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풀 #2
<들풀> 속 루쉰의 여러 글 가운데 <그림자의 고별>은 곱씹어 읽을 글이다. 여느 글처럼 이 글은 도저히 쉬이 읽히지 않는다. 일단 화자가 ‘그림자’다. 그림자는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할 수 없다. 왜? 형체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림자는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이 그림자가 작별을 고한다. 아마도 그를 낳은, 그 몸의 누군가에게 말을 건내는 것이리라.
내가 싫어하는 것이 천당에 있으니, 나는 가지 않겠소. 내가 싫어하는 것이 지옥에 있으니, 나는 가지 않겠소. 내가 싫어하는 것이 미래의 황금 세계에 있으니, 나는 가지 않겠소.
그런데 그대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오.
동무, 나는 그대를 따르고 싶지 않소. 나는 머무르지 않으려오.
나는 원치 않소!
오호오호, 나는 원치 않소 나는 차라리 무지無地에서 방황하려 하오.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존재. 이 그림자의 말을 보자. 대체 그는 무엇을 하겠다는 것일까? 작별을 고하며 어디로 떠난다는 것일까? 그의 미래를 가늠할 수 없다. 그는 천당도, 지옥도 싫다고 말한다. 아니, 나아가 ‘미래의 황금세계’도 싫다고 말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황금세계’가 아닐 것이다. 무엇인가 화려한 세상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미래’를 거부한다. 앞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저 앞에 빛나는 길을 그는 거부한다.
그럼 어쩌겠다는 말인가. 제 자리에서 소멸하려나? 아니, 이 고집 센 그림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가장 쉬운 길은 그림자가 말하는 동무, 즉 그림자를 낳은 신체를 따라 그림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저 따라 다니면 되지 않나. 지금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줏대도 없이 그저 따라 다니면 되지 않나. 그러나 이 그림자는 그 동무, 자신을 낳은 신체도 거부한다. 그림자 주제에!!
그가 거부하는 것은 머무는 것이다. ‘나는 머무르지 않으려오’! 비록 신체를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 다닌다하더라도 그 움직임이란 그림자에게는 머물러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디론가 간다고 하지만 그 어딘가는 제 손으로 택한 것이 아닐뿐더러, 제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나는 차라리 무지에서 방황하려 하오’ 이 낯설고 모순된 말이 어디있을까? 무지無地,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방황한다니. 아무 것도 없는 곳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곳이다. 그런데 어찌 그곳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상상할까. 부정의 부정을 거듭한 이 그림자는 대체 어디로 나아가겠다는 말일까? 알 수 없으니 그 누구도 그의 방황에 동참할 수 없다. 그림자의 방황은 지독히도 고독한 여정이다.
사람들은 흔히 그림자란 빛이 사물을 비추어 생겨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림자란 빛이 있기 이전부터, 만물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어른거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암흑 속에서,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컴컴한 저 혼돈 덩어리야 말로 그림자의 본디 모습일 것이다.
내 한낱 그림자에 지나지 않소만, 그대를 떠나 암흑 속에 가라앉으려하오, 암흑은 나를 삼킬 것이나, 광명 역시 나를 사라지게 할 것이오.
그러나 나는 밝음과 어둠 사이에서 방황하고 싶지 않소. 나는 차라리 암흑속에 가라 앉겠소.
그렇기에 여기서, 저 그림자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소멸을 향한 기묘한 욕망을 마주하게 된다. ‘암흑 속에 가라 앉으려’하는,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려 하는. 이 욕망은 <들풀: 서문>의 욕망과 닮아 있다. 죽음으로 삼을 증거하며, 소멸로 존재를 드러내는 그 역설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그림자의 고별>에서는 죽음과 소멸의 이면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림자의 욕망은 더 순수하다.
그림자는 그 무엇도 증거할 필요가 없다. 그림자의 방황에는 벗과 원수 그 누구도 참여할 수 없다. 여기에는 오롯이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만이 남아 있다. 그림자가 동무를 부르나, 그 둘은 타자가 아니다. 그림자의 고별이란 내면에서 울리는 또 다른 목소리일 뿐이다. 그렇기에 잠들어 있을 때 찾아와 말을 건네는 것이리라.
자신조차 부정해야 하는 순간, 세상의 그 무엇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고독한 존재의 길, ‘홀로 먼 길을 가려오’하는 저 그림자의 여정은 성공할 수 있을까? 대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아니, 발걸음을 떼어 내딛을 수 있을지 조차 알 수 없다. 암흑과 공허, 혼돈과 방황만이 있을 뿐이기에 그림자의 목소리 조차 흐릿하며 막막하다.
그러나 이 단절의 순간이야 말로, 그림자의 존재는 물론 그의 말을 근본적으로 의심해야 하는 지점에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신체를 잃고, 나를 벗어던진 그림자는 소멸을 통해 새로운 전환을 이끌어낸다.
나는 이러기를 바라오, 동무 —
나 홀로 먼 길을 가오, 그대가 없음은 물론 다른 그림자도 암흑 속에는 없을 것이요. 내가 암흑 속에 가라앉을 때에, 세계가 온전히 나 자신에 속할 것이오.
‘무지’를 다른 말로 옮기면 암흑이라 하겠다. 그림자도 삼켜버리는 암흑, 컴컴한 저 어딘가. 그러나 이 암흑은 세계 본연의 공간이다. 이곳이야 말로 세계 전체가 담겨있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그림자는 그림자로 그치지 않는다. 세계를 품은 존재, ‘세계가 온전히 나 자신에게 속할 것이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그림자란 소외된 존재인 동시에, 세계 전체로 육박해 나아가는 존재다. 제 힘으로는 한 걸음도 스스로 나아가지 못하지만, 암흑속에 세계 전체로 나아가는 존재이다. 아니, ‘존재’라는 표현으로 담기 힘든 그 무엇이다.
루쉰은 이제 꿈속의 그림자, 이 괴기한 존재를 통해 세계를 마주한다. 꿈이라는 허상의 어디, 거기에 그림자라는 허망한 무엇, 그렇기에 그림자는 무지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어디도 아닌 그 무엇도 아닌 이 허망으로 세계를 끌어 당긴다. ‘세계가 온전히 나 자신에 속할 것이오’. 이 충일한 고독자는 이렇게 다시 말하지 않을까. ‘나는 크게 웃고 노래하리라.’ 충실한 침묵, 살아 있는 죽음을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난다.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저 암흑 속에 가라앉아 버린 그림자를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저 어둠 속에서 그림자를 구별해 낼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는 이미 소멸해버렸고, 사라져버린지도. 그러나 어쩌면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을지도. 저 컴컴한 어둠 속을 거침없이 육박해 나아가는 뚜벅뚜벅 또렷한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도.
클클대는 것이 잠든 사람을 놀래지 않으려는 것 같았으나, 사방의 공기가 화답하여 웃는다.
<가을밤>
다만, 조금은 더 어두워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