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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Jan 04. 2022

딸을 맡기는 기분

독박 육아의 전장을 지난 육아 언니의 위로사~

카페에 홀로 앉아 강의 준비에 매진하고 있었다. 여사장은 급한 일을 하며 전화를 받았고, 수화기 넘어 아이의 높고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넘어왔다. 그 소리의 파동은 크지 않았지만 길었고 실내의 가라앉은 공기를 들쑤실 만큼 강렬했다. 대개 남정네보다 여인네는 이런 소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달려가서 도와주고 싶은 언니스러운 마음.


"엄마, 보고 싶어"


사장의 딸이 아직 어리다는 것을 암기 때문인지 단전 근처가 저릿했다. 아이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고 곁에 달래느라 진땀을 빼지만 여유 있어 보이는 부드러운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부드럽고 여유 있는 것을 보니 베이비 시터나 시어머니는 아니겠다는 편견에 가까운 판단을 했다. 엄마는 아이를 달래느라 곤혹스러워했으며 아르바이트생도 퇴근한 시간이라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방싯거리며 잘 웃는 그 아이는 엄마 아빠의 일터에 할머니 손을 잡고 자주 출몰하는 인물이다. 동그란 얼굴에 더 동그란 두 눈이 반짝거리며 형광색에 가까운 흰자위는 맑기가 그지없다. 그 아이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우는데 왜 내 마음이 저릿할까? 이미 아이들이 적신을 벗어 스스로 몇 끼 밥을 차려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워진 내가 묵직한 어떤 것을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일하는 여성으로 이 땅을 살아갈 때, 양육의 책임감을 느끼는 마음의 무게일까? 코로나 팬데믹이 소상공인의 위태로움에 심각한 가격을 했다. 아직도 그 노선을 벗어나지 못해 매일이 곤혹스러울 텐데, 여자로서 아이를 떼어내고 일하는 기분은 자아성취나 수입으로 퉁칠 수 없는 저릿함을 매일 느끼지는 않을까?


사장은 잠시 흔들렸다 다시 단호해졌다. 단단한 목소리로 아이를 달래면서 대안을 제시하고 아이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성급하게 수화기를 내리지 않았다. 앳된 얼굴과 상반된 알맹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울음을 삼키지 않으며 저릿하지 않으며 단호하고 강해 보이는 것이 사뭇 생경하면서, 애잔하고 먹먹했던 나의 초보 엄마 시절이 떠올랐다.

아이가 18개월이 되었을 때, 내 몸에서 귀한 생명으로 태어나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아이에게 엄마와 떨어질 짧은 시간을 알려주지도 않고 그냥 전화통화로 연결된 원의 담당 선생님 품에 아이를 던지듯 주고 돌아섰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저 지긋지긋한 육아의 단면이 날카롭게 찔러대는데 이길 재간이 없었다. 벗어나고 싶었지만 내가 어디론가 갈 수 없었다. 아이를 교육을 위해 잠시 맡긴다는 명분으로 스스로를 설득했다. 지금은 직장에 복귀하려고 어린 자녀를 기관에 맡기는 것이 그리 새롭지도 않지만, 내가 아이를 키울 17년 전만 해도 5세 이전 보육기관에 아이를 맡기는 것은 흔하지 않았다. 일하는 엄마인 경우라도 어린아이를 맡기면 모진 사람으로 평가받곤 했다. 첫 육아, 주변에 의지하고 물어볼 데라곤 없어 외롭고 두렵고 불안한 시간이었다. '좋은 엄마'라는 허상을 이상으로 생각했으니 더 그랬을 것이다.


성급한 결정은 체하기 마련, 잘 지낸다는 아이는 6개월이 못되어 발작적으로 등원을 거부했고, 그간 한 템포 쉬며 정신을 차린 탓인지 아이의 마음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그리고 아이를 데려와 2년 이상 어디에도 보내지 않았다. 놀이터에서 모래놀이를 하고 그네를 하루 종일 타는 아이 곁을 지켰다. 나의 발전이나 업무력 신장 등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온전히 엄마의 손에 돌본다는 자긍심과 한쪽으로 뒤쳐지고 있는 나에 대한 불안감이 공존하던 매일이었다. 그런 갭을 해소해야 했다. 아이 곁에서 책을 펴 들고 있거나 사진을 찍어 부지런히 글을 올렸다. 아이와 '나'라는 불가분의 카테고리를 버무려 어떻게든 끌고 가고 싶은 열망은 포기할 수 없었다. 놓지 않은 열망은 독박 육아 중에도 진지하게 만들었다. 아이의 그네를 밀어주면서 한 손에 책을 들고 눈을 떼지 않으니, 아이는 그네가 삐뚤게 움직인다고 짜증을 냈지만 아이를 위해 '나'의 추구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한 손으로 그네를 곧게 밀고 당겨주는 기술을 연마했을 뿐. 그네도 제법 잘 밀어주고 책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으로 시간을 보내다 문득 지금이 되었다.

저릿한 기억에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 강의를 준비를 한다. 오래전 기억이지만 그 당시 지금의 나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사업을 시작하거나 강연을 다니거나 책을 쓰거나, 책을 쓰게 하거나. 놀이터 구석, 모래놀이 난간에 앉아 오후 햇살을 맞으며 책 읽는 할머니로 평생 늙을 줄 알았다.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여러 권의 책을 쓰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나의 비루하고 버티기 위해 착념했던 독서가 허공에 날아가는 수증기처럼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 분명 그 시간은 자양분이 되어 아이에게 전해졌고 독박 육아에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무수한 책 속 저자의 팁을 활용해 나의 팁으로 융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책을 읽고 실험하고 아이를 오롯이 관찰한 것들로 주변 초보 엄마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나의 모든 헤맴과 실패와 좌절감, 온통 깜깜하던 불면의 시간들 결국 어떤 방향성 그리기 시작했다. 허둥대고 헤매는 것이 다반사인 육아의 길을 독서로 헤쳐 나오는 것도 실력이 될 수 있다. 그것은 학생들을 만날 때, 학부모 상담을 할 때, 글을 쓸 때, 책을 구성할 때, 원고를 쓸 때 드러난다. 그간의 열망과 실행이 안개처럼 불투명할 것들을 걸러주는 역할을 함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단단해지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내가 선택한 길은 다른 방도가 없어 채택한, 값싸고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것이 '가치 있는 허비의 시간'을 채우더니 지금 하는 모든 일의 초석이 되고 있다. 막다른 골목에서 주운 돌이 보석이 되는 기분이랄까. 이 시간을 통과하는 많은 여자 사람들도 나름의 단단해지는 길을 선택하고 열망을 포기하지 않고 뚜벅뚜벅 길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온라인의 활발한 소통을 통해 새벽 기상을 하고 모닝 페이지를 적고 글을 쓰고 독서하고 인증하는 많은 이들의 열망에 예상 밖의 큰길이 열리길 바란다. 17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방법이 넘치고 있다. 그 방법을 잘 선별해서 오롯이 자기 것으로 만드어 단단해지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아무도 모른다. 나 조차도 상상하지 못할 그 일을
열망하는 자, 손에서 놓지 않는 자는
보고야 말 것이다.
시간이 걸릴 뿐이지만 말이다.

<아이는 학교 밖에서도 자란다> <우리아이 읽기독립>등 7권의 저서가 있습니다. 글공방 운영과 함께, 부모교육 강의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해서 책을 쓰기로 했다>를 진행했고 출간성공 후 순항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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