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구 하나로 나는 한 달을 버틸 것만 같다. 담쟁이의 생태를 인간의 삶에 빗대는 솜씨가 빛난다.
모든 슬픔은 지상의 무릎 위에 기생하는 것이다. 원래 삶에서 겪는 슬픔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슬픔은 갑자기 닥친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슬픔 없는 삶을 선물처럼 받은 인간이 부조리한 세상에 던져져 슬픔을 경험하는 것이라면, 슬픔은 원천적으로 우러나는 것이 아니었다. 목숨을 붙들고 살아가는 지상의 무릎 위에 기생하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닐 수 있던 그 슬픔. 이렇게 슬픔을 객관화하고 보니, 당연히 느끼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단절하고 금지해도 되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화가 나서 고함을 지르는 것인지, 고함을 질러서 화가 나는 것인지 과거에는 모호했다. 과학의 발전으로 고함을 지르면 뇌가 화가 난 것으로 인식해서 화의 감정의 프로세스로 몸을 작동함이 밝혀지는 세상이다.
울고 불고 슬픔이 당연하다 뇌가 인식하게 두지 말고 반대로 하면 어떨지 생각해보니 조금 유쾌해진다. '나는 지금 힘든 일을 겪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 무겁고 가슴이 답답하다. 그런 것을 보니 내가 지금 슬픈 것이구나.'라고 뇌가 역동한다면 다르게 작동시켜보면 어떨까. 나는 지금 힘든 일을 겪고 있다. 현실의 한계로 어떻게 문제 해결할지 떠오르지 않고 현실적인 답도 없어 가슴이 답답하다. 그렇지만 슬퍼할 필요까지는 없다. 하늘 아래 죽으란 법은 없으니, 이번 기회에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산을 넘는 '도전의 기회'로 봐야겠다. 신난다. 심장이 쫄깃한데 더 면밀히 살펴 답을 찾아야겠다.' 말인지 방귀인지 모르겠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어떨지. 시를 읽다가 이상한 생각으로 급회전했지만 흥미진진하다.
슬픔은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기생하는 것. 그래서 슬픔이 찾아올 수 있지만 밀어내고 금지할 수 있는 것. 기생하는 것들을 넘어서고 싶다. 시인은 언어를 비틀고 재창조해내는 일을 한다. 기막힌 한 줄의 문장으로 자신을 넘어서는 삶, 담쟁이를 닮고 싶어 한다. 이 구절을 볼 때, 시인은 한 줄의 문장을 발견하기 위해 고뇌하는 과정이 무척 힘에 부친다는 것을 반증한다. 언어의 한계, 주관적이고 고여있는 사고를 뛰어넘기 쉽지 않다. 시인은 이 것을 뛰어넘기 위해 매일 말과 씨름한다. 시인이 뛰어넘고 싶은 것처럼, 나는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찾아와 똬리를 튼, 나의 허물어진 생의 틈바구니에 비집고 뿌리를 내린 슬픔을 대표한 불안, 두려움, 염려, 우울, 열등감, 무력 감등을 돌아본다. 시인이 뛰어넘고 싶은 것, 내가 뛰어넘고 싶은 것이 그리 다른 모습이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자 내가 꽤 멋진 사유를 하는 사람인양 들뜬 기분을 느낀다. 이 기분 그대로 쭈욱~단잠을 자야겠다. 오늘 요지경 시 감상 끄읏~(사실, 나도 슬픔 따위 등의 것이 아니라, 기막힌 문장을 찾아 나를 뛰어넘고 싶은 작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에 후크가 걸린 것이기도 하다. 문장이든 슬픔이든, 한계든 다 넘어서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