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사람이 넷이다. 그중 중년을 가열하게 지나가는 어른 둘과 애매한 나이가 어린 사람 둘이 있다. 그들은 어린이였던 시간을 마감하고 성인이라는 타이틀 입구 근처에 가까워지고 있다. 고로 우리 집에는 어린이는 없다. 문득 어린이가 없는 가정에 불어오는 냉기가 섭섭하게 다가왔다. 휴일 하루에 지나지 않는 어린이날, 그 누구도 다음날의 환희를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가 새삼스러웠다. 작년에 막내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이미 어린이날은 공휴일로 추락했지만, 코로나의 잔가지에 흔들리는 통에 휴일이든 아니든 코로나로 7일 격리인가 아닌가에 더 집중했던 시간이어서 유야무야 지나가는 줄 몰랐다. 팬데믹이라는 큰 강을 건너고 나니 이제 아이들이 어느덧 어린이라는 집을 떠났음을 눈치챘다.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오랜 재난상황에 내 아이의 시간을 빼앗긴 것이다.
2023년, 올해는 유난히 어린이날이 기다려졌다. 어린이도 없는데 말이다. 하늘은 무심하게도 아직 어린이를 둔 가정에 '좋은 날씨'라는 축복은 안겨주지 않았다. 모든 야외행사를 취소하는 곳이 비단 공공기관만은 아니었다. 계획한 일정을 취소했다는 이웃의 소식을 간혹 들으니 가뭄에 메마른 나라사정에도 '비'소식이 원망스러웠다.
우리 집에 어린이가 없으니 그저 하루 쉬는 것에 의미를 둔 네 명의 사람은 각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느슨하게 하기로 했다. 이런 날 서로 간섭하지 않는 성격인 게 강력하게 드러나곤 한다. 남편은 지인과 생전 처음 지하철을 타며 축구장을 향했고(그는 이미 어린이날이라는 강을 건넌 지 오래였구나) 큰 아이는 폭우를 뚫고 야외행사를 강행하는 단체의 학생리더로 꿋꿋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이른 외출을 했다. 작은 아이는 노곤한 비에 축 쳐져 자는 둥 마는 둥 하며 영상을 보다가 노래를 듣다가 밀린 수행평가를 한다고 했다. 이 모든 상태와 결별한 나는 기필코 묵혀둔 책을 읽으리라 다짐하며 카페로 향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집에서 어린이날을 보낼 수 없음을 항의하듯 손님들이 몰려들었고, 북새통인 카페의 소란함을 겨우 견뎌야 했다. 많은 인파 속에 혼자 4인 자리를 차지해서 눈치가 보이는데도 손에 쥔 책을 떨어트리면서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 없는 오후를 보냈다. '되는 일이 없는 어린이날이네' ;
비 오는 날 바글거리며 구멍으로 모여드는 개미떼처럼 네 명이 다시 집으로 모였다. 나를 제외한 사람 셋은 연신 만족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않았고, 의미 있는 날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는 미련과 아쉬움은 나만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에게 어린이날이 어떠했는지 생각해 본다. 유년기에는 특별함에 설렜고, 청소년 이후 어린이날이 그저 공휴일이었고 결혼으로 다시 내 아이를 위한 어린이날이 특별해졌다. 그리고 이제 우리 집에 어린이는 없으며, 어린이날이 그저 공휴일 따위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아이들이 성장하고 가정을 이룬 연차가 눅진하게 쌓여 안정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면서도 다시 어린이날에 설렘을 맛볼 일이 없음이 못내 시원 섭섭했는지 밤이 늦도록 잠을 청하지 못했다. 모두 성장하고 있는데 아쉬운 기분. 이제 어린이날과 이별할 때가 되었나 보다. 아리송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다는 핑계로 드라마를 왕창 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며 어린이날이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