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신애 Jan 23. 2019

______사이좋게 지내지 마!

"사이좋게"에 대한 주관적 해석

얼마 전 학부모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가 1학년인데 잘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사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두루두루 지내지 못하는 것 같아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면 어쩌나 잠이 안 온다는 말을 했다. 사이좋게 지내는 걸 모르는 것 같다며, 학교생활이 어렵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물어보았다. "왜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요?"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어졌다. 과연 두루두루 아무런 갈등 없는 것이 사이좋은 것이란 말인가?



나는 평화주의자는 아니다. 타인과 갈등이 생기지 않기 원할 뿐이다. 갈등이 만드는 불편 때문에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선택한 해결방법이 참는 것이었다. 나만 잘 참고 고개를 푹 숙이면 순조롭게 지나간다. 나 혼자였을 때는 그랬다. 가족이 생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본의 아니게 타인과의 갈등이 발생했다. 첫째가 종일 모래놀이에 심취한 3살 때 일이다. 우리 동네 모래놀이터에 새벽부터 밤까지  버티는 아이가 있다는데, 그 아이가 바로 나의 첫째 아이였다.


아이가 어릴 때는, 짓궂은 남자아이가 다가와 장난을 쳐도 멀뚱멀뚱하더니 반전이 일어났다. 왜소한 아이가 다가와 자신의 모래놀이용 중장비를 만질라치면 바로 공격에 들어갔다. 입을 꾹 다물고 작은 눈을 부라리며 그 아이를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그때 알았다. 3살 아기에게도 희번덕하는 표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자주 놀지 않는 곳이면 '그러지 마라'하며 대충 사건을 마무리하겠지만, 일일 최장시간을 모래놀이터 터줏대감으로 지내던 터라 자주 발생하는 억울한 싸움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 천지를 모르는 아기에게 사과를 하라는 게 싫어지만  "사이좋게 지내자. 미안하다고 하자"를 많이 시켰다.


그렇게 해야 터줏대감 아이를 키우는 나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깟 품위와 명예가 뭐라고. 소문을 두려워한 치사한 엄마였다. "빼앗으면 안 돼요. 여기 언니 꺼지요. 그렇게 하지 마세요"라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빨리 갈등이 마무리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한 것 아닐까.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했다. 말썽꾸러기 남자아이들의 본능적 감각 레이더에 어리숙한 아이가 걸려들기 마련이다. 내 아이가 걸려들었다. 남학생들이 잘못하고도 되려 "선생님한테 이른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첫아이는 "미안해"를 여러 번 습관적으로 했다고 한다.


엄마로서 속상했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말고 "그렇게 하는 거 싫어. 나도 선생님한테 알릴 거야"라고 훈련시켰다. 그런데 아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르는 건 나쁜 거야. 그리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선생님이 매일 이야기하셔"라는 것이었다. 속에 천불이 났다.




경쟁하는 마음으로 다른 아이의 잘못을 선생님께 말하는 의도는 나쁘지만, 규칙을 어기고 친구를 괴롭혀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기 때문에 선생님께 알려야 한다. 그것을 고자질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당한 전달 방식이다. 런 엇비슷한 말을 해주었지만 아이는 현장에서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 그냥 당하거나 울기만 했다. (지금 그때 이야기를 하면 코웃음 친다. 어려운 시간을 지나 건강하게 잘 자라 다행이다.)




그 당시 첫째는 사이좋게 지낸다는 말을 어떤 불합리에도 참아서,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상태를 위해 착한 아이는 참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이좋다는 말이 주는 잘못된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 상대의 요구나 행동 중 불합리하고 비인격적인 면을 참는 태도는 좋지 않다. 결국 당하는 아이만 피해를 본다.


주거니 받거니 인격적 기여를 하는 친구 관계는 서로 갈등이 생길 때 서로 맞춰간다. 참아주기도 한다. 친구라면 그렇다. 뾰로통해졌다가 다시 다가와 웃으며 놀고 간식도 나눠 먹는 관계다. 인내나, 기다림은 사이좋게 지냄을 위한 좋은 기술이다.  


일방적인 공격이나 인격적 비하는 참도록 가르치면 안 된다. 참기만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짓궂음을 넘어 고질적으로 내 아이를 찍어두고 상처 주는 말을 하거나 티 나게 놀이에서 제외시킨다면 그 아이에게 강경하게 발언을 해야 한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알려야 한다. 도움이 필요한데 필요를 말하는 것은 고자질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악의적으로 골탕 먹이는 아이를 친구라고 규정할 필요가 없다.


이런 경우도 있다. 내 아이의 베프라고 하면서 주기적으로 자기감정 해소를 위해 부정적 말과 행동을 쏟아붓는 친구가 있다면 강경한 입장을 보이라고 가르치자. 이런 상황에 더 이상 "사이좋게 지내라"는 명제로 내 아이를 괴롭히면 안 된다.




우리의 아이들은 매일 자라고 있다. 물론 아이의 친구들도 자라는 중이다. 우리 아이들의 지성과 감성이 복잡하게 얽혀 사소한 갈등을 겪게 된다는 말이다. 이제 학령기 아이들에게 막연하게 가르치던 "사이좋게 지내기"를 재정립해 주어야 한다.



-'사이좋다"는 것은 친구들과 갈등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친구들과 싸울 수 있다. 잘 싸우면 된다.


-친구란 싸워도 서로 양보하며 풀 수 있는 관계이다.


-갈등이 있어야 더 친해지고 서로 알아간다


-참기만 하면 마음의 병이 온다.


-악의로 다가오는 말과 행동에 과감히 "no"를 표현하는 게 지혜다.


-"no"라고 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두루두루가 아니라,
마음 맞는 한 둘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어가는 것도 '사이좋음'임을 각인시켜주기

한참을 이야기해보니 아이 엄마는 자기 아이가  혼자 놀기를 즐기고 주도적인 성향을 모르고 있었다. 동생들을 데리고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도 몰랐다. 여럿이 어울리는 것에 흥미가 없는 아이를 엄마의 눈으로 재단한 것이다. 이제 엄마가 새로운 시선으로 봐준다면 그 아이는 얼마나 가벼워질까.

작가의 이전글 ______부부 대화의 사소한 비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