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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May 18. 2018

내 길을 가고 있음을 알았다

외침 #3

혹한을 무릅쓰고 고향을 간다. 이천 리 떨어진, 이십여 년이나 떠나 있던 고향 말이다. 
<고향> (이하 인용문 모두)


루쉰 자신의 이야기이다. <외침: 서문>에서 이야기했듯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 여러 곳을 전전했다. 이른바 양무洋務, 서양의 지식을 배우겠다며 발을 내디딘 탓이다. 처음에는 해군 학교에, 그다음에는 철도 학교에 들어갔다. 이후 일본으로 넘어가 의학을 배웠다. 지금이야 해군과 철도, 의학이 좀처럼 이어지지 않으나 당시에는 이들을 한데 묶을 수 있었다. 모두 이른바 서양의 문물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루쉰의 삶을 살펴보면 그는 근대화의 기수가 되지는 못했다. 그 스스로도 ‘나라는 사람은 팔을 들어 외치면 호응하는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그런 영웅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외침 서문>)라고 말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그가 평범한 시대를 살았다면 조용히 고문古文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옛 비석을 베껴 쓰는 일을 소일거리로 삼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사람됨을 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1881년에 태어나 1936년에 세상을 떠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살았던 그의 생애처럼 그는 전통화 근대 사이에 어딘가 자리를 놓기 모호한 위치에 있다. 예를 들어 그보다 선배 격인 옌푸(嚴復, 1853~1921)를 생각해보자. 옌푸는 영국 유학 후 다양한 서양 저작을 중국에 옮겨온 사람이다. 그의 <천연론天演論>은 토마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를 번역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번역’이라 하기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우선 토마스 헉슬리의 글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상당 부분 옌푸 자신의 생각을 가미하였다. 어떻게 보면 토마스 헉슬리를 빌어 자신의 생각을 부연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한편 그는 고문古文투로 이 책을 옮겼다. 이는 백화문이 제대로 자리잡기 이전이기 때문이라 할 수도 있지만, 고문古文이야말로 새로운 사상을 옮기는데 적합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옌푸의 <천연론>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주목을 받았다. 젊은 시절 루쉰도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이른바 ‘양무’를 선도하는 책이었으며 실제로 당시 중국에서 그의 글은 최신의 이론이기도 했다. 그는 이후에도 수많은 서양 저작을 옮겼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스펜서의 <사회학 연구> 등. 그는 지금 보아도 괄목할 만한 작업을 진행했다. 이러니 옌푸야 말로 19세기 말, 20세기 초 근대화의 기수라 부를만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5.4 운동 이후 보수적인 행보를 보인다. 그는 캉유웨이와 함께 공교孔敎운동을 벌였다. 서양에 기독교가 있듯 중국에는 공자교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체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떤 이는 세상이 변화하였으나 그가 변하지 않았기에 그리되었다 평하기도 한다. 어쨌든 당시 중국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전선이 끊임없이 요동치는 상황이었다.


길게 옌푸 이야기를 꺼내놓은 것은 루쉰과의 비교에서 보이는 흥미로운 대조 때문이다. 옌푸는 서양의 지식을 수입하여 중국에 전하는 역할을 했다. 루쉰 역시 번역에 많은 공을 기울였다. 그러나 루쉰은 비교적 소수 문학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옌푸는 옛 고문을 버리지 않았고 고문과 서양 학문의 기묘한 만남을 낳았다. 루쉰은 누구보다 백화문을 앞서 주장했고 낡은 봉건 사유의 철저한 파괴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전방을 향해 있지만은 않다. 그의 문체, 그가 다루는 소재들 가운데 전통의 그림자가 얼마나 드리워있는지는 따로 고민해야 할 일이지만, 거꾸로 그에게 보이는 고문에 대한 관심과 태도만을 놓고 보면 과연 그가 과거로부터의 완벽한 단절을 주장했는지는 의문이다. 과연 그는 완벽한 근대인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루쉰에게 ‘계몽’의 문제가 쉬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의 문턱에서 루쉰은 봉건의 전사로 활약했으나, 그렇다고 그가 계몽의 선지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미래, 다르게 말하면 희망에 대한 기묘한 태도를 보임으로 당대의 흔한 계몽주의자들과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 지점, 그가 흔하디 흔한 계몽 문학가가 아닌 탓에 그의 글은 시대를 넘나드는 언어를 취득할 수 있었다. 동시대의 글과 비교해보아 지금 읽어도 낡은 느낌이 덜 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리라.


다시 돌아가면, 이러한 루쉰의 기묘한 특징은 그의 시대적 조건에서 우선 출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중국’과 중국 사이의 기묘한 텅 빈 공간 - 천하 제국과 근대국가 사이의 어정쩡한 시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역사에 접혀 들어가지 않는 어떤 공백지였다. 그러나 이 시기가 루쉰에게 오롯이 남아 있는 건, 루쉰 자체 - 그 인물의 어떠한 부분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옌푸가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 진화에 대한 믿음 자체가 없다. 근대라는 한 이념의 끄트머리에서 우리는 ‘근대’라는 선언 자체가 어떤 믿음 위에 서 비로소 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믿음’이야말로 근대를 지탱하는, 근대를 열망하는 힘의 근원일 진데 그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다. 아니, 그는 ‘믿음’ 자체가 부재한 ‘의심덩어리’로 보인다.


<고향>은 제목처럼 낡은 고향을 방문하여 겪은 사건들을 모았다. 고향을 떠난 지 이십여 년, 그간 한시도 잊지 못했던 곳이라 하지만 늘 현실보다 추억이 아름다운 법. 그의 고향도 중년의 루쉰 눈에는 성에 차지 않는다.


아! 이게 내가 이십여년 동안 한시도 잊지 못하던 고향이란 말인가?
내 기억 속의 고향은 이렇지 않았다. 그건 훨씬 더 근사했다. 그러나 기억 속의 그 아름다움을 떠올려 멋진 대목을 말하려 하면 영상도 사라지고 언어도 사라져 버린다. 마치 그런 것이라는 듯. 그래서 나 스스로 이렇게 해명하는 것이다. 고향도 본시 그렇다. 진보가 없다 한들 슬픔을 느낄 이유는 없다. 그저 내 심정의 변화일 뿐이니까. 게다가 이번 귀향에 설렘 같은 게 있지도 않았으니까.
이번 귀향은 이별을 위한 것이었다. 


고향에 돌아와 만나는 사람 가운데 룬투가 있다. 어린 시절 자신을 우물 안 개구리처럼 느끼게 한 친구. 룬투는 ‘차’라는 날쌘 동물이며, 바닷가의 정취들이며 아는 게 많았다. 룬투에 비해 루쉰은 ‘그저 마당 안 네 모서리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던 철 모르는 도령이었다. 격 없이 만났던 그 인물을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난다. 그러나 그 만남은 낯섦을 넘어 어떤 부끄러움을 빚어내고 만다. 잊고 있었던 그와의 신분적 거리가 그의 가슴을 후벼 판다.


그는 멈춰 섰다. 반가움과 쓸쓸함이 배어 나왔다.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소리로 맺히지는 못했다. 마침내 그의 태도가 깍듯해지기 시작하더니 어조가 분명해지는 것이었다. 
“나으리!……” 
오싹 소름이 돋는 듯했다. 우리 사이엔 이미 슬픈 장벽이 두텁게 가로놓여 있었다. 나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나으리께 절을 올리라’며 자식을 소개하는 그의 모습에 루쉰은 무엇을 읽어 냈을까? 어쩌면 옛 추억을 고리 삼아 이런저런 물건이라도 받아갈 요량으로 찾아온 억척스런 삶을 만나지 않았을지. 옛 인연은 만나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이 있다. 과거의 아름다운 환상이 깨어지는 까닭이다. 루쉰 역시 아름다운 추억은 돌이깈 수 없는 과거라는 사실을 직면한다. 그것뿐인가. 가없이 멀어진 룬투와 자신의 삶의 거리를 대면해야 했다. 


집안 가구를 처분하고 배에 짐과 몸을 실어 이동하며 루쉰은 문득 조카 훙얼과 룬투의 아들 수이성의 관계를 떠올린다. 새로운 관계는 새로운 세대에 맡겨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삶에게 고민거리는 넘기고 낡은 삶은 침묵하면 되겠으나, 의심 많은 루쉰은 ‘희망’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고 만다. 미래 세대에 이런 희망을 갖는 자체에 대한 의심을. 


희망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갖겠다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아직도 우상을 숭배하며 언제까지 연연해할 거냐고. 지금 내가 말하는 희망이라는 것도 나 자신이 만들어 낸 우상이 아닐까? 그의 소망은 비근한 것이고 내 소망은 아득한 것일 뿐. 


우상은 허망하다. 그러나 허망한 우상이라도 그것이 고단한 삶을 지탱해 낸다는 것마저 부인할 수 있을까. 루쉰은 그 스스로 여러 차례 사막에 서 있다 말하기도 했다. 사막, 끝없이 펼쳐진 아득한 땅 위에 내던져진 삶은 무엇이라도 찾기 마련이다. 비록 그것이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러니 희망이란 멈춰있지 않기 위해 잠시 필요한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일 테다. 아니, 어쩌면 어디라고 지칭할 수 없으나 나아가는 방향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게 아닐지. 


따져보면 목표가 있기에 삶이 있지 않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목표가 서로 오가며 나타났다 사라진다. 나아가다 문득, 저가 나아가는 길을 희망이라 부른 것일지도. 단지 희망이라는 이름을 빌려 붙여준 것일 뿐. 그렇기에 루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만하다.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몽롱한 가운데 바닷가 푸른 모래밭이 펼쳐져 있고 그 위 검푸른 하늘엔 노란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생각해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다니는 사람이 많다 보니 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가 한 시대의 기수가 되지 못한 것은 그가 마주한 길이 희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길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내딛는 사람이었다. 쉼 없이 걸아가는 분투의 흔적. 그러나 그것은 그만의 걸음이었기에 길이 되지 못했다. 루쉰은 루쉰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고독한 냄새가 난다. 그도 그가 어디로 가는 지를 알지 못했다. ‘어디로’가 빠져 있다 하여 그를 탓할 필요는 없다. 어느 한 곳에 정주하며, 또는 다른 사람들의 발걸음을 모방하여 사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세상에 그는 존재 만으로 가치가 있다. 


나는 드러누워 배 밑창의 철썩이는 물소리를 들으며 내가 내 길을 가고 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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