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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May 19. 2018

빛(光)과 그림자(影)

외침 #6

오늘 밤 달빛이 참 좋다
내가 달을 못 본 지도 벌써 30여 년, 오늘 보니 정신이 번쩍 든다. 그러고 보니 지난 30여 년이 온통 미몽 속을 헤매였던 게다.
<광인일기>


<광인일기>의 광인은 달빛을 통해 어떤 자각을 얻는다. 그는 달빛을 보기 전 어둠 속에 있었다. 달리 말하면 감각되지 못한 어떤 상태, 그가 스스로 말함 미몽 속에 있었다 하는 게 옳다. 어떻게 보면 그는 계몽啓蒙, 즉 어두움에서 깨우침을 얻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enlightenment 계몽이란 빛을 비추어 어둠을 몰아내는 것을 말하지 않나.

 

저 유명한 플라톤의 비유를 기억하자. 동굴은 모상들의 공간이다. 그곳은 어두운 곳, 우연히 빛이 비추나 그곳에 가득한 것은 그림자 무더기일 뿐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불우한 철학자는 빛의 세계를 경험하고 온 사람이다. 빛의 세계 그곳에는 형상을 넘어 참된 것들이 존재하는 곳, 천상의 세계. 거꾸로 말하면 이 땅의 것들은 저마다 그늘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결코 껍데기를 벗어낸 맑고 밝은 존재를 알 수 없으리라. 플라톤 이후 철학은, 그리고 한걸음 나가 종교는 천상의 밝게 빛나는 그 존재를 찾는 여정을 이끈다.


혹자는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 부른다. 저 컴컴한 시대를 깨뜨린 것은 근대라는 새 시대의 발견이었다. 19세기 중국 역시 암흑으로 뒤덮인 곳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곳에 빛을 비추자. 천상으로 가는 계단을, 하다못해 천상의 불을 횃불로 들어 길을 밝히자. 


그런데 그 빛이 달빛이라면? 


사실 달빛이란 ‘빛’이라 부르기 민망한 존재다. 제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존재. 그래서 달빛이란 음습하고 불길한 빛이다. 그래서일까. 달빛 아래는 괴이한 것들이 많다. 늑대 인간도 흡혈귀도 달빛 아래서 제 세상을 맞는다. 이들은 태양을 두려워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렇다. 과학적 지식을 빌리면 달빛이란 태양의 빛을 그저 반사하는 것 아닌가. 


1918년 루쉰은 어째서 그의 소설 첫 시작을 ‘달빛’으로 시작한 것일까. 차라리 작렬하는 태양, 선명히 빛나는 그 빛 아래 놓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물론 그랬다면 ‘광인’이 가진 그 음습함은 없었을 것이다. 달빛은 그를 비추는 동시에 그에게 드리운 그림자를 몰아내기는커녕 더 증폭시킨다. 달빛이 비칠수록 그림자, 광인이 품은 음습함은 더 커지고 만다. 달빛 아래 우리는 무엇을 만날 수 있을까. 아마 저 명징한 철학자는, 태양을 사랑한 철인은 루쉰을 손가락질할지 모른다. 동굴 속에 또 동굴을 만드는 음흉한 인간이라고.


몽롱한 가운데 바닷가 푸른 모래밭이 펼쳐져 있고 그 위 검푸른 하늘엔 노란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생각해 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다니는 사람이 많다 보니 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고향>


루쉰과 비슷한 말을 한 철학자가 있다. 장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道行之而成 / 길은 다녀서 만들어진다.’ 루쉰의 저 말을 떠올리게 만드는 말이다. 그렇게 ‘길(路/道)’이란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 통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시대의 가치가 고스란히 체현된, 마땅히 나아가야 하는 경로, 시대와 개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의미하곤 한다. 사람들은 길이란 목적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루쉰의 발견처럼 길이란 본디 어디로 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다니다 보니 만들어진 것이라 해야 한다. 목적지 없는 길도 있는 법. 마찬가지로 희망이란 길 너머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길 자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 


저 오묘한 발견.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 이것이 달빛 아래에서 나왔다는 점을 기억하자. 어쩌면 달빛 역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과연 달빛은 빛인가? 저 철학자와 종교인, 계몽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그런 찬란한 빛이라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빛 아래였다면, 쨍쨍한 태양 아래였다면 루쉰의 발견도 달랐으리라. 태양 아래, 대지 위에 놓인 길은 결코 루쉰의 말과 같지 않을 것이다. 있거나 혹은 없거나 하겠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저 기묘한 자리는 결코 있을 수 없다.


빛에 대해 길게 이야한 것은 <흰 빛>이란 작품에 대해 말하기 위함이다. <흰 빛>은 쉽게 읽으면 <쿵이지>처럼 낡은 제도를 붙잡고 사는 불우한 지식인의 모습을 그려낸 글이다. 차이가 있다면 쿵이지는 ‘상큼하고 발랄한 공기'를 불러오는 인물인 반면 천스청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찌감치 문을 걸어 잠그’도록 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쿵이지는 아마 죽었겠지라며 씁쓸한 뒷맛을 남기지만 천스청은 발가벗은 주검으로 우리 앞에 그 최후를 드러낸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결정적 차이는 천스청에게서 마치 <광인일기>의 광인과 쿵이지를 겹쳐 놓은 것 같은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천스청은 흰 빛에 사로잡힌 인물이었다. 


<흰 빛>에서 ‘흰 빛’은 달 빛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야릇한 광채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그 어딘가 숨어 있다는 그를 따라다니던 ‘은자’의 환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빛은 우선 깊숙한 천스청의 불안한 내면에서 뿜어져 나온다.


서늘한 바람에 희끗한 그의 짧은 머리칼이 가볍게 흩날렸다. 초겨울 태양이 따뜻하게 그를 내리쬐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지러운 듯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피곤으로 충혈된 두 눈에선 야릇한 광채가 뿜어 나오고 있었다. 
(...) 
그는 또다시 주저앉았다. 눈빛이 유난히 번쩍거렸다. 눈엔 무수한 것들이 보였지만 희미했다. 무너져 내린 전도가 그 앞에 드러누워 있었다. 이 길이 점점 넓어지더니 그의 모든 길을 막아 버렸다.
<흰 빛>


길이 끊어진 그곳에서, 전도(前途/前程)이 무너져 내린 그 가운데 그는 까마득한 어둠에 내던져지는 것과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 전에도 그의 눈빛에서 야릇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곤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를 부여잡은 깊은 수렁이 그를 더욱 끌어당겼다, ‘또 땡쳤구먼’이라는 환청과 함께. 


앞의 말을 빌리면 천스청이야 말로 희망을 잃은 사람이라 할만하다. ‘스청(士成)’이라는 그의 이름과 무관하게 그는 급제와 전혀 거리가 멀었다. 낡아빠진 집을 떠나,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며, 가족을 꾸리는 것 등등 소중하게 간직한 미래의 전망이 모두 잿빛으로 물들고 말았다. 어쩌면 이를 읽는 독자는 천스청 앞에 놓인, 그가 알지 못하는 멀지 않은 미래를 내다볼 수도 있으리라. 어느 날 과거제도 조차 아예 폐지되어 버리는 날이 올 것이라는.


하늘은 바다처럼 푸르렀다. 뜬구름은 누군가가 물에 붓을 씻어 낸듯 하늘거렸다. 달은 천스청을 향해 냉랭한 빛을 쏟아붓고 있었다. 처음엔 방금 닦아 낸 쇠거울 같았는데, 신기하게 천스청의 전신을 투사하더니 이내 무쇠같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흰 빛>


그래, 달빛은 차다. 그 냉랭한 빛을 일러 ‘방금 닦아 낸 쇠 거울’ 같았다 말한다. 쇠거울의 차갑고도 음습한 기운이 그의 전신을 투과한다. 그러나 이 빛은 그 무엇도 비추지 않는다. 도리어 ‘무쇠 같은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이 그림자는 대체 무엇일까? 달빛에 비추어 생긴 그림자일까? 아니, 반대로 천스청을 투과하여 나타난, 천스청의 깊은 마음속 무엇이 아닐까.


실제로 달빛을 쬔 뒤 그는 또 다른 환청을 듣는다. ‘왼쪽으로 돌아서 오른쪽으로 돌아라.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가거라. 금이며 은이 수북할 테니.’ 낙방한 다른 날처럼 천스청은 발작에 시달린다. 저 옛날 할머니에게 들었던 은자를 찾겠다며 집안 구석구석을 파해치는 발작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잘 알고 있다. 환청은 환청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전히 허탕을 칠수 밖에 없다는 자명한 미래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발작은 발작이나, 이 발작은 무쇠 같은 빛이 만들어낸 무쇠 같은 그림자를 따라 한층 그를 사로잡는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얄궂은 결말로 인도한다. 


그런데 오늘은 쇠 같은 빛이 그를 뒤덮으며 또다시 그를 나긋이 이끄는 거였다. 혹시 그가 주저할세라 확실한 증거를 보여준 뒤 슬쩍 추임새를 넣음으로써 시선을 자기 집 쪽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흰 빛이 마치 흰 부채처럼 일렁이며 그의 집 안을 번쩍이고 있었다.
<흰 빛>


이 빛, 허옇게 음산한 이 빛은 그를 비추는 동시에 그를 사로잡는다. 이 쇠 같은 빛은 쇠 같은 그림자와 공명하며 천스청의 광기를 증폭시킨다. 그는 곡괭이를 집어 들고 땅을 파내려 간다. 모래를 만나고, 검은흙을, 벽돌 몇 장을 만나고, 다시 사기 조각 들을, 말발굽 모양의 것을, 그리고 썩은 뼈다귀까지. 


그가 우연히 파낸 이 뼈다귀, 아래턱뼈는 그에게 히죽거리며 말을 건넨다. ‘또 땡쳤구먼’ 그런데 이때 그가 몸을 숨기는 것은 처마 밑 어둠 속이다. 그 무엇도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공간, 이것과 저것의 구별이 사라진 컴컴한 곳. 어쩌면 필멸의 몰락으로 이끄는 그 광기를 막아줄 것은 이것뿐이 아닐까. 아주 컴컴한 어둠!


사자처럼 문 뒤로 달려가 괭이를 집는 순간 검은 그림자에 몸을 부딪히고 말았다.
(…)
오싹한 한기가 들어 순간 손을 놓아 버렸다. 턱뼈가 구덩이 속으로 데굴데굴 굴러 들어갔다. 그도 마당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집 안을 훔쳐보니 등불은 여전히 환히 켜져 있었고 턱뼈는 여전히 그를 조소하고 있었다. 하도 무서워서 그쪽을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만치 처마 밑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서야 마음이 안정되었다.
<흰 빛>


그는 결국 흰 빛을 좇아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간다. ‘아득하면서도 지척’인 흰 빛을 따라. 그를 비추던 등불마저 사라진 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루쉰은 그의 외마디 하나를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집을 떠나 성문을 나서는 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공포어린 희망의 비명이 여명 속 서문 앞에서 아지랑이처럼 떨리고 있었다.
<흰 빛>


‘공포어린 희망의 비명’이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가 좇고 있던 흰 빛이란 망가진 전도 대신 그가 찾은 희망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결국 그 희망에 어린 공포를 그는 떨쳐 낼 수 없었고, 끝내 그 희망이 이끈 곳에 이르지 못했다. 그가 언제 들어갔을지 모르는 저 강바닥 아래에도 그 흰빛은 없었다. 아마 그 순간에도 그저 어른거리지 않았을지.


달빛과 그림자. 달빛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빛이라면, 그림자 역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어둠이다. 이 기묘한 관계 속에 루쉰은 세계를 새롭게 조영照影해낸다. 그의 세계 속에서는 빛도 어두움도 없다. 비친 빛과 희미한 어둠만이 있을 뿐이다. 허망虛妄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여기서 어쩌면 루쉰은, 근대 철학의 낡은 문제, 주체와 인식과 대상 모두를 가볍게 뛰어넘고 있는지 모른다. 거기엔 비추는 자도, 비치는 대상도, 그리고 빛도 모두 불투명하다. 흐릿한 세계,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세계, 그러나 거기엔 진리도 거짓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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