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풍 #2
<열풍> 곳곳에서 그가 상대한 적을 만날 수 있다. 그의 적은 옛 중국, 국수國粹를 주장하는 이들이다.
무엇을 ‘국수’라고 하는가? 문면으로 보면 한 나라의 고유한 것으로 다른 나라에는 없는 사물이다. 달리 말하면 특별한 물건이다.
<열풍: 수감록 35>, 루쉰 전집
이와 유사한 정신을 지금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유구한 한민족韓民族’ 따위가 그렇다. 다른 데에 없어 유일무이하다 생각하는 것은 물론 그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정신. 따지고 보면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닐뿐더러 그렇게 독특한 것도 아니라는 점을 잘 모른다. 인터넷에 떠도는 ‘유사 역사학’도 그와 비슷한 한 예가 될 수 있다. 강대한 한민족이 드넓은 중원을 지배한 것은 물론 세계 유일무이한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다 운운.
문제는 이러한 ‘풍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도 있겠지만 더 나아가 패배를 무시한 처사라는 점도 중요하다. 일단은 자신을 부풀릴 것. 현실을 망각하기 위한 수단.
중국인은 예부터 자대自大하는 편이었다. ‘개인적 자대’가 아니라 모두 ‘군중적, 애국적 자대’라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문화적 경쟁에서 패배한 뒤 다시 분발약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열풍: 수감록 38>, 루쉰 전집
루쉰이 사용하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유행했던 하나의 사상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천연론>으로 대표되는 ‘사회진화론’은 당시에 국가와 민족, 사회의 변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이론적 기반이었다. 생물이 진화하듯 인류의 사회, 문명도 진화해야 한다. 옛 것은 폐기되고 사라질 것이며 그래야 새로운 것이 등장한다. 여기서 루쉰이 말하는 ‘문화적 경쟁’이란 자연에서 벌어지는 ‘생물적 경쟁’과 비슷하다. 패배란 곧 뒤처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화적 경쟁은 약육강식과는 다르다. 잡아 먹히는 게 아니라 변화를 요구한다. 루쉰의 말을 다시 빌리면 ‘분발약진’!
꼼꼼하게 생각하면 ‘자대自大’, 일종의 정신승리란 분발약진하지 못한 결과가 아니라 패배를 수용하는 방식이라 해야 한다. 패배를 패배 아닌 방식으로 수용하는 방법. 우리는 아직 지지 않았다 운운. 혹은 패배를 더욱 커다란 패배로 만들 것. 우리의 장대하고 유구한 역사가 이토록 크게 무너졌다는 식으로. 그러나 루쉰의 생각을 참고하면 패배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른바 ‘신진대사’란 본디 그러한 것이다. 옛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루쉰이 자신이 딛고 있는 지반, 중국을 그토록 철저히 비판하는 이유는 그것이 ‘낡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이 ‘변화를 막기 때문’이다. 차라리 낡은 것은 낫다. 다시 말하지만 낡은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니. 낡고 노쇠하면 죽음이 뒤따른다. 문제는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두려움, 주저함, 우물쭈물… 이것이야 말로 문제이다.
따라서 전통과 전면전을 벌였던 루쉰의 ‘오래된 글’을 읽는다는 것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루쉰의 글은 100여 년이나 되었으나 낡지 않았다. 아니, 낡은 것은 과거에 있지 않다. 도리어 낡은 것은 현재에 있다. 변화 없는 습관, 반복하여 재생산하는 현재야 말로 낡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오래된 것이 때로 새로울 수도 있다. 문제는 방향이 아니라 현재와의 관계이다.
중국 고전을 읽으라는 말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을 보면 그들의 눈빛에서 냉소를 읽을 수 있다. 그렇게 낡고 진부한 것을 읽어 무엇하느냐는 반응. 거기에는 모멸이 실려 있기도 하다. 한자나 중국어 따위는 좀 무식해 보이지 않나. 그러나 루쉰의 시대에 서구의 것을 비판했던 ‘옛 선비’들의 모습을 보라. 저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무시하기에 바쁘다. 자대自大의 정신이 바로 거기에 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말한다. 영어는 세련되었지만 중국어는, 한문은 낡았다. 현대 소설은 신선하나 고전은 진부하다. 현재의 공기를 보고 저 말을 기억하자. 저 말이야 말로 얼마나 낡은 말인가. 통념을 넘어서지 못하는 말, 말하지 않아도 될 말. 말하기 전에 이미 답이 정해진 말. 루쉰의 말을 빌리면 ‘현재를 죽이는 말’이다. 루쉰이 손가락질 한 ‘현재의 도살자’를 멀리서 찾지 말자.
돌아가자. 루쉰은 자대自大 자체를 비판하지 않았다. 문제는 별로 자랑할 만한 것도 없으면서 자랑으로 삼는 태도이다. 왜소한 자의 커다란 정신. 루쉰이 긍정하는 ‘자대’를 보자.
‘개인적 자대’는 바로 독특함이고 용중庸衆에 대한 선전포고이다. 정신병리학적인 과대망상을 제외하면 자대하는 사람은 대체로 약간의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 … 모든 새로운 사상은 그들로부터 나온다. 정치적, 종교적, 도덕적 개혁 역시 그들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개인적 자대’가 많은 국민은 정녕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가! 대단한 행운이다!
<열풍: 수감록 38>, 루쉰 전집
여기서 니체의 냄새를 맡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테다. 니체가 기대한 초인, 소수의 고귀한 사람이야말로 루쉰이 긍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그가 비판하는 ‘군중적 자대’나 ‘애국적 자대’ 역시 니체도 비판했다. 루쉰은 그들이 ‘동당벌이同黨伐異이고, 소수의 천재에 대한 선전포고’라 말한다. 다수의 약자가 소수의 강자에게 휘두르는 폭력. 이를 인지했기 때문에 루쉰에게 계몽주의자적 면모가 보이지만 민중에 대한 맹목적 지지를 발견할 수는 없다. 도리어 그는 약자의 무리가 어떤 폭력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폭군의 신민은 폭정이 타인의 머리에 떨어지기만을 바란다. 그는 즐겁게 구경하며 ‘잔혹’을 오락으로 삼고 ‘타인의 고통’을 감상거리나 위안거리로 삼는다.
자신의 장기는 ‘운 좋게 피하는 것’뿐이다.
‘운 좋게 피한’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다시 희생으로 뽑혀 폭군 치하에 있는 피에 목마른 신민들의 욕망을 채워 주게 되지만,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죽는 사람은 ‘아이고’하고, 산 사람은 즐거워하고 있다.
<열풍: 폭군의 신민>, 루쉰 전집
운 좋게 피하기만 하는 사람들. 운 좋게 피했기에 다행히도 즐겁게 구경할 수 있는 잔혹한 인간들. 루쉰의 글에서 이 무리는 여러 얼굴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도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 바로 ‘온다’라는 거다. 정체가 무엇이건 상관없다. ‘온다’야 말로 가장 두렵다.
루쉰은 말한다. 무슨 ‘주의’가 있다고 한들 그것으로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더라. 그 무슨 주의가 온다 하여도 중국인의 정신, 더 정확히는 ‘국수의 정신’을 어지럽힐 수 없다. 그 어떤 사상도 운동도 두렵지 않다. 다만 ‘온다’만은 두렵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온다’가 온다면 대체 무엇이 오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온다’는 막을 수도 없다.
‘온다’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은 쉽게 해결할 수도 없다. ‘온다’는 막을 수 없다. 다만 ‘온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입을 틀어막을 뿐이다. 그러나 ‘온다’는 오고야 말 것이기에 이 두려움은 끝내 해결되지 않는다. 이 두려움을 몰아내기보다는 두려움이 없는 세대를 기다리는 게 낫다. 새 시대는 오고야 말 것이므로.
그렇다고 루쉰이 단순히 미래 지향적 인물이라 쉽게 생각하지 말자. 루쉰은 자신의 시대가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어떤 뚜렷한 목표를 정해놓고 저기로 달려가야 한다 주장하지는 않았다. 당대 혹은 후대의 사람들은 공화국, 민주, 자유, 평등 따위를 입에 올렸다. 루쉰이 입에 담은 것은 ‘청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그가 기대한, 알 수 없는 미래에 붙인 이름일 뿐이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가지 않음, 멈춤이 문제라 보았다. 길은 어디로 나건 상관없다. 문제는 길을 내지 못한다는 데 있다. 루쉰의 말을 빌리면 ‘오롯이 자포자기를 권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냉소’가 있다.
所以我時常害怕,願中國青年都擺脫冷氣,只是向上走,不必聽自暴自棄者流的話。能做事的做事,能發聲的發聲。有一分熱,發一分光,就令螢火一般,也可以在黑暗裡發一點光,不必等候炬火。
此後如竟沒有炬火:我便是唯一的光。倘若有了炬火,出了太陽,我們自然心悅誠服的消失。不但毫無不平,而且還要隨喜讚美這炬火或太陽;因為他照了人類,連我都在內。
그러므로 나는 항상 두려워하며, 중국의 청년들이 냉기를 벗어나 자포자기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 말고 오로지 앞을 향하여 걸어가기를 바란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일하고, 소리 낼 수 있는 사람은 소리를 내라. 한점의 열이 있으면 한 점의 빛을 발하라. 반딧불이처럼 어둠 속에서 한 점의 빛을 발할 수 있다면 꼭 횃불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앞으로 끝내 횃불이 없다면, 내가 바로 유일한 빛이다. 횃불이 나타나고 태양이 출현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레 기꺼이 복종하며 사라질 것이다.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횃불이나 태양을 수희하며 찬미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를 포함한 모든 인류를 비추기 때문이다.
<열풍: 수감록 41>, 루쉰 전집
빛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바로 유일한 빛이다.’ 루쉰은 단언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끝내 기다리던 횃불은 만나지 못할 것이다.’
루쉰은 고독한 글이다.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를 기대하지 않았다. 친구보다는 원수가 많았으며, 친구라고 해야 기껏 올빼미, 뱀, 귀신, 괴물 따위였다. 그는 ‘황금세계’를 지향하지 않았다. 그 길은 좁고 외로운 길이었다. 혼자라도 나아가는 것이 루쉰의 길이다.
그렇다고 그가 초인을 자처한 것은 아니었다. 초인이 되라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 니체의 말에 비하면 그의 말에는 냉기가 섞여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가 될 수 없었다. 니체는 초인, 곧 바다를 보여주었다 말한다. 그러나 루쉰이 말하는 것은 고작 작은 웅덩이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길이라는 것도 그리 거대한 게 아니다. 반딧불이가 횃불이 될 수 있는 것은 한 점의 불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縱令不過一窪淺水,也可以學學大海;橫堅都是水,可以相通。幾粒石子,任他們暗地裡擲來;幾滴穢水,任他們從背後潑來就是了。
這還算不到「大侮蔑」——因為大侮蔑也須有膽力。
웅덩이에 지나지 않더라도 대해大海를 배울 수 있다. 여하튼 간에 모두 물이므로 서로 통하는 것이다. 그들이 돌멩이 몇 개를 몰래 던지더라도 내버려 두고, 그들이 구정물 몇 방울을 등 뒤에서 뿌리더라도 내버려 두면 그뿐이다.
이러한 것들은 ‘큰 모독’이라고 할 수 없다. 큰 모독이라면 모름지기 담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열풍: 수감록 41>
웅덩이면 어떠랴. 돌멩이 몇 개를 던지더라도 내버려두자. 왜? ‘큰 모독’이 아니므로 무릇 큰 모독이란 담력이 있어야 한단다. 따져보면 맞다. 용맹한 자는 고작 돌멩이 따위를 던지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