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데 익숙한 동네 풍경이 근처인가 했어요. 그래서 찾아봤더니 우리 동네더라고요. 그래
서 뵙고 싶어 왔어요"
나는 반가운 마음과 함께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독자가 책을 읽고 저자를 찾아오다니. 이런 연결이 생경해 뚜렷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묵직한 감동 정도로 말하기에 복잡한 무엇이었다.
책의 저자가 내가 사는 동네에 산다면 어떤 기분일까? 만약 그렇다고 한들 발걸음을 떼어 찾아가 만날 수 있을까? 저자의 글에서 무릎을 치는 혜안을 발견하거나 비슷한 방향성을 발견하면 오랜 친구보다 반갑다. 비슷한 생각을 펼치는 저자를 만날 용기로 찾아와 준 독자가 달라 보였다.
찾아온 독자는 남달랐다. 홈스쿨을 한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교육관이 남달라서 내 책이 더 와닿았을까? 느린 자녀교육관 담은 책의 방향성에 공감한다고 했다. 그래서 찾아오기까지 했고. 아이가 입시교육중심에 서서 경쟁에 행복할지 고민하다 홈스쿨을 시작했다는 말씀에 박수를 쳤다. 물론 앞으로 견디고 넘어야 할 산이 많겠지만 너끈히 이길 수 있는 견고함을 가진 분이었다.
큰아이를 학교 밖 학생으로 키우는 나로서 제도권 밖을 결정한 것만으로 위로와 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전장에서 아군을 만난 기분이라면 이럴 것 같았다. <읽기독립>을 쓰기 전 <아이는 학교 밖에서도 자란다>를 쓴 이유가 그런 방향을 반영한 것이었다. 독자에게 이전 책을 깨알같이 소개했다. (오래가는 저자가 되려면 내 책을 내 입으로 소개할 정도의 뻔뻔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와 독자로 만났지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지금 아이를 어떤 신념 아래 키우실 텐데, 그 방향을 풀어서 책으로 쓰세요. 저도 썼다면 님도 쓰실 수 있답니다. 그녀는 막내 아이와 실랑이하느라 다음 만남을 기약해야 했다. 저자에게 보람이 있다면, 독자를 만나고, 책을 통한 변화를 들을 때가 아닐까? 오늘 가까운 곳에 진심 어린 독자를 만나 잠시 마음을 나누니 남은 하루가 풍성해진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