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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May 18. 2018

엇갈리는 세 개의 시선

외침 #5

'루쉰'하면 대부분 <아Q정전>을 떠올린다. 루쉰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에게도 <아Q정전> 나아가 아Q의 ‘정신승리법’은 꽤 알려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루쉰의 다른 글처럼 <아Q정전>은 쉬이 읽히지 않는다. 흔히 루쉰은 <아Q정전>에서 하나의 전형성을 그려냈다고 평가받는다. 크게 보면 ‘정신승리법을 구사하는 약자’를 그려냈고, 작게 보면 ‘중국의 국민성’을 그려냈다고 하겠지만 그런 단순한 설명으로 그칠 수 있을까. 


<아Q정전>의 해석이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선 이 짧은 소설의 서술 태도 때문이다. <아Q정전>의 시작은 어떻게 하여 ‘정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에 대한 장황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 아Q라는 이름에 얽힌 사연까지. 이것이 없다면 <아Q정전>은 보다 깔끔한 글이 되었을 테다. 그러나 이 시작은, 그리고 <아Q 정전> 전체에 드리워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읽는 내내 혼선을 야기한다. 


<아Q 정전>을 단순히 아Q만의 이야기로 간단히 줄여 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보다 복잡하게 접근해보려 한다. <아Q정전>을 서술해 내려가는 익명의 화자, 그리고 아Q, 또한 그를 둘러싼 웨이장 사람을 셋으로 나누어 이들의 차이에 주목해 보자.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이 셋의 시선이 각각 서로 엇갈리고 있으며 그 엇갈림이 이 글의 난해함, 혹은 난잡함을 낳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 때문이다. 화자가 세상 및 아Q에 대해 갖는 태도. 아Q가 당시 시대, 특히 혁명당과 웨이장 사람들에 대해 갖는 태도. 웨이장 사람들이 아Q를 비롯한 외부 변화에 대한 태도까지. 이 셋은 과연 하나로 묶어지는가? 하나의 ‘초점’이라 부를 무엇이 있는가? 


<아Q정전>의 화자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외침>이라는 소설 속에 울리는 그 목소리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광인일기>와 비교할 때 <광인일기>의 화자는 ‘광인일기’를 소개하는 인물과 ‘광인일기’ 속의 광인으로 구분된다. <광인일기>는 액자식의 서술을 통해 화자와 주인공의 이야기를 구분해 놓았다. 그러나 <아 Q정전>의 저자와 화자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말을 건넨다.


이 화자는 바로 루쉰 자신이라 할 것이다. 물론 그가 루쉰이라는 역사적 인물과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외침>의 저자이자 화자로서 루쉰은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아니, 여러 글 가운데 지워지지 않고 묻어 나오는 루쉰의 체취가 있다고 할까. <아Q정전>이라는 이름을 소개하며 장황하게 써낸 글은 천두슈와 후스를 등장시키며 <아Q정전>이라는 글이 당대의 사상적 대립과 교착 가운데 있다는 점을 분명히 각인시킨다. 


제목을 두고 골몰한 끝에 ‘정전’이라는 이름을 힘겹게 찾아내어 임시로 붙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아Q정전>은 루쉰이 비꼬아 비판한 여러 역사서 가운데 하나처럼 훗날 ‘경전’이 되고 말았다. 루쉰은 <아Q정전>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아Q정전>은 중국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한 인물을 창조하고 말았다. ‘아Q’라는 불분명한 이름, 성씨도 행적도 불분명한 그 인물은 하나의 전형이 되어 각인되었다. <아Q정전>을 읽어봐도 아Q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아Q정전>은 아Q가 독립적인 존재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루쉰 자신은 역사에 기입되어버린 <아Q정전>, 이를 통해 생명을 부여받은 아Q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알 수 없다. 이 근본적 모순을 루쉰 당대에도 발견했을 텐데 이에 대한 루쉰의 입장이 잘 보이지 않는다. 질문을 바꿔, 루쉰이 아Q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를 물어보자. 루쉰은, 그리고 <아Q정전>의 화자는 아Q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가. 이 질문은 자연스레 아Q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낳는다.


아Q는 흔히 ‘중국의 국민성’을 드러낸 인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아Q정전>을 곱씹어 보면 아Q의 계급적 지위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는 스스로 한때 잘 나가던 시대가 있었다는 말로 자신의 과거를 슬쩍 드러낸다. 그의 언행을 보면 여느 사람들처럼 아무 뿌리 없는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사물을 부르는데 ‘금기’를 갖기도 하고, 쓸데없이 옛 말투를 툭툭 내뱉기도 한다. 정말 그는 자오 나리 댁과 아무런 연이 없는 인물일까?


그는 대처에 나가 여러 문물을 두루 돌아볼 줄 아는 인물이기도 하며, 혁명당에 대한 소문에 누구보다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보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는 <광인일기>에서 모습을 드러내었고, <쿵이지>에서 사라져 버린 옛 중국의 몰락한 ‘문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물은 아닐까. 


나는 루쉰이 두개의 중국 사이에 기묘하게 위치한 인물이라 생각한다. 전통적인 천하 제국으로서의 ‘중국’과 오늘날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근대국가로서의 중국. 아Q의 연배를 생각하면 대략 루쉰과 비슷한 나이가 되는데 그 역시 이 두 개의 중국에 기묘하게 놓인 삶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단절을 고려한다면, 아Q를 과연 ‘중국인’ 혹은 ‘중국의 민족성’이라 부르는 것이 옳을까? 반대로 단절된 사회 속에 운명이 뒤바뀐 전통적 인물군 가운데 하나가 아닐런지.


이것은 하나의 의심이기도 하고 질문이기도 한데, 어쩌면 루쉰이 바로 아Q 자신은 아니었을까. 아니, 자신 가운데 무엇을 꺼내어 아Q라는 인물을 세상에 내보인 게 아닐까. 흥미롭게도 오늘날 우리에게 아Q는 답 없이 답답하고 어리석은 인물로만 보이지만, 당시 <아Q정전>이 연재되면서 이 이야기에 마음을 졸인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한다. 대체 작가가 누구이기에 자신의 속살을 이렇게 세상에 까발리느냐며. 결국 작가가 자신과 무방한 사람인 것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렸다지만.


아Q에게서 몰락한 시대의 냄새를 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아Q를 소개하면서 중국을 입에 올리기 때문이다. 아Q의 정신승리법은 중국의 정신승리였으며, 그의 망각은 중국의 망각이었다. 흥미롭게도 아Q는 보통 승리의 기꺼운 마음을 품고 잠을 잔다. 쓰린 패배의 기억은 잠을 방해한다. 예를 들어 노름판에서 땄던 돈을 잃은 그날 그는 잠을 뒤척인다. 잠, 이는 <외침: 서문>에서 루쉰이 철의 방에서 이야기한 그 잠을 떠오르게 만든다. 이 잠은 몽매한 잠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기껍고 편안한 잠이기도 하다.


이 잠을 깨울 수 있을까? <서문>에서 던진 질문은 내내 해결되지 않는다. 아니, 근본적으로 잠을 깨운다 한들 철의 방을 부수는 일은 요원하다. 살아가는 시대의 변화는 한참이나 더디 오기 마련이다. 아Q의 이야기 속에 혁명이란 주제가 끼어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혁명이란 무엇이었을까. 1911년 루쉰이 경험한, 그리고 당대 사람들이 경험한 그 혁명이란 것은. 사실 이번에 <아Q정전>을 읽으며 눈이 가는 대목은 바로 혁명에 대한 아Q의 순진하고도 즉각적인 반응이다. 그는 혁명이 그저 멋있고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젖어 있다. 그리고 혁명이란 또 다른 '승리'를 위해 휘두를 수 있는 새로운 무기이기도 하다.


여기에 이르면 과연 <아Q정전>을 통해 혁명을 긍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루쉰은 다른 글에서 <아Q정전>을 통해 20~30년 뒤에도 일어날 혁명을 그려냈다고 하기도 했는데, 혁명이란 그런 광기 혹은 예측지 못한 욕망들이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 자리이다. 1911년 신해혁명의 결과와 무방하게 아Q의 혁명은 실패한다. 이는 무엇보다 웨이좡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때문이었다. 결국 아Q는 혁명당원으로 목숨을 잃지만 사람들에게 이는 별 관심거리가 아니다. 그는 총살당했으므로 나쁘다. 게다가 별 볼거리도 안 되었다.


아Q가 가진 독특한 자리와 비교할 때 웨이좡 사람들에 대한 기술은 덜 섬세하다. 따지고 보면 웨이좡 사람들이나 혹은 자오나리 댁, 가짜 양놈 들이야 말로 더 속물적인 인간이 아닌가. 늑대 무리와 같은 사람들. 그들에 대한 기술은 자연스레 <광인일기>에 나왔던 늑대촌 사람들을 불러낸다. 


대체 화자는 무엇을 비판하고자 한 것일까? 아Q가 손가락질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런 질문에 이르면 역설적이게도 아Q자신은 텅 비어 버리고 아Q를 그려낸 화자 자신과 웨이좡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군중이 남는다. 이들은 아Q를 계기로 모종의 관계를 맺지만 이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다. 다만 흥미로운 글 하나를 소개하도록 하자. 교과서에서 루쉰의 글이 삭제되는 상황에 대해 샤오랑이라는 필명의 인물이 쓴 글이란다.


근래에 인민교육출판사가 출판한 신판 ‘어문’ 교재에서 루쉰의 글이 삭제 되자 한바탕 논쟁이 일어났다.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필자는 근래 루쉰에 대한 화제가 침묵, 회피, 냉담 과정을 거쳤으므로 지금은 이미 그를 쫓아내는 시기가 당도했다고 생각한다.
루쉰이 쫓겨나는 까닭은 일찍이 그에게 공격당하고, 배척당하고, 조롱당하고, 가엾게 여겨지던 인물들이 다시 한 번 부활했기 때문이다. 루쉰의 존재는 그들을 두렵게 했고, 당황하게 했고, 비겁하게 했으며 심지어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 없게까지 했다. 
(…)
자오구이 영감, 자오치 나리, 캉씨 아저씨, 빨간 눈 아이, 왕털보, 샤오D 등의 인물이 부활했다. 어떤 자는 경찰 대오로 섞여 들어갔고, 어떤 자는 공동 방위 대원이나 도시 관리자가 되었다. 제복을 걸친 뒤 기쁨에 겨워 ‘축 늘어진 볼살을 실룩거리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그리고 손에는 ‘장팔사모’를 들고 합법적으로 사기를 치고 금품을 갈취하며 선량한 시민을 핍박하여 창기로 만들고 있다. 만약 샤씨 집안의 그 자식이 감옥에서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더는 “뺨을 두 대 올려부칠 필요도 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생각해보라! 이러한 고도의 수법들을 어찌 루쉰처럼 야박한 소인배들이 왈가왈부할 수 있겠는가?
아Q들이 부활했다. 서낭당에서 피시방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들이 팔뚝을 휘두르며 외치는 구호는 이미 “이 몸께서 혁명에 참여할 거다!”가 아니라 “이 몸께서 민주에 참여할 거다!”이다. 그들은 매일 꿈속에서 “흰 투구에 흰 갑옷을 입은” 미국 해병대를 노려보고 하루라도 빨리 그들을 죽여 중국에 민주주의를 건립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미국의 ‘민주주의’가 당도하기만 하면 자오치 나리댁의 재산과 우서방댁과 수재 마누라, 웨이좡 마을의 모든 여인이 내 것이 되기 때문이다. 흥! 그렇지만 루쉰은 한사코 나를 세상 사람들에게 수십 년 동안 조롱당하다가 억울하게 죽어가게 하려고 한다. 그러니 내가 어찌 너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아Q 생명의 여섯 순간>, 왕후이, 너머북스. 160~162쪽에서 재인용


루쉰은 그의 글을 한편의 풍자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대체 무엇을 풍자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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