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신애 Jan 10. 2022

'무소의 뿔~'과 "얼죽아 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지요.

어둠을 가르고 올 블랙의 긴 머리 사람이 지나간다. 분명 걷는데 보는 내가 눈썹이 휘날린다. 롱 패딩이 겨울 한파를 막을 용도가 아닌 듯, 지퍼를 채우지 않아 온 동네 먼지와 바람을 몰고 있다. 키가 유난 히 큰 그는, 유행한다는 조거 팬츠가 조금 짧은 듯 발목이 훤히 드러나있는데, 알고 보니 어둠 가운데 새하얀 발목이 유난히 가녀리다. 그리고 아래로 유려하게 이어지는 선을 자세히 보니 삼디다스 슬리퍼를 덜걱거리는 맨발. 어디서 본 듯한 옆모습과 뒤태. 아침마다 두 아이를 손에 잡고 어린이집으로 향하던 젊디 젊은 애기 엄마였다.


아이들을 두고 이 시간에 황급히 어딜 다녀오나 했더니, 그녀 손에 들린 것으로 알겠다. 편의점 판매용 아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아아'라고 하는 것이 우스웠다. 그런데 아이스 부심 있는 자들이 "얼죽아"라는 말을 만들어 연대하기 시작했다.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이 무슨 ,언어파괴적이지만 중독적이면서 '아아'사랑을 단번에 느낄 수 있는 말인. '얼죽아'의 유명세에도 나는 더운 여름까지 뜨거운 라테를 마시곤 했다. 따듯한 것을 음용할 때, 몸의 순환이 더 좋다는 것을 어디선가 주워들은 후부터 얼음이 가득한 잔에 음료들은 한사코 마다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얼죽아'의 신념을 몸소 뿜어내는 이가 지나가고 있다. 한파가 닥쳐 옷깃을 여며야만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을 겨우 견딜 날씨에 맨발에 슬리퍼의 그녀는 어린 아기를 키우는 동네 새댁이다. 그녀는 세상 앞에 호기로운 자세로 당당히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얼어 죽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나의 몫일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책 제목이 떠올랐다.

얼죽아, 아아, 그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문구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다. 오롯이 여성의 주체성에 무게를 둔 것으로 기억하는 이 책은 부처가 불경에서 가족이나 자식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문맥에서 인용한 말이라고 한다. 얼죽아의 기운을 내뿜으며 내달리는 그녀의 뒤태에서 오래전 읽었던 책 제목을 연상한 것은 그리 잘못된 연결은 아님에 분명하다.


엄마의 품을 고파하던 나의 유년을 돌아보며 '곁을 지켜주는 엄마'가 되려 애썼다. 아이가 우는 소리를 낼까 봐 화장실도 잠이 들어서야 가곤 했다. 그런 태도가 아이 심비에 상흔을 남기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이런 신념은 과학적이지도 않고 심리학적 기반도 없이 빈약한게 사실이다. 오로지 예스런 경험의 산물이었다. 내가 그렇게 나를 깎고 참고 포기하면서 아이를 돌보는 것을 정작 아이는 기억조차 못한다. 그리고 잠시의 부재를 경험한다고 엄마에 대한 상흔을 안고 여생을 살지도 않을 것이 뻔하다. 그런데도 당시 나는 아이의 칭얼댐에 의미를 부여하며 나의 유년의 어렴풋한 장면과 연결하곤 했다. 나쁜 습관이었지만 당시 최선을 다하는 어미가 되어간다고 자신하곤 했다.


'얼죽아'의 야성이 없더라도, 아이가 아빠와 티브이를 멍하게 보는 동안 맨발로 달려 겨울밤 한파를 뚫을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왜 아이들 손을 그러쥐고 장바구니를 들 수 없으면서도 두 아이를 놓지 않으려 진땀을 뺐을까? 왜 손목에 통증이 6개월 이상 지속되는데도 아이가 옆에서 칭얼댄다고, 엄마~라고 울까 봐 물리치료 50분을 채우지 못하고 엉겁결에 뛰어나왔을까? 그러지 않았어도 아이는 잘 자랄 수 있다. 아이를 떠나거나 버리고 비정하게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 나 자신을 충전하기 위해, 동네 어귀 혼자 뛰며 운동이라도 하지 못했을까? 그럴 때 올려다보는 하늘의 은하수는 얼마나 촘촘한 별들로 어깨 동무 하고  있었을까. 동그마니 복숭아 같은 아이들 얼굴 외에 '나 혼자여서 추억할 시공간'이 나에게는 없다.


얼죽아가 되어보지 못해 섭섭하지도 않고, 맨발로 달리는 야성을 누리지 못해 한스럽지도 않다. 지나온 모든 순간 후회보다 감사가 가득하다. 어쭙잖게 어른 인척 했던 미숙한 엄마 아래서 아이들은 제 그릇만큼 자라고 있다. 몰라서, 오해해서, 나만의 불안 때문에 조금 덜 누리며 더 낡았더라도 괜찮다. 지나고 보 육아라는 현장의 위험천만에서 건지신 손길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조물주가 먼 데 있지 않음을 자식들을 건사하며 배웠다. 나름 만족하는 현실에서, 다시 초보 엄마가 된다면 얼죽아 그녀처럼 머리를 휘날리며 밤 산보를 하는 것을 상상해본다. 필시 손을 덜덜 떨면서 뛰어갈게 분명하다. 그런데 얼죽아 그녀는 다 키우고 글쓰겠다 용을 쓰는 나의 일상을 부러워할 수도 있으니 상상은 여기서 그쳐야겠다.


아아는 즐기지 않고, 얼죽아는 되지 못했지만 그리 섭섭지 않은 여정을 걸어왔고, 이제 더 긴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 그래서 혼자 '조어놀이'를 해본다. "더죽따" 혹은 "더뜨라". 후자가 어감이 더 재미있다. "더워 죽어도 뜨거운 라테"매일 호사스러운 혼자의 시간을 글쓰기로 채우는 인생, 과히 나쁘지 않다. 소위 부러움도 받겠다. "얼죽아" 그녀를 축복하는 마음으로 그녀가 걸어간 보도블록을 통통 튀며 귀가한다. '얼죽아'와 '더뜨라'의 평행의 시간을 그리며.

더뜨라:더워 죽어도 뜨거운 라테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9시, 신데렐라가 떠날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