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침 #4
<아Q정전>이 세상에 나왔을 때 크게 주목을 받았단다. 왜?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걱정되어서.
<아Q정전>을 한 단락 한 단락 계속 발표할 때 많은 사람들이 다음번에는 자기 머리에 욕이 떨어질까 봐 겁에 질려 벌벌 떨던 일이 기억난다. 한 친구는 내 앞에서 어젯자 <아Q정전>의 한 단락이 자기를 욕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아Q정전>이 모모가 쓴 것이 아닌지 의심했는데 왜 그럴까? 왜냐하면 모모만이 이 사적인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의심이 더 짙어져서 <아Q정전>에서 욕하는 모든 것은 그의 사생활이라고 생각됐고 <아Q정전>을 싣는 신문과 관련된 필자는 모두 <아Q정전>의 작가라는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아Q정전>의 작가 이름을 수소문한 후에야 작가와 모르는 사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제야 그는 문득 깨닫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욕한 것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현대평론 제4권 제 89기>
<화개집속편의 속편 : <아Q정전>을 쓰게 된 연유>, 루쉰전집번역위원회
이런 까닭에 <아Q정전>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글이라 할만하다. 이른바 '아Q정신' 혹은 '아Q주의'라 불리는 ‘정신승리법’은 확실히 당대의 수많은 사람의 속마음을 폭로한 것이었다. 패배를 패배로 인정하기는커녕 또 다른 승리로 뒤바꿔버리는 새로운 정신. 여기에 ‘정신'의 승리야 말로 진정한 승리라고 믿는 강력한 믿음까지. 또 다른 약자에 대한 폭력, 권력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 게다가 아Q의 죽음에 대한 웨이좡 사람들은 어떤가. 부정적인 정신의 종합세트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Q의 저 정신은 20세기 초 중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Q식의 ‘정신승리’에는 턱없이 모자라더라도 자기합리화라는 유용한 태도를 얼마나 많이 지니고 있는가. 나도 ‘열심히 노력만 하면 더 잘할 수 있어. 아직은 실력 발휘를 하지 않은 거야.’라는 식으로 자신을 합리화한 적이 얼마나 많은지. 이런 자기 진단은,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정신승리의 문제는 스스로를 명확히 자각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점이다. 자기를 보지 못하고 승리한 자기를 보게 만든다. 아Q는 조서에 서명할 때조차 ‘손자 대가 되면 동그라미를 둥글디둥글게 잘 그릴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한다. 이제 아Q에게는 내일이 없는데 손자 타령이라니. 그는 도무지 제가 처한 상황을 알지 못한다. 아Q의 정신승리는 변화의 가능성조차 집어삼킨다. 아Q는 반성이라는 것을 모른다. 반성이 없으니 바뀌는 것도 없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야 죽음에 이른 자신의 현실을 발견한다. 그제야 ‘사람’으로서의 자각이 생긴다.
‘사람 살려…….’
(이하 인용은 <아Q정전>)
그러나 아Q는 이마저도 제대로 내뱉지 못한다. 너무 늦은 것이다.
<아Q정전>에서 아Q는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건달들에게 맞은 뒤 ‘아들놈한데 얻어 맞은 걸로 치지 뭐, 요즘 세상은 돼먹지가 않았어…….’라며 아Q가 흡족하게 발걸음을 돌렸다는 사실을 알자 건달들은 이렇게 말하며 그를 때린다.
“아Q, 이건 자식이 애비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야. 네 입으로 말해봐!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라고!”
아Q는 양손으로 변발 밑둥을 틀어쥐고는 머리를 뒤틀며 말했다.
“버러지를 때리는 거야, 그럼 됐지? 나는 버러지야, 이래도 안 놔?”
앞의 정신승리가 상대를 자식으로, 스스로를 아버지로 의식하며 자신의 우월을 담보하는 것이라면 뒤의 정신승리는 아래로 향한다. 사람에서 짐승으로, 나아가 버러지로. 돌아와 아큐는 ‘자기야말로 자기를 경멸할 수 있는 제일인자’라는 생각에 흡족해한다. 어쨌든 자기 경멸의 일인자도 ‘일인자’ 아닌가.
도박판에서 딴 돈을 다 잃고 돌아온 날 밤 아Q는 스스로 자신의 뺨을 때린다. 왜? 남을 때린 것 같은 쾌감을 느끼고 싶어서. 이렇게 자기 경멸은 폭력을 낳는다. 그날 밤은 자신의 뺨을 때렸지만 그 대상은 쉬이 바뀔 수 있다.
아Q는 자신의 일감을 가로챘다는 이유로 길에서 마주친 애송이D에게 시비를 건다.
며칠 뒤 그는 첸씨댁 담벼락 앞에서 애송이D와 맞닥뜨렸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는 법.” 아Q가 다가서자 애송이D도 멈춰 섰다.
“짐승 같은 놈!” 아Q는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입가에서 침이 튀었다.
“나는 버러지야, 됐어?……” 애송이D가 말했다.
이 겸손이 도리어 아Q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의 변발을 낚아채고는 똑같이 힘을 겨루는 상태가 된다. ‘네 개의 손이 두 개의 머리를 움켜쥐고는 허리를 구부리며 첸씨댁 담벼락에 푸른 무지개를 만들어 냈다.’ 두 버러지의 만남. 용호쌍박은 무승부로 끝나고 만다.
이 대목을 쉬이 넘기지 못하는 것은 바야흐로 오늘날 ‘버러지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 인간다운 삶의 시대에서 짐승의 시대로, 이제는 그 아래인 버러지의 시대가 도래했다. 어디를 가나 벌레들을 만날 수 있다. 급식충에서 맘충, 한남충과 틀딱충까지. 이 시대를 보았다면 루쉰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루쉰이 이야기한 것처럼 놀랍게도 오늘날 버러지의 ‘겸손’이 작동하고 있다. ‘~충’ 담론에는 단순히 ‘벌레 같은 놈’이라는 손가락질만 있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나도 벌레고 너도 벌레다’라는 식의 평등이 숨어 있다. 먼저 스스로 벌레가 되어야 타자를 벌레로 호명할 수 있다. 아Q가 애송이D의 말에 발끈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겸손에 숨은 속내를 읽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겸손은 ‘제일인자’라는 아Q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오늘날의 벌레들은 아Q보다 더 교묘하고 지혜롭다. 벌레는 스스로 벌레되기를 자처하면서 새로운 윤리적 기반을 닦아 놓았다. '나는 약하다 그러므로 나는 악하지 않다’. 나아가 '나는 약하다 그러므로 나는 옳다'는 식의. 그러나 이는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식의 지독히도 낡은 윤리를 다시 소환하여 자신의 방패막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거꾸로 아Q가 마지막 닿았던 ‘사람살려…….’라는 그 외마디에도 닿기 더 어려울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