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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02. 2018

나는 크게 웃고 노래하리라

들풀 #1

삶과 죽음, 그 모순의 현장 


<들풀> 서문은 역설로 시작한다. 


침묵하고 있을 때 나는 충실함을 느낀다. 입을 열려고 하면 공허함을 느낀다.
지난날의 생명은 벌써 죽었다. 나는 이 죽음을 크게 기뻐한다. 이로써 일찍이 살아 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죽은 생명은 벌써 썩었다. 나는 이 썩음을 크게 기뻐한다. 이로써 공허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난해하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어지럽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논리도, 어떤 서사 – 줄거리도 없다. 그의 글은 불친절하다. 어떤 감각을 전하려는 것 같은데 그의 말이 겉돌기 때문에 대체 무엇을 느껴야 할지도 의문이다. 따져보면 말이 안 되는 글이다. 어째서 침묵할 때 충실함을 느낀단 말인가? 거꾸로 입을 열려 하면 공허함을 느낀단 말인가? 나아가 대체 이 말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건가? 


생명의 죽음을 기뻐한다는 말은 더 큰 질문으로 이끈다. 어째서 죽음이 기뻐할만한 일인가? 죽음이란 슬퍼할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는 ‘크게 기뻐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썩음’도 크게 기뻐한다 말한다. 뭔가 괴이한 인간이다. 죽음과 썩음 – 이를 ‘소멸’이라 하자. 대관절 소멸이 어째서 기뻐할만한 일인가? 


그는 역설로 이 문제를 풀어낸다. 죽음이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삶과 죽음이 함께 있다는 자명한 현실위에 그는 하나의 낯선 사실을 일깨운다. 죽음이야 말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기에 기뻐할만하다고. 그에게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을 증명하는 일이다. 썩음도 마찬가지. 썩음은 그저 생명이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에게 썩음은 무엇인가가 왕성하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건이다. 그렇기에 그는 크게 기뻐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기뻐하지 않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죽지도 썩지도 않는 것. 그것은 삶을 증명하지도, 존재를 증명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죽지도 썩지도 않는 것을 그는 기뻐할 수 없을 테다. 어쩌면 그는 변화 없는 정지, 그저 보존되어 있는 상태를 거부하려 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바뀐다’는 말은 틀렸다. 바뀌지도, 죽지도, 소멸하지도 않고 멈춰 있는 것이 있다. 대체 그것은 무엇일까? 


모르겠다. 다만 그의 글이 ‘영원’을 추구하는 여느 작가들의 것과는 다르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변화를, 소멸을, 죽음을, 망각을, 썩음을 긍정한다. 그는 자신의 글이 잊혀질 것을, 사라질 것을 바랐다. 


나는 시대의 폐단을 공격한 모든 글은 반드시 시대의 폐단과 더불어 사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혈구가 종기를 생성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제거되지 않으면, 다시 말하면 자신의 생명 유지는 바로 병균이 여전히 존재함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열풍: 서문> 


그는 <열풍>에서 자신의 글이 시대와의 싸움 속에 나온 글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자신의 글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은 자신이 싸웠던 전장의 전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여전히 시대의 폐단, 즉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따라서 자신의 글은 어서 빨리 사라져야 한다. 시대의 문제가 빨리 해결되어야 하듯. 


그러나 단순히 시대의 폐단 위에 있다는 점에서 소멸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필멸의 존재로 죽음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인간, 그는 늘 죽음과 닿아 있다. 단지 죽음을 망각하거나 혹은 피해 있을 뿐. 


내 작품을 편애하는 독자는 이따금 내 글은 참말을 하고 있다고 비평한다. 이는 사실 과찬이며, 그 원인은 바로 그가 편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남을 크게 속일 생각은 없지만, 속내를 그대로 다 말하지 않고 대체로 보아도 제출해도 되겠다 싶으면 끝을 맺는다. 분명 나는 종종 남을 해부한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 더 사정없이 나 자신을 해부한다. 조금만 발표해도 따뜻함을 몹시 좋아하는 인물들은 이내 냉혹함을 느껴버리는데, 만약 내 피와 살을 전부 드러낸다면 그 말로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
 만일 다른 사람에게 길을 인도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조차도 어떻게 길을 가야 할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대개 청년들의 ‘선배’와 ‘스승’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러나 나는 아니며, 나도 그들을 믿지 않는다. 나는 다만 하나의 종점, 그것이 바로 무덤이라는 것만은 아주 확실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것이므로 누가 안내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여기서 거기까지 가는 길에 달려 있다. 그 길은 물론 하나일 수 없는데, 비록 지금도 가끔 찾고 있지만 나는 정말 어느 길이 좋은지 알지 못하고 있다. 찾는 중에도 나는, 내 설익은 과실이 도리어 내 과실을 편애하는 사람들을 독살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나를 증오하는 놈들, 이른바 정인군자들이 도리어 더 정정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무덤: ‘무덤’ 뒤에 쓰다> 


이를 시대의 소멸과 존재의 소멸이라 부르자. 그는 자신의 시대가 소멸해야 할 낡은 것이라는 자각을 갖고 있었으며 동시에 그 존재 역시 무덤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전자, 낡은 시대는 소멸하면 끝이다. 아니 소멸해야 하며, 소멸해야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존재는 소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던져있다. 여기에는 하나의 역설이 있는데, 루쉰의 말을 빌리면 존재의 소멸은 그 존재가 살아 있었음을 증거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그가 죽음을, 썩음을 기뻐한다 할 때에 그 죽음과 썩음 자체를 기뻐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반대로 살아 있었음을,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었음을 기뻐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생명’을 이야기하는 출발점이다. 



생명이 들풀이 되어 


생명의 흙이 땅 위에 버려졌으나 큰키나무는 나지 않고 들풀만 났다. 이것은 나의 허물이다. 
들풀은 뿌리가 갚지 않고 꽃도 잎도 아름답지 않다. 그렇지만 이슬과 물, 오래된 주검의 피와 살을 빨아들여 제각기 자신의 삶을 쟁취한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짓밟히고 베일 것이다. 죽어서 썩을 때까지. 


그는 자신의 글을 엮어 <들풀野草>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들풀과 상대되는 것은 큰키나무이다. 그는 생명, ‘살아 있음’에 주목하지만 그 살아 있는 존재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허름한 존재, 그의 말을 빌리면 ‘짓밟히고 베’이는 삶을 사는 존재다.  


루쉰은 자신의 생명을 소진하여 글을 쓰고 있노라 말하기도 했다. 사실 우리의 모든 일은 자신의 생을 소진하는 일이다. 그 누구도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은 아니므로. 그러나 이를 자각하는 자는 드물다. 왜 그럴까? 삶이 덜 소중하기 때문에? 아니, 소중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을까. 삶을 자각하는 방식의 차이 때문이겠다. 누구는 죽음으로부터 삶을 바라보며, 누구는 죽음을 지우거나 잊은 채 삶에 주목한다.  


그가 생을 소진하여, 생명을 흙을 땅 위에 버렸으나 들풀만 났다. 그는 자신의 글이 세상에 내보일 만큼 화려하고 빛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문체는 화려하기보다는 투박하며, 아름답다기보다는 거칠다. 마치 들풀처럼. 루쉰 자신의 말을 빌리면 ‘꽃도 잎도 아름답지 않다.’ 볼품없는 존재. 


그러나 이 들풀은 무엇보다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존재다. 들풀, 잡초는 대체 어떻게 나서 어떻게 자라는지 모르지만 그 무엇보다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들풀은 살아있다. 화려한 꽃과 맑고 푸른 잎을 좇는 사람들은 결코 발견할 수 없을테지만 들풀은 늘 살아 있다. 어떻게 살아있는가. 이 들풀은 대지위에 숨 쉬고 살아가는 존재다. ‘이슬과 물, 오래된 주검의 피와 살을 빨아들여’. 그렇기 때문에 들풀은 뿌리가 깊지 않다. 그러나 들풀은 뿌리 깊은 저 큰키나무와 다른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들풀은 베어도 베어도 끊임없이 존재를 드러낸다. 그래서 루쉰은 이렇게 말했다. ‘제각기 자신의 삶을 쟁취한다.’ 


거듭 말하지만 루쉰은 ‘위대한 작가’로 불릴 사람은 아니다. 무릇 위대한 작가라면 위대한 작품을 낳아야 하지 않는가. 위대한 작가들을 보면 시대와 호흡하는 동시에 다른 시대의 공기를 마시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루쉰에게는 시대의 그림자가 너무 짙게 드리워있다. 더구나 루쉰에게는 무엇인가를 창작하겠다는 욕구가 그렇게 크지 않아 보인다. 그는 ‘위대한 창조자’와는 거리가 멀다. 이른바 ‘대작大作’을 써내겠다는 욕구가 보이지 않는다.  


자신도 이런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글을 들풀이라 붙인 것이리라. 그러나 사람들에게 찬사를 얻을만한, 사람들이 우러러볼 만한 대단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관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들풀은 뿌리가 깊지 않고 꽃도 잎도 아름답지 않다.’ 도리어 존재의 숙명이 다를 것이라는 점도 명확히 알고 있다. 뭇 사람들이 떠받드는 존재가 되기는커녕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일 것이라고. ‘살아 있는 동안에도 짓밟히고 베일 것이다.’  


작가, 혹은 글쟁이라는 사람들에게 기대되는 고상함이 그에게는 없다. 우아함 따위를 기대하다가는 크게 실망하기 마련이다. 글방 도령이 갖춰야 할 곱상함과는 영 거리가 멀다. 그는 짓밟히고 베이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조용한 글방에 숨어 있지 않다. 그는 길 위에 있다. 짓밟히고 베이는 들풀처럼. 먼지 가득한 길가에 그는 자신의 자리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 자신의 길을 받아들이며 그 험한 길을 긍정한다. ‘죽어서 썩을 때까지.’ 


그렇기에 <들풀> 서문에 실린 한 문장, 그 강렬함을 쉬이 넘길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평안하고, 기껍다. 나는 크게 웃고, 노래하리라.  



가거라, 들풀이여 


루쉰魯迅은 본명이 아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저우수런周樹人. 루쉰은 그가 썼던 수많은 필명 가운데 하나다. 여러 필명 가운데 어째서 루쉰이 그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을까? 여기에는 별도로 많은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훗날 루쉰을 만나는 사람의 입장에서 루쉰이 그의 이름이 된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 모순적 표현이야 말로 루쉰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니. 


노魯는 노둔, 즉 느리고 아둔하다는 뜻이다. 신迅은 신속, 빠르고 민첩하다는 뜻이다. 함께 엮을 수 없는 두 말을 그는 함께 엮었다. 그렇기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루쉰만의 글이 탄생할 수 있었다. 루쉰의 글, 그의 이름을 빌리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법하다. 느리고도 빠른 글이라고.  


그가 말하는 평안함이란 고요함과는 거리가 멀다. 도리어 그는 들풀에 새겨진 삶의 흔적에 주목한다. 들풀은 늘 살아 있다. ‘짓밟히게 베’이면서. ‘죽어서 썩을 때까지’ 그렇기에 그의 평안함과 고요함이란 일견 들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평안하고 기껍다’는 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 역설을 잘 읽어야 한다. 말이 되지 않는 말, 한 측면을 묘사한 말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데 주목해야 한다. 


나는 이 들풀 무더기를, 밝음과 어둠,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의 경계에서, 벗과 원수, 사람과 짐승, 사랑하는 이와 사랑하지 않는 사람 앞에, 증거 삼아 바치련다.
나 자신을 위해서, 벗과 원수, 사람과 짐승, 사랑하는 이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나는 이 들풀이 죽고 썩는 날이 불같이 닥쳐오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생존한 적이 없는 것으로 될 것이며, 이는 실로 죽는 것, 썩는 것보다 훨씬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이 불투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의 이야기를 한결 같이 이야기한다면 편하겠지만 결코 그러지 않는다. 그는 하나의 이야기만 하는 인물은 아니다. 그는 무엇 하나를 명확히 그려내는 인물이 아니다. 그의 글은 늘 흐릿하다. ‘밝음과 어둠,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의 경계’에 있기 때문이리라. 더구나 누구를 향한 글인지도 모호하다. 그의 글은 포착되지 않는다. 손에 쥐어지지 않는 말들이다. ‘벗과 원수, 사람과 짐승, 사랑하는 이와 사랑하지 않는 사람’ 모두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아니 그 누구도 향하기 있지 않기 때문에. 


루쉰은 시대적 인물이다.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의 격동을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사회의 변화와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 위에서만 그를 읽는다면 그것은 루쉰, 느리고도 빠른 저 모호한 존재의 한 측면만을 이해하는 것이리라. 도리어 루쉰은 루쉰일 뿐이다. 시대위에서 루쉰을 볼 수도 있지만 루쉰은 루쉰으로만 설명가능하다. 


그의 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떤 글은 글 바깥에서 글을 이해해야 한다. 루쉰의 많은 글도 시대 위에서 조망할 때 더 잘 볼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들풀>은 <들풀>이다. 루쉰의 저 모호한 말 가운데 우리는 오롯이 하나가 분명하게 떠오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들풀. 짓밟히고 베이면서도 살과 피를 마시며 대지위에 살아 있음을 늘 증거하는 들풀.  


들풀마냥 그의 글은 쉬이 보아 넘길 수도 있을 만한 글이다. 눈으로 훑고 지나가면 별 기억도 인상도 없을 수 있겠지. 그러나 허리를 굽혀 들풀에 눈을 맞춘다면 결코 쉬이 넘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들풀은 들풀이다. 이 고집스런 들풀이야 말로 루쉰이 말하는 ‘땅 속의 불’보다 더 뜨겁고 강렬하며, 매섭고도 강인하다. 


가거라, 들풀이여, 나의 머리말과 함께! 


들풀 서문을 맺는 루쉰의 짧은 저 문장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가거라’라는 말이 남기는 뚜렷한 발자국. 이 말은 멈춰 있지 말라는 말이기도 하며, 거꾸로 이 말은 앞의 표현을 빌리면 죽음으로, 소멸로 사라짐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기도 하다. 거침없는 내딛음. 루쉰은 그렇게 늘 걷고있다. 


‘광저우 백운루’, 나는 그곳이 어딘지는 모른다. 다만 그가 전과는 달리 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다. 미래란, 앞을 기약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존재한다. 불투명한 삶은 미래를 갖기 힘들다. 시대의 극심한 변화도, 존재의 불안한 흔들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위 한 문장으로 자신의 자리를 보여준다.  


이제 광저우 백운루는 위협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 아니라 들풀을 매듭지은, <들풀>의 생생함을 목도하는 장소가 된다. 역설적으로 루쉰의 삶도 이곳에서 어떤 빛을 낸다. 문득 번뜩이는 광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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