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신애 Nov 10. 2022

가을에 '시'감상 이라예~

정현종 '그대는 별인가'

그대는 별인가

                               -시인을 위하여


                                      정현종


하늘의 별처럼 많은 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모래

반짝이는 건 반짝이는 거고

고독한 건 고독한 거지만

그대 별의 반짝이는 살 속으로 걸어 들어가

"나는 반짝인다"라고 노래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대의 육체가 사막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밤이 되고 모래가 되고

모래의 살에 부는 바람이 될 때까지

자기의 거짓을 사랑하는 법을 연습해야지

자기의 거짓이 안 보일 때까지



이 시는 본문을 읽은 후 부제와 연결해 생각하면 더 이해가 쉽다. 시인에게 하는 말이라니. 작가라면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이다.


시인은 사물과 현상, 인간의 삶의 본질을 어떻게 드러낼까 고뇌하며 압축된 시어, 비유와 상징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본질을 보려 애쓰고 고매한 삶을 지향하는 게 일이라지만 시인이라도 삶이 따라주지  못할 때가 많다. 고매한 삶 때문에 시인이 되는 게 아니라 고뇌하기 때문에 시인이 된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 놀라운 경지의 작품세계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시인이라도 사적인 문제로 구설수에 오르지 않는가.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삶의 누추함이 세상에 드러나면 보통의 사람들 충격을 받는다.


올바른 삶, 혹은 자신의 철학에 걸맞은 삶을 살기 위해 애쓰지만, 시를 쓸 때, 자신이 사는 만큼 써야 한다는 법은 없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비루한 속내를 여실히 직면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누추한 삶에 비해 높다란 이상 추구하며 작품을 만들 수도 있다. 미술가든 음악가든 글작가이거나 가르치는 사람이든, 종교적으로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까지 이끌고 가는 사람에게 딜레마 매양 비슷하다.


시인은 말한다. "자기의 거짓을 사랑하는 법을 연습해야지"라고. 이 얼마나 용기를 주는 말인지. "자기의 거짓이 안 보일 때까지"이 말은 더 강한 동기를 다. 이런 문장을 접하면서 삶과 작품은 별개라거나 나와 나의 글은 별개, 가르치는 것과 내 삶은 연관이 없다고 말하며 허랑방탕한 생활을 추구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는 시를 통해 '작품과 삶의 불일치'에 먼저 천착해본 시인의 고뇌를 읽는다. 자신의 거짓을 사랑할 수 없고, 지어내는 작품에 비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아름답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끌어안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과 회한으로 보냈을까. 가히 상상이 된다고나 할까.


내가 실용서 원고를 쓰고, 아이들이나 어른들을 가르치고, 시를 쓰는 것도 앞에서 말한 불일치를  넘어서면서 단단해지지 않을까? 더 나아가 부모 됨을 생각해본다. 나의 삶이 존경받을 만하고 온전할 때 부모가 될 수 있다면, 나의 두 자녀는 이 세상에 없지 않을까. 나의 거짓과 누추함, 아직 덜 된 인격과 여전히 과거로 회귀하려는 이기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내야 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정도, 그 정도만 해내도 그게 어딘가.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안에 제 멋대로 굴고 싶은 나를 통제하며 이만큼 겨우 살아내는 것도 칭찬받아 마땅한 것을. 이 밤에 나 혼자 자화자찬에 빠져본다. 그래야 글을 쓰지. 그래야 내일 아침 아이들의 밥상을 차리며 잘 다녀오라 손짓할 수 있을 테니.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이면 '시'감상이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