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에 제3회 박인환상을 수상한 문태준 시인의 수상시집은 <아침은 생각한다>이다. 먼저 박인환 시인의 대표작은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으로 알려져 있다. 문태준 시인 시는 오래 전학생들을 가르칠 때 읽었었다. 문제풀이를 위한 정형화된 해석으로 읽던 시를 주관적 시각으로 감상하는 게 낯설어서 반갑다.
아침을 의인화해서 어떤 생각을 할지 시인은 떠올린다. 아침이 먼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은 배가 있는지 살피는 너른 마음을 시적 화자는 주목한다. 아침을 시간의 기관사라고 하고, 조각달이 물러가기까지 충분히 기다렸는지 살피는 존재로 묘사한다. 시인에게 아침은 배려와 넓은 아량의 존재인가 보다.
시인에게 아침은, 밤새 뒤척이는 이의 힘겨운 속내와 농사꾼이 일터로 나가는 어두운 새벽길, 행상을 떠나는 어머니까지 살피는 존재다. 아침은 세상 만물을 껴안고 품는 존재다. 모든 존재에게 '모스크 같은 햇살'을 펼쳐주며 모든 존재를 일으키기 위해 환기하는 아침의 마음이 잘 드러나있다. 아침의 다정함과 섬세함의 사이즈는 아침의 대척점인 '밤'까지 두루 살피는 데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밤을 위한 기도마저 짧지 않았나 '반성'한다고 말한다. '반성'이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쓰면서까지 아침의 태도를 도드라지게 만든다.
아침의 태도를 보면서 세상 모든 어머니의 마음이 그러지 않을까, 특히 한국적 모성 이미지와 닮은 아침이 무척 익숙하게 다가온다. 광부처럼 갱도로부터 걸어 나오는 아침이라는 표현에서 아침의 열심, 아침의 마음, 아침의 애씀과 인내 등을 그림처럼 그려, 시의 마지막을 활기차게 장식하고 있다.
시에서 보는 아침의 태도와 무관하게, 나는 나의 낡아가는 하루, 닳기 쉬운 기분, 늙어가는 몸에 주의를 기울이며 살고 있다. 내일 아침 아이의 식탁보다 내 안위를 신경 쓴다. "내가 쓰러지면 가정이 휘청거린다"라는 엄포를 속으로 놓으며 나를 위한다. 간소한 메뉴조차 노력이 들어가기 때문에 내게 있는 에너지보다 과하지 않게 행동하려 애쓴다.
이런 태도는 아이들과 살림에 몰두한 경험을 기초한다. 나를 돌보지 않는 전적인 내어줌의 한계에 놀라고 불완전한 결과물에 실망하면서, 모성의 절대적 헌신이 당연하다는 식의 문화에 소심한 반항심을 느꼈었다. 나를 잃어버리는 희생에 나는 탄복하고 싶지 않았다. 아침의 마음을 족히 공감하고 필수적인 반성의 태도를 반대하지 않지만 어리석은 '나'를 외면하는 희생에는 반대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한다"라는 수식이 하염없이 싫었던 것이다.
그렇게 40 앓이를 하면서 수년 동안 나에 집중하며 글을 썼다. 이 과정에서 내가 조금 단단해진 게 사실이다. 마냥 억울하거나 나를 잃고 헤매는 기분을 요즘은 별로 못 느낀다고 해야 맞겠다. 오히려 어떻게 유익을 줄 수 있을까를 자발적으로 생각한다. 내가 단단해지고 '아침은 말한다'에서 아침의 마음을 다시 읽으니, 너른 마음으로 품는 아침은 이미 밤의 속성과 다른 자신의 속성을 인정하고 이해한 상태로 세상 만물을 품고 있다. 자신을 스스로 껴안아야 타인도 안을 수 있듯. 이런 아침과 나는 별로 다른 것 같다. 아침의 '단단함'에 비해 발톱의 때만치도 따라갈 수 없는 단단함, 초보의 수준에서 막 걸음마를 떼고 걷지만 '나'를 덮어두고 살 때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은 사실이다.
나의 안위를 챙기는 지혜로움을 갖춘 내가 가족의 안위를 돌보는 것은 하등 억울하거나 비자발적일 필요가 없다. 엄마니까 하는 게 아니라, 여자라서 하는 게 아니다. 그저 '나'라는 존재가 줄 수 있는 작은 것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아침이 뚫고 나온 터널, 해사한 얼굴로 "밤의 갱도로부터 걸어 나오는 광부"처럼 나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싶다. 일단, 아이가 좋아하는 찬을 미리 준비하고 자야겠다. 날로 사그라드는 요리 솜씨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