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풍 #3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금은 한 해의 마지막 깊은 밤, 이 밤도 깊어 거의 끝나간다. 나의 생명, 적어도 생명의 일부는 이미 이 무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적는 데에 쓰여졌다. 하지만 내가 얻은 것은 내 자신의 영혼의 황량함과 거칠음뿐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이것들을 겁내지도, 덮어 두고 싶지도 않으며, 게다가 정말이지 조금은 이것들을 아끼고 있다. 이건 내가 모래바람 속에서 엎치락뒤치락 살아온 흔적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모래바람 속에서 엎지착뒤치락 살고 있다고 여기는 이라면 이 말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1925년 12월 31일 밤
<화개집: 제기>
좋은 글은 어떤 글인가? 피와 살이 되는 글, 아니, 피와 살인 글이 좋은 글이라 생각한다. 생명의 흔적!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만날 수 있을까. <열풍> 마지막 글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짧은 부기附記이다. ‘1925년 9월 24일 신열과 두통 속에서 쓰다’라는 말.
그는 자신의 적을 하나씩 논파해나가고 있지만, 풍자와 비꼼을 더해 적을 한바탕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지만, 그 자신은 유쾌하지 못하다. 그의 글에 문득문득 묻어나는, 통렬한 비판 뒤에 은근슬쩍 비치는 비애는 대체 어디서 출발하는 걸까?
그건 우선 자신도 그가 공격하는 대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자각 때문이었을 테다. 그는 남을 해부하지만 그와 함께 자신도 해부한다 말했다. 그의 공격 대상은 '남'만이 아니었다. 자신도 그 언저리 어딘가에 걸쳐 있다. 그의 투창은 자신을 향하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구시대의 몰락을 바랐을 때, 청년-아이를 이야기하는 순간 그는 청년-아이의 입장에서 말하는 게 아니다. 자신도 몰락해야 하는 구세대 가운데 하나였다. 국수주의자를 비판하면서, 그들의 문장을 하나씩 꼬집어 언급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결코 고문에 문외한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야말로 국수주의자들의 마음이나 생각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凡有犧牲在祭壇前瀝血之後,所留給大家的,實在只有“散胙”這一件事了。
무릇 희생이 제단 앞에 피를 뿌린 후에 사람들에게 남겨지는 것은 정녕 ‘제사 고기 나눠먹기’라는 한 가지 뿐인 것이다.
<열풍: 작은 일을 보면 큰 일을 알 수 있다>
그는 국수주의자, 전통-현재를 고수하려는 이들을 비판한 동시에 ‘희생’을 구경하는 이들에게 냉담한 시선을 던진다. 싸움이 벌어지는데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기만 하는 이들이 있다. 지켜보기를 즐겨하는 자들. 과거 루쉰 역시 구경꾼 가운데 하나였던 적이 있었다. 국수주의자처럼 구경꾼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루쉰 글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구경꾼을 주목하라.
희생이 무대에 등장했을 때, 만약 기개가 있다면 그들은 비장극을 본 것이고, 만약 벌벌 떨고 있다면 그들은 골계극을 본 것입니다. … 이러한 군중에 대해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차라리 그들이 볼 수 있는 연극을 없애 버리는 것이 도리어 치료책입니다. 바로 일시적으로 깜짝 놀라게 하는 희생은 필요하지 않고 묵묵하고 끈기 있는 투쟁이 더 낫습니다.
<무덤: 노라는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가>
엎치락뒤치락 끊임없이 바뀌는 시대의 변화 가운데 ‘희생’이란 제사상의 고기와 같을 뿐이다. 군중은 그를 유쾌하게 지켜본다. 마치 양가죽을 벗기는 것을 구경하는 것처럼. 그 가운데 일부는 벌써 입맛을 다시고 있다. 희생이 생겼다는 것은 곧 먹을 것이 생긴다는 의미이므로. 따라서 루쉰에게 식인食人의 표상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전통, 특히 문자의 힘을 빌어 사람을 잡아먹는 이들. 다른 하나는 희생 주변에 몰려들어 고깃덩어리를 기다리는 구경꾼들.
루쉰은 이를 대하는 방법으로 ‘묵묵하고 끈기 있는 투쟁’을 제안한다. 묵묵하고 끈기 있는 투쟁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루쉰이 그려내는 모습은 우리가 쉽게 생각해낼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뢰정신’이다. 끈기로 번역된 원문을 보면 인성韧性이다. 끈질김, 무턱대고 들이미는 정신이다.
예를 들어 남의 짐을 하나 옮겨 주면서 그들은 2원을 요구하고, 짐이 작다고 말해도 그들은 2원을 내라고 말하고, 길이 가깝다고 말해도 그들은 2원을 내라고 말하고, 옮기지 말라고 말해도 그들은 여전히 2원을 내라고 말합니다. 물론 건달들을 본받을 것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그들의 끈기만은 크게 탄복할 만합니다.
<무덤: 노라는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가?>
다시 잘 보자. 루쉰은 무뢰배의 저 행위가 좋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저 반복하는 행위를 가능케 하는 어떤 정신을 말하고 싶은 거다. 그들은 끝내 자신이 받아야 할 것을 받아내고 만다. 왜 저들은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까. '2원을!'이라고. 일단 그것은 그들의 생계가 걸린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것은 생활인으로서의 자기 존재 증명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렇게 말했을 거다. 가까운 곳은 2원 먼 곳은 4원. 한편 이윤에 더 밝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본래 5원이나, 3원으로 깎아주겠소. 그러나 그들의 말은 지겹도록 똑같다. 2원.
루쉰은 묻는다. 로라는 집을 떠난 뒤 어떻게 되었을까? 꼭두각시와 같던, 인형과도 같던 그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일단 루쉰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집으로 돌아갔거나 아니면 타락했거나. 인형의 집에서 떠난 뒤, 꿈에서 깨어난 뒤는 무엇일까? 루쉰의 다른 말로 옮기면 ‘사막’이라 부를 수 있다. 앞서 말했던 ‘모래 바람 속의 삶’
가장 좋은 건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대로 꿈꾸는 것. 비록 그것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꿈을 깨어난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는 다른 꿈을 찾는 것. 또 하나는 사막의 생존법을 익히는 것. 루쉰의 선택은 후자이다. 물론 그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 다시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난 자가 ‘스스로 꾸는 꿈’이란 얼마나 이상한가. 희망이란 그처럼 허망하다.
루쉰은 낙관과 비관을 오간다. 앞서 그는 진보라는 낙관을 이야기하지 않았나. 이때는 진보를 막는 이들 국수주의자를 제거하면 된다. 진보란 천연天然, 즉 자연적이므로 진보의 전진을 막는 장애물만 제거하면 된다. 그러나 루쉰은 또 다른 어려움을 발견한다. 로라가 집을 떠난 것이 끝이 아니듯, 국수주의자들을 깨부순다고 끝은 아니다. 삶은 이어지기 마련이다. 마치 모래바람 속을 걷는 것과 같은.
루쉰은 그 황량한 길을 무뢰한의 덕목을 가지고 걸어가라 말한다. 그는 걷는다. 왜? 나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걷는다. 왜? 멈춰있지 않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는 걷는다. 왜? 가만히 있지 못해서도 아니다. 그는 걷는다. 왜? 도대체 왜?
루쉰이 당면한 시대는, 그가 직면한 삶이란 마치 사막 위를 걷는 것과 같다. ‘사막보다도 훨씬 무서운 인간 세상이 여기에 있다.’(‘러시아 가극단’을 위하여) 이 막막한 땅 위를 내딛는 발걸음은 무엇인가. 오아시스를 찾거나 평원에 다다른다는 전망이 그를 이끄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는 삶이란 본디 그런 것이라는 뻔한 대답을 내놓지 않을까. 그러나 역설적으로 여기에 새로운 발견이 있다. 허망 위에도 생명의 약진은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생명의 일부를 썼다고 말할 때조차 그것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소진燒盡과는 다르다. 그는 어쩌면 글을 쓰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황량하고 거친 영혼을 대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막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곳에 유일한 환영이라고는 제 그림자밖에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