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침 #2
‘소설’ <광인일기>를 읽고 어땠는지? 아마 자못 실망하지 않았을지 싶다. 분량도 짧고 등장하는 인물도 단편적이다. 과연 그의 소설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당대에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게 이런 단평을 짓지 말라고 권한 사람도 있다. 그 호의를 나는 매우 고맙게 여기고 있으며, 창작의 소중함을 모르는 바도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지어야 할 때라면, 아마 아무래도 이런 것을 지어야 할 것이다. 만약 예술의 궁전에 이렇게 번거로운 금령禁令이 있다면, 차라리 들어가지 않는 게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막 위에 선 채 바람에 휘날리는 모래와 구르는 돌을 바라보면서, 기쁘면 크게 웃고, 슬프면 크게 울부짖고, 화가 나면 마구 욕하고, 설사 모래와 자갈에 온몸이 거칠어지고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며, 때로 자신의 엉킨 피를 어루만지면서 꽃무늬인양 여길지라도, 중국의 문사들을 좇아 셰익스피어를 모시고 버터 바른 빵을 먹는 재미만 못하리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화개집: 제기>
문학文學의 고유한 영역은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문득 ‘文’이라는 글자에 눈이 간다. 본디 ‘문’이란 무늬를 의미하는 글자이다. ‘문’이란 늘 어떤 구체성을 띄기 마련이다. 따라서 추상적 세계를 창조하려는 욕망으로 끊임없이 날아오르는 문학이 있는가 하면, 한편 구체적인 이 세계로 끊임없이 추락해 떨어지기도 하는 문학 있는 게 아닐까. 무튼, 루쉰의 글에는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그렇다고 루쉰이 살아갔던 약 100여 년 전 시대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의 글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뒷걸음치지는 말자. 모든 글이 그렇겠지만, 글은 고유의 세계를 지니고 있는 하나의 완성물이다. 배경을 잘 모른다 해서 글을 못 읽으리라는 생각은 접어두자. 도리어 어떤 선입견이 글을 읽어내는 데 방해가 되는 수도 있으니. 도리어 시대를 통해 그의 글을 읽기보다는 그의 글에 묻어 있는 그 시대의 분위기를 읽어보는 게 좋다. 그는 대체 어떤 세상을 살았던 것일까? 따져보면 그와 우리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다. 시간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24효도孝圖>라는 글을 보자. 여기서는 루쉰이 공격하고자 하는 대상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참고로 ‘효도孝道’와 ‘효도孝圖’는 다르다. 루쉰이 이야기하는 ‘효도’란 후자로, 효에 관한 그림을 가리킨다. 즉, <24효도>란 효에 관한 24가지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긴 짧은 책을 말한다. 우리에게 비슷한 게 있다면 <삼강오륜도>와 같은 게 있을 테다.
너무 오래된 까닭에 그가 본 그림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어린 시절 그 책을 통해 익힌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크게 멀지 않은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대숲에서 눈물로 대순을 돋아나게 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순, 죽순을 먹고 싶어 하시는 부모를 위해 대나무 숲에 갔다가 구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자 죽순이 돋아났다는 이야기이다. 한편 루쉰이 읽었다는 <얼음 강에 엎드려 잉어를 구하다>는 건 어떨까?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이 효자는 겨울에 잉어를 구하려고 얼어붙은 강에 엎드렸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짐작할 수 있듯 효성스런 마음으로 잉어를 구해 돌아왔다는 아름다운 이야기. 루쉰의 말을 빌리면 목숨을 돌보지 않고 효성으로 신명을 감동시키면 뜻밖의 기적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죽순과 잉어에 얽힌 이야기 이외에도 우리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병들고 쇠약한 부모를 위해 진귀한 먹거리를 찾아다는 이야기는 이외에도 많다. 다만 중요한 것은 효자는 등장하기 앞서 꼭 구하기 힘든 상황을 맞아야 한다는 점. 그래서 이런 류의 이야기는 추운 겨울, 그것도 눈이 푹푹 쌓이고 얼음이 꽁꽁 언 한 겨울을 배경으로 한다. 모두 한 번씩은 들어봤을 터다. 한 겨울 병든 부모를 위해 산딸기 따위를 찾아갔다는 효자의 이야기를. 대체 어디서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루쉰이 보았던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우리도 어린 시절 읽거나 듣고는 했다.
문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얻는 자연스러운 결론은 효자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루쉰도 이렇게 말한다.
남에게서 스물네 가지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효도’란 그렇듯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따라서 효자가 되려고 했던 과거의 어리석은 생각도 여지없이 깨졌기 때문이다.
... 그땐 나이가 어리고 철이 없었으므로 ‘효도’란 것을 제 소견대로 해석하여 그저 ‘말을 듣고’, ‘명령에 복종하며’ 커서는 늙으신 부모님께 음식대접이나 잘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효자에 관한 이 교과서를 얻은 다음부터는 그런 정도로는 어림도 없으며 그보다 몇십 배, 몇백 배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침 꽃 저녁에 줍다 : 24효도>
맞다 효는 어렵다. 효도는 늘 불가능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효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어려움을 더해 루쉰이 예로든 ‘곽거의 이야기’ 같은 것도 있다. 내용은 이렇다.
“한나라 시대 곽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집이 몹시 가난했다. 그에게는 세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곽거의 어머니는 늘 자기의 식량을 줄여 어린 손자를 먹였다. 그래서 곽거는 아내를 보고 ‘우리가 살림이 구차하여 어머니를 공양할 수 없는 데다 애놈이 어머니의 밥그릇에 달라붙기까지 하는구려, 차라리 이놈을 파묻어 버리는 게 어떻겠소?’하고 말했다.”
<24효도>
그래서 곽거는 아이를 파묻기 위해 땅을 판다. 그러나 걱정하지는 말자. 이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잉어를 구하기 위해 얼음 강에 엎드린 효자가 물에 빠져 죽지 않았고, 한 겨울 산딸기를 구하러 산에 오른 효자가 얼어 죽지 않았던 것처럼. 암, 효자에게 불행이 닥치겠는가? 결국 이야기는 곽거가 땅을 파다 황금을 담은 항아리를 발견했다는 결말로 끝난다. 하늘이 곽거의 효성에 감동하여 항아리를 주었다는 내용이 덤으로 붙어서.
이런 효자 이야기는 어떤가? 곽거의 이야기를 읽어보니 어떤 생각이 드는가? 너무 심하지 않으냐고? 루쉰의 연구에 따르면 본디 곽거의 이야기는 이보다는 좀 약한 수준이었단다. 후대에 더 이야기에 살이 붙으면서 더 참혹한 이야기로 바뀐 것. 아마 효자의 심성을 잘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을 테다.
따라서 우리도 곽거 이야기에는 미치지 않더라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는 했다. 흉년이 들었을 때 허벅지를 베어 부모에게 먹였다는 이야기는 어떤가?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판 심청이의 이야기를 기억하자. 아마 어렸을 때 한 번쯤 들어보았을 텐데,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흥미롭게도 어린 루쉰은 곽거의 이야기를 읽으며 진땀을 흘렸단다.
처음에 나는 그 아이를 대신해 손에 진땀이 났다. 그러나 황금 한 솥이 나온 다음에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나는 벌써 내 자신이 효자 노릇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효자노릇을 할까 봐 두려웠다. 그때는 우리 집 살림이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었으므로 늘 부모님께서 끼니거리 때문에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다. 게다가 할머니까지 늙으셨으니 아버지가 곽거를 본받으신다면 땅에 파묻히게 될 것은 영락없이 내가 아니겠는가? 만일 그 이야기와 조금도 다르없이 황금 한 솥이 나온다면 그건 말할 것도 없이 큰 복이겠지만, 어린 나이에도 그때는 벌써 세상에 그처럼 공교로운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던 듯하다.
<24효도>
어떤가? 집이 가난한 데다 흉년이 들면 허벅지를 베어야 하나는 식의 고민을 해보았는지? 혹시 아버지가 눈이 멀어, 아니 어디에 큰 빚을 지고 오면 내 몸을 팔아서라도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거나,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지. 그래서 이런 효자 이야기에서 감동을 느끼기보다는 섬뜩함을 느껴본 적이 있는지.
교훈을 주는 이야기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과장된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원칙적으로 이해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과대망상 아니냐고. 그러나 한번 이렇게 질문하면 어떨까? 어쩌면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에 숨겨진 폭력성을 읽을 수 없었던 건 아닌가? 그가 너무 예민한 게 아니라 우리가 너무 무딘 게 문제 아닐까?
여기서 덧붙이는 하나의 질문. 인당수에 몸을 던진 효녀 심청은 그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는 공양미 삼백석으로 아버지의 눈을 뜰 수 있다 믿었을까? 그렇다면 왜 황후가 되어 각지의 ‘맹인’들을 불러 모았을까. 맹인이었다 눈을 뜬 자를 부르지 않고. 왜 우리는 공양미 삼백석에도 불구하고 심봉사가 눈을 뜨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제 삼지 않았을까?
<광인일기>의 시작은 흥미롭다. 마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일기를 입수하여 소개하는 식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위한 장치라고 이해하자. 그보다는 시작의 딱딱한 문체에 눈을 기울이자.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시작의 짧은 단락은 뒤의 글과 문체가 다르다. 이는 글 쓴 사람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 광인일기를 소개하는 사람과 광인일기를 쓴 사람 – 광인일기에서 다루는 문제를 더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당시 중국에서는 고문古文과 백화문白話文 논쟁이 있었다. 고문이란 옛 한문 문장을 말한다. 백화문은 당시 사람들의 입말을 가리킨다. 글을 쓸 때 어떤 형식으로 써야 하느냐가 당시 치열한 논쟁을 낳았다. 우리야 입말, 즉 일상에서 쓰는 말로 써야 한다 생각하지만 사실 이게 쉽지 않은 문제이다. 우리만 하더라도 문어文語, 글말과 구어口語, 입말이 조금은 다르지 않나. 지금이야 이 둘의 차이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루쉰 시절에는 매우 크게 달랐다. 게다가 근대 문물과 함께 말과 글도 크게 변하는 때였다.
루쉰은 백화문을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사실 앞에서 소개한 <24효도>는 백화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나는 어찌되었든 동서남북 위아래로 찾아 나서서 가장 지독하고 지독하고 지독한 저주의 글을 얻어 가지고 먼저 백화문을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인간들부터 저주하려고 한다. 설사 사람이 죽은 뒤에도 정말 영혼이 있어 이 극악한 마음으로 인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해도, 나는 결코 이 마음을 고쳐먹거나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어쨌든 먼저 백화문을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24효도>
그는 고문, 즉 옛글이 사람들의 정신을 옭아맨다고 생각했다. <24효도>를 이 문제로 시작하는 것은 24효도에서 말하는 ‘효도’라는 게 루쉰이 반대하는 옛글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새 시대의 새로운 말, 새로운 생각을 방해하는 낡은 정신.
따라서 광인일기의 첫 시작을 조심스레 읽어야 한다. 루쉰은 자신이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려 소설을 시작한다. 여기에는 분명 비꼬는 태도가 숨어 있다. 그러니 이름 모르는 이 글의 저자가 비록 광인을 두고 ‘피해망상증’이라 하였지만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말자. 광인, 미친 사람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를 미친 사람이라 부르는 밖의 사람들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광인일기>의 주인공, 광인은 ‘미친 사람’ 혹은 ‘피해망상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미친 사람이라 손가락질받는 사람’ 혹은 ‘피해를 입거나 피해를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대체 누가 그를 미쳤다고 하는가?
멀리 갈 것도 없이 <24효도>를 읽고 진땀을 흘렸던 루쉰을 기억하면 된다.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때 홀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 다른 사람과 달리 세계를 경험하고 느끼고 있는 사람. 무감각한 사람 눈에 보기에는 괴상한 사람, 나아가 ‘미친 사람’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앞서 소개한 <심청전>은 대표적인 판소리계 소설이다. 판소리를 부르는데 그 앞에서 ‘공양미 삼백석에 왜 눈이 안 떴어요?’라고 묻는다면 어떨까? 모르긴 해도 이야기를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라며 수군대는 사람이 있을 테다. 광인이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남들이 괜찮다고 느끼는 것을 문제 삼는 사람.
그러나 이것이 아무것이나 문제 삼는 건 아니라는 점을 다시 강조하자. 광인일기의 광인은 옛사람의 낡은 생각을 문제 삼는 사람이다. 앞서 루쉰은 그 사실을 슬쩍 일러주었다.
생각을 해 본다. 내가 자오구이 영감과 무슨 원수를 진 것일까? 길거리 사람들과는 또 무슨 원수를 진 거지? 이십 년 전 구주古久 선생의 낡아빠진 출납 장부를 짓밟아 그 양반 기분을 잡치게 한 일밖에 없는데. 자오구이 영감이 그를 알진 못하지만 분명 풍문을 듣고 분개하고 있는 게다. 길 가는 사람들을 꼬드겨 나를 철천지원수로 몰려는 게다. 그런데 꼬마들은? 그즈음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오늘 요상한 눈깔을 부라리고 있었던 게지?
<광인일기>
그는 무엇을 잘못했나? 구주古久 선생의 낡은 장부를 짓밟은 일이다. 여기서 ‘구주古久’를 우리말로 읽으면 ‘고구’가 되는데, 두 글자 모두 오래되고 낡았다는 뜻이다. 오래되고 낡은 선생의 낡은 장부를 짓밟았다는 건, 그가 낡은 옛글과 옛사람의 생각을 짓밟았다는 것의 비유로 읽을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광인일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와 비슷한 인간을 소개하자. 당시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주로 복장과 머리 모양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곤 했다. 단발斷髮, 머리를 자른 이들이 그렇다. 청나라의 머리 모양은 변발이었는데 그와는 달리 머리를 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서양 귀신에게 영혼을 판 사람이라며 손가락질받곤 했다. 조선의 경유에는 상투를 자른 사람을 떠올리면 된다.
신식 머리를 하고, 서양 옷을 입고 나타난 사람에게 사람들이 무어라 말했을지 생각해보자. 광인에게 했던 것과 유사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여기 하나의 문제가 있는데 어린 꼬마들까지 그를 놀려댄다는 점이다. 낡은 사람들이 낡은 정신을 옹호하는 건 그렇다 치자. 그러나 어린 꼬마들은 왜 그럴까?
그래, 알겠다. 놈들 에미 애비가 일러준 게야!
<광인일기>
그래, 새로운 시대은 쉽게 오지 않는다. 사람들의 정신을 바꾸기란 그처럼 어려운 일이다. 낡은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젊은 사람들까지 그 모양이니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이 답답함을 <서문>에서 부술 수 없는 철의 방에 갇힌 사람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광인일기>에서는 번뜩이는 섬뜩한 눈길 속에 살아가는 광인의 삶으로 비유할 수 있다. 철의 방처럼 사람들은 도무지 바뀔 줄을 모른다.
이런 심보를 지우고 마음 놓고 일을 하고 길을 걷고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다면 얼마나 편안할까. 그저 문지방 하나, 고비 하나만 넘으면 되는데, 그러나 저들은 부모, 형제, 부부, 친구, 사제, 원수, 생면부지의 사람들까지 한패가 되어 서로 격려하고 서로 견제하면서 죽어도 이 한 걸음을 내딛으려 하질 않으니.
<광인일기>
문제는 이 낡은 정신이 꽤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요즘 사람들이 두루 갖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이라는 데 문제가 멈추는 게 아니다. 오랜 역사를 통해 축적되고 쌓여온 결과가 이것이다. 광인은 역사책에서 두 글자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바로 ‘식인’이라는 그 두 글자를!
만사는 모름지기 따져 봐야 아는 법, 예로부터 사람을 다반사로 먹어왔다는 건 나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 확실치는 않다. 나는 역사책을 뒤져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 역사책에는 연대도 없고, 페이지마다 ‘인의仁義’니 ‘도덕道德’이니 하는 글자들이 비뚤비뚤 적혀 있었다. 어차피 잠을 자긴 글렀던 터라 한밤중까지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그러자 글자들 틈새로 웬 글자들이 드러났다. 책에 빼곡이 적혀 있는 두 글자는 ‘식인’이 아닌가!
<광인일기>
우선 광인이 읽었다는 역사책은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역사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연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인의, 도덕 따위가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역사책이란 역사를 담은 책, 과거 사람들의 생각을 담은 책을 가리킨다. 당시 중국을 배경으로 이야기하면 윤리도덕을 이야기하는 경서經書를 생각할 수 있다. 사람들의 생각을 결정하는 책. 여기서 그는 ‘식인’을 읽는다. 참고로 여기서 ‘식인’이라 번역된 것의 본래 글자는 ‘흘인吃人’이다. 뜻은 식인과 차이가 없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뜻이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니 어떻게!? <광인일기>에는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앞서 소개했던 <24효도>의 곽거 이야기를 떠올리면 된다. 즉,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특히 어리고 약한 사람을. 거꾸로 이는 누군가를 희생시켜도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흉년이 들었을 때 아이를 매장하자는 곽거의 말처럼. 왜 하필 아이였을까? 아이가 아무 힘없는 약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부모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약자老弱者’라는 말을 떠올려보자. 본디 이 말은 ‘늙고 약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늙어서 약해진 사람’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늙은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마저 있다. 대중교통에 마련된 노약자석은 본디 노인은 물론, 장애를 가진 사람, 어린이, 임산부 등 사회적 배려를 받아야 할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자리가 노인들만의 자리가 되어 버렸다. 머리가 하얗게 샌, 그러나 건장한 노인이 자리에 앉아 있고 그 옆에 어린 아이나 배부른 임산부가 서 있는 모습을 낯설지 않게 볼 수 있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루쉰은 <광인일기>를 통해 거꾸로 한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폭로한다. 누군가를 자연스럽게 희생하는 사회, 특히 어린아이의 희생을 자연스러운 것인 양 이야기하며 가르치는 사회를 루쉰은 비판한다. 과연 우리는 루쉰이 비판한 식인의 사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위에든 것이 너무 지엽적인 예인가? 그렇다면 아직도 우리에게 깊이 자리 잡은 ‘나이주의’는 어떤가? 왜 버릇, 여러 번 되풀이함으로써 저절로 익고 굳어진 행동이나 성질이라는 말을 이른바 나이 든 사람에게 쓸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버릇없는 아이는 있어도, 버릇없는 노인은 없다. 버릇없는 학생은 있어도 버릇없는 선생은 없듯이. 세계는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한편 광인이 찾아낸 ‘식인’이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비판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늘 희생자를 노리며 살아간다. 문제는 이 폭력성이 호랑이나 늑대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는 것이다. 루쉰이 비판한 이 폭력성은 단지 죽어 있는 존재를 향한다. 마치 하이에나의 그것처럼.
네놈들은 그저 죽은 고기밖에 먹을 줄 모르지! 무슨 책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하이에나’라는 짐승이 있다고 했다. 눈초리와 모양새는 볼썽 사나운 것이 늘상 죽은 고기만 먹고 거대한 뼈다귀도 아작아작 씹어서 뱃속으로 삼켜 버린단다.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하이애나’는 늑대의 친척이고 늑대는 개와 동족이다. 엊그제 자오씨네 개가 날 힐끔거린 걸 보면 그놈도 공모하기로 벌써 입을 맞춘 모양이다.
<광인일기>
오해하지 말자. 앞서 호랑이나 늑대와는 다르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하이에나가 늑대와 친척이란다. 비록 늑대라 하더라도 두 가지 늑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상대와 싸우는 늑대가 있는가 하면, 마치 자오씨네 개처럼 그저 상대를 노려보기만 하는 늑대도 있다. 노려보기만 하는 눈길, 이것이 루쉰이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이다. 누군가를 직접 죽이지는 않지만 죽음 뒤에, 혹은 죽음에 임박했을 때 이빨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싸움을 통해 강자가 되기보다는, 상대를 약자로 확인한 뒤에 강자로 자처하는 사람.
이들의 잔혹함에 대해서는 뒤에 이어질 작품으로 미루자. 다만 앞서 읽었던 <외침: 서문>의 구경꾼들이야 말로 이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어쩌면 이 무리, 구경꾼들이 감춘 이빨이야 말로 정말 무서운 게 아닐까?
광인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하나는 이 식인의 풍습이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거다. 자오씨네 개, 자오영감, 심장과 간을 튀겨 먹었다는 소작인들, 그리고 의술을 핑계로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노는 의원들만 식인 하는 게 아니다. 참고로 전통 의술에 대한 루쉰의 강력한 비판은 아버지의 죽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진귀한 약을 구하도록 했음에도 하나도 병을 치료하지 못한 그 무능력함. 아니, 식인이라 할 만한 그 잔혹함.
그는 그 가운데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식인의 무리, 그중에 광인의 형이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다짐한다.
사람을 먹는 자가 내 형일 줄이야!
내가 사람을 먹는 사람의 동생일 줄이야!
나 자신이 먹힌다 해도 여전히 사람을 먹는 사람의 동생일 줄이야!
...
사람을 먹는 사람을 저주함에 있어 먼저 형에서 시작하리라. 사람을 먹는 사람을 만류하는 일도 먼저 형부터 착수하리라.
<광인일기>
그러나 그의 형도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형도 다른 사람들처럼 바뀔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형은 그를 캄캄한 방에 가두었다. 그 방에서 광인은 옛 기억을 떠올린다. 옛 누이동생이 죽었을 때를. 광인의 누이동생은 다섯 살에 죽었다. 혹시 누이동생이 형에게 먹힌 건 아닐까? 그래, 형이 누이동생을 먹었다.
그렇다고 광인의 형이 실제로 어린 누이동생을 먹었다는 사실은 아니다. 아마 그렇다면 전혀 다른 소설이 되었을 것. 도리어 이는 알게 모르게 형이 누이동생을 희생시켜 버렸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형이 집안일을 관장할 때 누이동생이 죽었다.’ 어쨌든 책임이 형에게 있다. 대체 누이동생은 왜 죽었을까? 여러 상상이 가능하다. 병든 누이동생을 돌봐주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 병을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낡은 의원에게 그를 내보였을 수도 있다. 이유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누이동생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누이동생보다 부모가 더 중요하다 생각했다. 마치 곽거처럼.
누이동생은 형에게 먹혔다. 어머니는 알고 계셨을까. 알 수가 없다.
어머니도 알고 계셨을 게다. 그렇지만 울면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당연한 일로 여겼으리라. 내가 네댓 살 때였나. 대청 앞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는데 형이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부모가 병이 나면 자식된 자는 모름지기 한 점 살을 베어 삶아 드시게 해야 훌륭한 사람이라고. 어머니는 안 된다고 하진 않았다. 한 점을 먹을 수 있다면 물론 통째로도 먹을 수 있다.
<광인일기>
이렇게 곽거의 이야기는 이렇게 반복된다. 이 뿌리 깊은 낡은 정신. 과연 여기서 벗어나는 게 가능할까? 가까운 형도 저럴진대. 광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섬뜩한 발견을 만난다.
사천 년간 내내 사람을 먹어 온 곳. 오늘에서야 알았다. 나도 그 속에서 몇 년을 뒤섞여 살았다는 걸. 공교롭게도 형이 집안일을 관장할 때 누이동생이 죽었다. 저자가 음식에 섞어 몰래 우리에게 먹이지 않았노라 장담할 순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누이동생의 살점 몇 점을 먹지 않았노라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젠 내 차례인데......
사천 년간 사람을 먹은 이력을 가진 나, 처음엔 몰랐지만 이젠 알겠다. 제대로 된 인간을 만나기 어려움을!
<광인일기>
마지막 발견. 저들을 비판하는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의 식인의 역사 위에 태어나 살고 있지 않나. 마치 자연스레 에미 애비를 따라 낡은 정신을 반복 재생산하는 것처럼. 나 역시 식인의 풍습과 무관한 사람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광인은 이렇게 스스로를 발견한다. ‘사천 년간 사람을 먹은 이력을 가진 나’ 사람들과 형을 바꾼다는 것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 사천 년 간의 이력을 가진 나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소설은 별 답을 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외침>에서 만났던 그 막막함을 여기서도 만날 수 있다. 철의 방에서 살아나갈 가능성은 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또 다른 만남을 말한다는 점이다. 전혀 다른 사람, 사람 잡아먹는 이력을 지니지 않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 루쉰의 말을 빌리면 ‘제대로 된 인간’이 어딘가는 있지 않을까?
사람을 먹어 본 적 없는 아이가 혹 아직도 있을까?
아이를 구해야 할 텐데......
<광인일기>
에미 애비의 말에 물들지 않은 자. 루쉰이 분투했던 옛 습속에 물들지 않은 자.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인간. 도리어 그들을 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그것도 쉽지 않겠지만.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루쉰이 비판했던 그 비판이 오늘날에도 가능하다면, 식인 – 사람을 잡아먹는 폭력이 우리에게도 있다면, 아이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 자라도록 하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도 그저 새로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할까?
그래도 일말의 희망, 없다고 할 수 없는 희망이 있다. 광인은 말한다. ‘모름지기 한 점 살을 베어 삶아 드시게 해야 훌륭한 사람이라고. 어머니도 안 된다고 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한 사람이 필요하다. ‘안 된다고 하는 사람’ 광인의 외침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