필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원수’를 반복적으로 입에 올리는 까닭이 이것이다. 그는 <무덤 뒤에 쓰다>에서 자신의 글에 기대하는 두 가지 효과를 이야기한다. ‘내 글을 편애하는 단골에게는 약간의 기쁨을 주고 싶고, 내 글을 증오하는 놈들에게는 약간의 구역질을 주고 싶다.’ 공정함과 공평무사 따위는 그에게 별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마도 이런 부분 때문에 루쉰의 글은 어떤 시원함을 선물해주는 것이리라. 그러나 또 세계에는 편애하는 이와 증오하는 이 이외에 그저 팔짱을 끼고 구경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에 대해서 루쉰 선생은 어떤 입장일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마치 빌라도처럼 제 손을 씻어내며, 나에게는 죄가 없다 말하는 자들에게 루쉰은 무어라 말했을까.
공동체라 부르건, 사회라 부르건 어쨌든 이 진흙탕 속에 뒹구는 이상 순백의 영혼 따위는 도무지 만날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른바 속죄의 방법을 통해 여기서 탈출하려 하는데, 그것이 적절한 방법인지는 차치하고 당최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다. 도리어 루쉰의 글에는 문득문득 자기가 겨누는 화살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곤 한다. 전통이건, 고문古文이건, 혹은 남성이건, 혹은 식자층이건.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루쉰 스스로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그에게는 도무지 ‘자기반성’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나마 가까운 것을 찾자면 어떤 부끄러움 정도?
다케우치 요시미의 관점을 빌리면 이를 ‘원죄의식’이라 불러야 하겠다. 속죄할 수 없어 다만 원죄로 남아 끊임없이 괴롭히는 무엇. 루쉰은 <연>에서 어린 시절 동생의 연을 부숴버린 기억을 떠올리며 뒤늦게나마 동생에게 사과하려 한다. 그러나 동생은 그 사실을 새까맣게 잊었다. 동생에게는 이미 지나간 사건이다. 아니, 지나갔는지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건이다. 이 부조화, 누군가에게는 지나가버린 사실조차 지나가버린, 이미 무無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일이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지나가지 못하고 남아 있다면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면 대속代贖이니 고해告解니 하는 것 따위를 생각했을 테다. 어떻게든 이땅의 죄를 덜어내고 저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루쉰에게는 오직 하나의 길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다만 하나의 종점 그것이 바로 무덤이라는 것만은 아주 확실하게 알고 있다.’ 자신도 지나가버릴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그저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언젠가는 자신도 무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테니. 이런 면에서 그가 말한 중간물이란 유와 무의 중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도 할 수 있다. <무덤>이란 이 중간물을 위한 작은 제의 혹은 기념이고.
이런 소멸의 의지 - 이를 다르게 말하면 ‘무’에 대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에도 불구하고 죽어 버린 재(死灰)가 되어버리지 못한 것은 어째서일까? 소멸을 욕망하는 그는 거꾸로 소멸하지 않는다. ‘<무덤> 뒤에 쓰다’를 읽고 나서 닥쳐오는 질문은 이것이다. 그는 ‘이 자그마한 무덤속에는 살았던 적이 있는 육신이 묻혀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째서 무덤 속에 있는 육신이 보이지 않는가. 아니, 어째서 ‘무덤’조차도 눈에 보이지 않는가. 그저 한 인간이, ‘육신'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피와 살을 가진 존재가 눈앞에 있는가. 사라지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의 말처럼 ‘일체의 것이 다 세월과 더불어 벌써 지나갔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가려 하고 있다.’ 그런데도 무엇은 지나가지 못하는 걸까? 사라지지 못하는 걸까? 아니라면 무엇이 남아있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실재하는 정신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저 편애하는 독자의 과장 혹은 희망일 뿐인가. 현재 나로서는 이에 대해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다만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밖에. 소멸을 욕망하며, 몰락을 직면할수록, 이 세계의 진실에 육박해 나아갈수록, 그 건강한 발자국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미래를 기약하거나 기대하지 않는 자. 기꺼이 제 손으로 자기 무덤을 파며, 화려한 추락을 위한 누대를 쌓는 자. 결코 반성하지 않는 자. 속죄와 대속 그리고 고해를 입에 올리지 않는 뻔뻔한 정신. 어쩌면 '지나갔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가려 하고 있다'는 말 만이 진실이기 때문일 수도.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으며, 참된 것도 없고, 확실한 것도 없다. 다만 기약하거나 약속하거나 기대하지 말 것. 진실이란 다만 이것이다. '지나갔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가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